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터 8까지 순서대로.
어쩌다 내가 이렇게 길게 이어쓰게 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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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다음날.
토리엘의 순찰 인수인계..를 빙자한 폐허 투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상태를 고려한 것인지 동선이 매우 짧았고, 구조상 반드시 낙하해야하는 함정은 떨어지기 좋게 낙엽이 따로 모아져있었다.
덕분에 내가 맨처음 정신이 들었던 꽃밭까지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도 한시간 남짓이었다.
다만 그런 사전작업을 위해 토리엘은 낮의 대부분을 밖에서 보냈고, 덕분에 투어는 시간 상으로는 해질녘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에구구.. 몸이 여기저기 쑤시네.."
꽃밭에 도착한 토리엘은 피로가 많이 쌓인듯 몸 여기저기를 두드렸다.
저절로 어깨라도 좀 주물러드릴까요? 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으나 간신히 참아냈다.
옆집 아줌마나 그냥 친엄마 마냥 친숙한 분위기라 거리낌이 없어진다니까.
아니, 물론 옷 잘라내면서 내 알몸 봤을거고!
의식 없을 때도 모닝 텐트 정도는 일상적으로 봐버렸겠지만서도!
아무리 볼거 못볼거 다 봐버렸대도 그건 특별히 누군가의 흑심이 개입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잖아!
의식적인 스킨쉽은, 그 뭐시냐, 어..
아 씨발, 무슨 게슈탈트 붕괴도 아니고 내가 왜 나 자신한테 나를 변호하고 있냐?
애 가진 염소 아줌마를 여자로 보고 있는 사람이나 할 것처럼..아, 옘병.
"그, 그럼 일단 잠깐 앉아서 쉬죠?"
"그럴까요?"
내면의 소리없는 아우성은 말더듬이로 이어졌으나 토리엘은 별로 이상한 건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자리를 잡고 앉은 다음, 나도 대충 적당한 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뭉갰다.
곧 견디기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토리엘은 이 순간을 즐기는 것처럼 눈을 감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나는 그것을 방해하면 안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말없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토리엘이 띄워둔 마법의 호롱불이 우리 주변을 맴돌고,
불그스름한 빛이 움직이며 놀이터나 됨직한 작은 공동의 벽에 생동감있는 그림자를 뿌렸다.
태양이 없는 지하에서 지상의 빛이 내려올 수 있는 공간은 이 꽃밭을 빼고도 그리 많지 않을테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밤이 깊었는지 몇 없는 별이 반짝이는 손바닥만한 밤하늘이 동굴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까마득하게 높군..
저 위에서 밧줄을 내려준다고 해도 내 힘 가지고 올라가는건 어림 반 푼어치도 없겠다.
내가 떨어진 자리가 꽃밭이 아니라 돌바닥이었으면 그냥 터졌겠는데..
나는 새삼스럽게 스스로가 행운아라는 생각을 강하게 떠올렸다.
얼마 못가서 살해당하거나 다리 문제로 죽거나 이지선다 시한부 인생이긴 하지만,
지상의 삶이나 내 과거, 엄마 얼굴조차 안떠올라서 염소 아줌마한테 어머니상을 투영하고 있는 시궁창 인생이긴 하지만 살아있잖아?
난 괜찮다. 난 괜찮다. 난 괜찮다..
맙소사. 안되겠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지 이거 계속 이렇게 있다가는 자살 충동 느낄 거 같아.
"토리엘?"
그녀는 감았던 눈을 뜨고 나에게 시선을 맞췄다.
"음.. 그 불덩이 말이에요.
저번에도 궁금했었는데 옮겨붙거나 하진 않는거에요?"
"호호. 걱정말아요.
마법으로 만든거라면 총도 살살 쏘면 덜아프거든요."
"총이요? 그건.. 그거는 그렇게 역사가 깊은 물건이 아닌데 어떻게 알고 계신거죠?
인간들하고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도 지상과 연락이 닿았었던거에요?"
"그런건 아니고.. 지하에는 폭포가 있어요.
산 밖에서 부터 흘러드는 강이 있는데, 거기로 인간들이 버린 물건들이 떠내려오는거죠.
냉장고.. 스토브.. 핸드폰..
머리좋은 괴물들은 망가진 물건들을 손보거나 아예 그걸로 기술을 배워서 모조품을 만들기도 해요.
아참. 말 나온 김에.."
토리엘은 로브 안쪽에 손을 넣더니, 꽤나 현대적으로 보이는 핸드폰을 꺼냈다.
사이즈가 그녀 손 크기에 안맞는게 옥에 티라면 티였다.
"이제 서로 떨어져있을 때도 있을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이걸로 연락하기로 해요.
전화번호도 알려줄게요."
나는 액정 사이에 하얀 털이 끼어있는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인간 기술의 레플리카라서 그런지 나로서도 다루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묘하게도 문자 메시지 기능이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인터넷도 먹통이었다.
하긴 인공위성이 신호를 중계해서 운영되는 건데 지하에서 신호가 터질리가 없지..
..가만. 그럼 이런 환경에서 핸드폰이 의미가 있나?
"이거 되는거에요?"
"그럼요. 설마 안되는 걸 줬겠어요?
한 번 걸어봐요."
나는 떨떠름해하면서도 토리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진짜 신호가 가네?
"여보세요?"
"아뇨? 전 토리엘인데요?"
??????
이게 뭔고 싶어서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자니 토리엘이 키득거렸다.
"장난이에요.
이제 쉴만큼 쉰거 같은데 들어갈까요?
내일부턴 일찍 일어나야죠."
무의식적으로 지팡이를 쥔 손을 겨우 진정시켰다.
저런 식의 개그는 질색이다 진짜.
토리엘의 뒤를 따라 공동을 지나다, 문득 시야 한 구석에서 뭔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준 로브를 입고 있는데도 설마 싶어서 재빠르게 좌우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까봤던 노란 꽃 말고 별건 없었다.
"뭐해요! 어서 오지 않고!!"
"갑니다!!"
나는 바쁘게 발과 지팡이를 놀려 간격을 좁혔다.
젠장. 이거 역시 좀 어두운 ㄷ-
"흐윽?!"
갑자기 몸이 떨어지는 느낌에 놀라서 숨을 들이켰고, 곧 전신에 충격이 왔다.
아, 씨발. 평화로운 날이 없냐 어떻게!
불빛이 미처 비추지 못한 곳에 구덩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인간?! 무슨 일이에요?"
"아.. 썅.. 떨어졌어요! 금방 올라갈테니까 이쪽 좀 비춰줘요!"
"지금 가요!"
그 잠깐 사이에 목소리가 훨씬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떨어지는 걸 눈치 못챘던 모양이다.
"발 밑을 조심해야지. 안 그래?"
갑자기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지팡이부터 휘두르고 보았다.
하지만 바람 긁는 소리만 둔하게 후웅-하고 울릴 뿐이었다.
"하하하하하하하. 춤 춰!
좀 더 크게!
더 격렬하게!
그리고.. 더 멍청하게."
처음 듣는 목소리가 음산하게 매번 위치를 바꿔가며 속삭였다.
뭐야 씨발?!
닥치는 대로 갈퀴질하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숨을 죽였다.
목소리는 언제나 내 시야 밖 어둠 속에서 울려오고 있다.
"넌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그 년이 어떤 괴물인지.
그 놈의 약점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목소리는 나를 회유하려는 것 같았지만,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그런걸 파악할 여유는 그 당시의 나에겐 없었다.
"걱정말라구!
난 네 최고의 친구니까..
날 믿으면 모든게 잘 풀릴거야.
조만간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자구.
하하하하하..!"
"헉..헉..허억.."
호흡이 엉망진창이 되면서 시야가 좁아졌다.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오싹한 기운을 떨쳐내기 위해 눈을 감고 샌즈를 떠올렸다.
그 씨발 놈.. 머리만 똑 떼어다가 원효대사 물바가지로 갖다바칠 개새끼..
늑골을 뜯어다가 대갈빡에다 천공수술을 시켜줄 싸이코 새끼..!
내가 넌 기필코 족칠거야!
씨발, 씨발, 씨발!!!
..........
공포에 맞서기 위한 분노의 기폭제가 하필이면 죽음의 공포를 안겨주었던 샌즈라..
이 상황에 맞는 현학적인 표현이 분명 있겠지만 난 그런 걸 떠올릴 정도로 유식하지도 차분하지도 못했다.
목소리는 토리엘이 도착해서 주변을 비추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들려왔다.
난 그 날 불을 켠채로 잠에 들어야했다.
앞으로 폐허를 돌다보면 이 목소리가 또 나를 찾을거란 불안이 나를 계속 괴롭혔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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