#1.5


가스터는 현실의 가스터가 볼 수 없는 방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로그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고, GUI로는 구현되지 않은 장소였다.

방은 좁았다. 가스터가 오랜 시간 회색방에 머물면서 간신히 찾아낸 더미 영역을 재구성한 것이기에 그리 깨끗한 모양도 아니었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었다. UNDER TALE의 세계를 구석구석 보여주는 모니터와 콘솔 PC가 그것이었다. 이것들이 없어도 응용 프로그램의 일종인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도구를 사용하지 않아서는 어쩐지 개운하지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직접 보이지 않는 방을 만든 것도 사생활을 의식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인간인 자신의 잔재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몇십년이나 자신과 함께해 온 의자에 몸을 실었다.

가스터가 로그를 보니 그 사이에도 세계는 몇 번이나 리셋되어 있었다. 관리자와 대화할 때는 회색방의 시간이 30배나 빠르게 간다는 이유도 있기는 했지만 그 속도는 정말이지 경이로웠다. 아마도 곧 다시 한 번 리셋이 일어나리라.

가스터는 콘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당장 다음 루프부터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빠른 편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 관리자 권한을 얻었을 때는 보통 버그의 수정에 대한 부분 밖에는 건드리지 않았지만, 그것을 넓게 말하면 이 프로그램의 코드 자체를 수정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물론 관리권의 일부이기에 제한되는 부분은 있겠지만 버그 수정이 가능할 정도라면 계획대로 수정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가스터는 쉬지않고 자판을 두드렸다. 그 자체가 응용 프로그램이기에 몸이 지치거나 배가 고플 일도 없었다. 인격을 가진만큼 정신적으로 피로하기는 했지만 그는 간만에 시간이 빠르다고 느꼈다.

가상 현실이란 당위성과 현실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것을 구현하는 코드의 양도 방대했다. 어쩌면 수십 조 줄에 달할지도 모르는 복잡하고 정밀한 코드의 작업. 폐쇄망의 특성상 모든 코드를 직접 입력해야 하는 만큼 인간이었던 기억 속에서의 작업보다도 많은 양이었다.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가 프로그램으로서 작성하기 때문이었다. 작업 중에 온 관리자의 호출은 짤막한 보고 메세지로 대신했다. 다행히도 관리자는 그런 가스터를 방해하지 않았다. 마침내 패치 코드를 완성했을때 리셋은 이미 5000번이나 추가로 반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가스터는 크크, 하고 웃었다. 큰 그림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발을 들인 프리스크는 한동안 이 세계를 모험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가스터도 알 수 없었다.


"아가야, 행복한 모험이 될지는 너에게 달려있단다."


곧 모니터에 리셋을 알리는 경고창이 나타났다. 가스터는 이 때에 맞추어 패치 코드를 적용했다.

그 순간, 세계가 격동했다.




#2


"의지."


누군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프리스크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노란색 꽃밭 위에 있었다.

주변은 온통 캄캄했고 오직 꽃밭의 위쪽에 난 구멍에서 비치는 빛만이 그녀를 밝히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분명 와본 적 없는 장소였지만 지금까지 몇 번이고 왔었던 것만 같았다. 프리스크는 일어나서 처음 보는 길을 언제나 그래왔던 것 처럼 나아갔다. 그녀는 곧 친절한 누군가를 만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곧 사람과 같은 얼굴을 가진 커다란 꽃이 나타났다.


"반가워! 내 이름은 플라위! 노란 꽃 플라--"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프리스크는 맹렬하게 손을 뻗었고 노란 꽃, 플라위의 줄기를 움켜쥐었다.

아니, 움켜쥐었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손에 남아 있는 것은 노란색 꽃잎 한 장이었다.


"헤, 너. 머리가 좋은 거야? 아니면 그냥 미친거야?"


목소리는 뒤에서 들렸다. 프리스크가 돌아서자 꽃잎 한 장이 떨어진 플라위가 악마같은 얼굴을 하고 서있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이 세계는 죽거나, 죽이거나니까!"


꽃가루가 날리는 것 처럼 플라위의 주위에 무수히 많은 하얀색 알갱이들이 퍼져나갔다. 프리스크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위험한 것이라고 직감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느새 알갱이들은 프리스크를 포위하고 조금씩, 그렇지만 확실하게 프리스크를 압박하고 있었다.


"어째서…."


몸을 잔뜩 움츠린 프리스크의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희미한 목소리를 흘렸다.


"뭐?"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야…?"

"하?"


플라위는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먼저 당한 것은 자신이었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그녀를 죽인다 하더라도 정당방위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이 피해자인마냥 떠들다니.


"네놈이 먼저 시작해 놓고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차피 죽일 생각이긴 했지만 말이야."

"어째서…."


프리스크는 울고 있었다. 울면서, 바들바들 떨면서 자신의 오른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헤, 동정할 거라고 생각해? 정말 구역질이 나는군. 나는 너 같이 남을 기만하는 녀석이 제일 싫다구."


플라위는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알갱이를 조였다. 그는 언제까지나 기다려줄 만큼 착한 생물이 아니었다.


"어째서…."


프리스크의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변했다. 그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 낯설고, 무서운 상황을. 마침내 그녀는 갓난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죽어!"


플라위는 알갱이로 프리스크를 완전히 감싸서 걸래 조각을 만들 심산이었다.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확실한 죽음이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프리스크는 알갱이들의 탄막 안쪽에서 번개처럼 뛰쳐나왔다. 피하거나, 무언가로 막아낸다거나 하는 새련된 방법이 아니라, 그저 플라위를 향해서 모든 알갱이를 맞으며 뛰어들었다. 그녀는 이미 피투성이었다. 작고 여렸지만, 짐슴의 발톱같은 잔혹함을 품은 손이 플라위의 줄기에 뛰어들었다. 그 짧은 시간에 플라위는 직감했다.

이번에야말로 피할 수 없다. 이 녀석은 진짜 괴물이다. 플라위는 질끈 눈을 감았다.


펑, 하고 커다란 폭발과 함께 플라위는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프리스크의 손은 허공을 갈랐고 날린 몸은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오, 이런. 아가야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이렇게 가여운 아이를 괴롭히다니 나쁜 괴물이구나."


프리스크에게 있어서는 다정하고 낯익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분명 처음 들어보지만 안심할 수 있는 목소리.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앞에 섰다. 프리스크는 그녀가 누군지 알것만 같았다.


"이제 내가 있으니 무서워 할 것은 하나도 없단다. 아가야, 안심하렴. 안심해."


하아, 하고 프리스크의 입에서 긴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눈물 범벅이 된 눈이 무거웠다.

프리스크는 조용히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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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팔에 잠들어있던 흑염룡이 깨어나는 망상 똥글 2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