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아프다.
흐려진 눈가에 낱낱의 황금빛 조각들이 번져간다. 그 찬란한 색채를 외면하고 싶기라도 한 듯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절벽 너머 바람이 갈색 단발을 어루만지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프리스크가 폐허의 꽃밭에서 몸을 일으켰다.
본래 다시 돌아올 생각 따위 결코 없었을 터였다. 모두가 행복해졌고 앞으로도 계속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토리엘은 매일마다 일찍 일어났었다. 아침잠이 많은 자신을 위해 항상 시간에 맞추어 파이를 준비해 주곤 했다. 늘 변함이 없는 정겨운 미소. 일상을 위로하는 따뜻한 포옹. 그 자애로운 마법사와 함께라면 평화와 행복이라는 단어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일찍이 지하에서 해냈던 것처럼 지상에서도 해낼 수 있었다. 모두의 앞날엔 웃음만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랬었는데...
"으윽..."
역시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건 아프다.
"흑..."
어두운 폐허의 입구가 안 그래도 더 뿌옇게 되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
이러면 안 되지. 정신 차려야 해.
프리스크는 걷기 시작했다. 그 가녀린 몸을 이끌고. 아주 예전에도 그랬듯이 반창고 붙은 왼손에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서. 에봇 산의 낭떠러지에 떨어졌단 걸 처음 깨달았던 그 때, 자신은 겁에 질려 있었다. '괴물'이라는 이형의 이방인들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반 자포자기 식으로 들었던 나뭇가지였다. 그러나 그 괴물들은 그렇게 무섭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아이인 그녀를 무서워하는 괴물들도 있었다. 그냥 이웃사람 같았던 괴물들도 있었다. 정말로 위험했을때 함께 해주러 온 괴물들도 있었다. 그리고 파피루스가 있었다. 언다인과 알피스가 있었다. 샌즈가 있었다...
생각하면 안 되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괜스레 머리를 쓸어 넘기고 그녀는 계속 걷기 시작했다. 지금의 자신에겐 반드시 알아내야 할 사실이 있었다. 처음 지하로 내려온 그 때, 자기 몸 가누는 데만도 바빴던 그 때는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이야기. 어째서인지 누구도 자세히 해주지 않았던 이야기. 드러나지 못했던 진실의 한 조각 편린을.
폐허의 곳곳마다 금이 가고 부서진 대리석 기둥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멋대로 자란 잡초와 풀 주머니 사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눈에 띄는 백색이었다. 그 백색의 기둥들 너머로 아치형으로 장식된 문이 프리스크의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모양의 문이었다. 더 익숙했던건 그 어둠속에서 걸어오는 친숙한 얼굴과 상냥한 미소.
토리엘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토리엘..."
얼마만에 보는 얼굴일까. 나는 언제부터 이렇듯 울보가 되어버린 걸까.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토리엘의 얼굴이 조금씩 걱정의 빛으로 물들어갔다. 그래, 필시 걱정이 될 터였다. 외딴 곳에 혼자 떨어져 있는 여자아이 하나가 자신을 보자마자 점점 울상이 되어가니 걱정이 될 만도 하지. 하지만 그게 아니야. 토리엘. 나는 당신이 무서워서 우는 게 아니에요. 다시 보고 싶었어요. 오히려 너무 반가워서 이런 표정이 나오는 것일 뿐이에요.
"안녕! 아이야. 혼자서 여기까지 오느라 무서웠겠구나. 나는 토리엘, 이 폐허를 지키는 문지기란다."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이 곳은 혼자 있기엔 위험하단다. 내가 널 지켜 줄게."
아무리 아이라지만 처음 보는 인간에게 이처럼 호의를 베풀기도 어려울 것이다. 너무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상냥함에 잠시 취해 있던 프리스크의 뇌리에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 갔다. 첫 번째 아이에게도 토리엘은 이처럼 상냥했을까?
하늘 색 리본을 달고 있던 참을성 많은 아이에게도?
문득 벼락이 친 듯 프리스크는 몸을 움찔했다. 푹신푹신한 깃털들로 이루어진 손이 걱정스러운 듯 결이 매끄러운 갈색 머리를 어루만졌다. 그 온기가 싫진 않았지만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괜히 그 많은 추억과 시간들을 없던 일로 하며 돌아온 것이 아니다. 반드시 알아야만 했다. 소리없는 눈물을 삼키며 프리스크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상냥하고 커다란 눈망울을 똑바로,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토리엘."
그 눈망울이 기쁨으로 빛나려던 때
"저는 친구를 찾으러 여기에 왔어요."
기쁨은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머리에 리본을 단 여자아이에요. 아마 예전에 저처럼 이 장소에 찾아오게 되었을 거에요."
자신은 알아야만 했다.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있나요?"
알아야만 했다.
지상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모두가 각오는 했을 터였다. 오랜 시간동안 반목했던 두 종족 사이의 골이 그리 쉽게 메워지진 않을 것이었다. 물론 그런 건 각오하고 있었다. 프리스크는 자신의 친구들을 믿었고, 자신이 그들에게 마음을 준 것처럼 다른 인간들도 곧 그러리라고 믿었다. 상황은 곧 좋아질 것이었다. 괴물들에게는, 한 번 알게 되면 누구라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상냥한 마음이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상냥했다. 자기같은 어린 아이에게도 믿을 수 없을만치 상냥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에게도, 그들은 상냥했을까?
사건은 머지 않아 터졌다. 에봇 산에는 프리스크 이전에 떨어진 여섯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종의 사자使者였다. 프리스크가 그랬듯이. 그들은 구전으로만 전해져 온 괴물들의 상냥함을 믿고 지하 세계를 방문하기로 자청한 색색으로 빛나는 영혼을 지닌 아이들이었다. 사실 지상은 이미 괴물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과학이 발전했고, 괴물과 인간 영혼의 융합을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역량을 지상은 이미 구축해 놓고 있었다. 여전히 지하와의 접촉을 꺼려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그들 중 소수는 새로운 세계와의 접촉을 원했다.
첫 번째 아이는 의지로 타오르던 불꽃의 영혼을 지닌 소녀였다. 처음으로 지하를 방문하기로 결의한 모든 일의 시발점이었다. 이미 지상에서 수없이 많은 적을 만들어 온 그녀의 행적은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어째서 지하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인가. 누군가는 그녀가 스스로 저지른 난장판에서 도망치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땅을 밟으려 하는 인간의 선구자라고 불렀다. 그토록 왈가왈부하는 많은 사람들의 무성한 말들을 뒤로 한 채 그녀는 에봇 산 너머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에봇 산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괴물이 하나 목격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인간 소녀를 살해했다는 증언도 있었지만 자세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 괴물이 마을의 꽃밭에서 하염없이 서 있었고, 인간들에게 보여지자마자 도망쳤다는 이야기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 괴물이 어떻게 지상으로 올라왔는지, 무엇을 원했으며 무엇을 하려던 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단지 추측만 무성할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소녀가 지하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맑은 하늘의 빛깔을 닮은 강인한 인내의 영혼의 소녀였다. 모두가 말렸지만 그녀의 발길은 결국 에봇 산을 향했다. 그 이후로도 다섯 명의 아이가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졌다. 무슨 일에도 겁먹지 않던 용감한 소년과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춤추던 소녀가 있었다. 지하 세계가 궁금해 어쩔 줄 모르던 호기심 많은 소년과 상냥하고 예민한 마음씨를 가진 소녀가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다 결국 스스로 지하로 뛰어든 소년이 있었다.
그리고... 프리스크 자신이 있었다.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
지하 세계에 달빛은 비추지 않았다. 단지 마법으로 빛나는 편광이 있을 뿐. 그러나 프리스크는 그 빛의 색채를 좋아했다. 지하에선 모든 것이 너무 드러나지도, 가려지지도 않는다. 마음과 마음이 맺는 관계 역시 그렇다. 너무 드러내지도, 숨기지도 말아야 한다. 너무 가까워져도 안되고 또 멀어져서도 안된다. 그 적당한 거리의 사이에서 음유하는 관계의 다정함이 좋았다. 이러한 여유가 프리스크가 지하에서 일어난 그 많은 사건들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괴물들과 친해진 이유 중의 하나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다시 이 세계로, 지금의 이 시간으로 돌아온 것으로 그녀의 마음은 이미 반쯤 부서져 있었다. 부서진 마음은 어떻게든 이 상처를 메우기를 요구했고, 그러한 조급함은 타인의 마음을 섬세히 배려하던 습관을 프리스크로부터 앗아가 버렸다. 그녀는 토리엘을 사랑했다. 토리엘도 아마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스크는 토리엘을 다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토리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대답해 주지 않죠! 그녀는,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 ..."
토리엘의 커다란 눈망울이 울 것처럼 흔들린다. 그녀는 자신을 지켜줄 셈일 것이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괴물들로 가득한 세계에 홀로 떨어져버린 아이를 지켜줄 셈일 것이다. 그 아이에게 과연 진실을 말해도 좋을지, 아이가 진실을 감당할 수 있을지, 토리엘은 가늠할 수 없었다. 지난번엔 자신에게 활활 타오르는 화염구를 몇 번이나 던질 정도로 몰린 뒤에야 비로소 아이들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해 주었다. 지금의 토리엘에게도 역시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이야... 그들은... 그들은 지금 없어. 우리가... 아스고어가 그들을 죽였어."
큰 눈망울이 일그러지며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알아요. 하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물어보아야 했다. 자신은 알아야만 했다.
"토리엘... 당신이 그 아이를 죽였나요?"
너무 늦어서 여기서 끊어용 언바
재밌게 보고 간다
고마웡
토리엘 멘탈 나가겠다....;;
허고곡
신선하네
어서 념글로 가거라
그래야 나중에 찾아서 몰아보기 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