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테일





00


청춘은 불살라야하며 피땀어린 노력은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진부한, 요즘같은 시대의 20대들이 아주 학을 뗄 말들이었지만 대동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그 말을 곱씹으며 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금은 비록 단칸방에서 뜬 구름같은 꿈을 꾸고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저기 저 커다란 무대에 오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뜨거운 조명 완벽한 음악 쏟아지는 박수갈채...그리고 등뼈를 타고 달리는 전율.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녹아내릴듯 저릿해 그만 기타의 줄감개를 너무 조이고 말았다 퉁. 굵은 소리와 함께 끊어지는 줄 그리고 다시 좁디 좁은 자취방으로 곤두박질치는 의식 달콤한 공상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끝나고 만다 조금 머쓱해진 대동은 애꿎은 기타 몸체만 탁탁 두드리다가 곧 들려오는 벨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벌써 꽤 늦은 시간이다, 아마 술에 잔뜩 취해 오늘 하룻밤만 제발 재워달라는 눈치없는 동기녀석일 것이다 별명이 피자빤스였나? 그런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며 대동은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임평화. 대동은 그 이름을 보는 것 만으로도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아마 흰 가운에 검게 자수된 그 세 글자의 이름이 어린 자신의 뇌리에 꽤나 강렬하게 박혔었기 때문이리라... 눈을 감으면 아직도 그 공간이 눈꺼풀 바로 아래에 생생하였다 희고 차갑고 깨끗한 냄새 되새겨보면 금방 또 속이 울렁거리지만 동시에 그 시절 평화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다 대동은 평화를 꽤 좋아했었다 그게 어떤 의미든 간에 지금와서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연락 한 번에 듣도보도 못한 깡촌행 버스를 타게 되다니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평화씨 평화씨 평화씨.어쩌면 저는 한심한 녀석일지도 모르겠네요 창문 너머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점점 번져가는 녹음에 그는 소소하게 감탄할 뿐이었다




그 일의 연장이니까... 알겠으면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내려와.

정말, 스타에게 너무한 거 아닌가요? 제 스케쥴을 생각해주세요!

하 그 뮤지컬인가 뭔가? 정말 웃기지도 않네 한심한 딴따라새끼 주제에

아아 정말 너무하네요 평화씨!

메타톤, 나 정말.. 너랑 만담할 시간 없어. 알겠어?

네 네 알겠네요 그나저나 그 마을 이름 참 독특하네요 애붓마을이라니... 어쩜!




01
말그대로 그림으로 그려낸듯한 정경의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얼굴에 훅 내리쬐는 뙤약볕에 대동은 모자의 챙을 더욱 당겼고 다른 한 손으로는 꾹 눌러담은 캐리어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흙먼지를 풍기며 떠나버린 버스에 덩그러니 남겨진 대동은 잠시 찌부둥한 목을 가볍게 풀더니 곧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자박자박 걷기 시작했다 정말, 도시와는 공기부터가 다르네요? 한껏 들이쉬면 청량감마저 느껴지는듯해 어느새 그는 당신과 같다면을 흥얼거리며 휘청휘청 괴상한 스텝을 밟고 있었다 몹시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어 저편의 당산목도 키득키득 그를 보며 웃었다


애붓 이라는 두 글자가 심플하게 새겨진 비석을 지나 10분정도 더 걷다보면 사진으로나 보았던 그녀의 진료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런 시골 마을에 있기에는 건물의 규모가 상당히 컸는데, 대동이 품은 미미한 의구심은 마침 박스를 한 아름 껴안고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 평화의 모습에 눈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임평화 자기, 오랜만이네요!
아 그래. 이것 좀 옮겨라
설마 잡일 시키려고 절 부른 건 아니겠죠?
하 그때 네 입을 꿰매버렸어야 했는데...


한참을 알 수 없는 내용물의 박스를 나르고 기진맥진해진 대동에게는 진료소의 열쇠 두 벌이 주어졌다 하나는 출입문, 다른 하나는 대동이 쓰게 될 방의 열쇠로 한 달정도 묵게 될 방 치고는 꽤나 쾌적한 공간이었다 사실 오래 전 다른 누군가가 사용했던듯 생활감이 느껴졌지만 그는 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가져온 짐들을 풀었고 어느정도 정리가 끝나자 옷을 갈아입고 슬그머니 진료소를 빠져나왔다 그녀가 알게 된다면 무지막지 화를 낼 것이 분명하지만... 대동은 우선 이 시골의 정취를 충분히 만끽하고 싶었다 흐르는 시냇물 우거진 녹음 달큰한 흙냄새! 8시간을 꼬박 버스에 박혀있던 그에게 전부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운 것들이었다 평화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평화의 연장선...그러니까 그 미지의 호르몬 주사는 대동을 예민하게 만들 것이 분명했고 어쩌면 앓아누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대동이 30분정도 마을을 둘러봤을 때 그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정말 평범한 시골 마을이었지만 그 주민들이 기묘했다 아니 정확히는 께름칙했다 처음 보는 외지인인 대동을 곁눈질로 힐끗 쳐다보더니 후다닥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질 않나 낫을 갈고 있던 남자는 대동이 보이자 벌떡 일어서서 뚫어지게 이쪽을 바라보는데 정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저들끼리 무어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대문 틈 사이로 훔쳐보는 눈빛이 번뜩인다 그 모든 것이 비밀스럽기는커녕 아주 대놓고 이뤄지고 있어서 대동은 자신이 뭔가 잘못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고 옷 매무새도 몇 번을 확인해봤지만 역시 집히는 구석은 찾을 수 없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을 어려워하는 걸까요?
적당하게 생긴 정자에 앉은 대동은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마을은 유난히 나무가 많은 것 같네요 때마침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와 잎사귀의 소리가 여기저기 파스스 들려오고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맺힌 땀을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평온해짐을 느끼는 찰나 불현듯 차갑고 딱딱한 것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흠칫 훌쩍 물러난 대동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아 미안 놀랐나?
아니... 괜찮아요

희여멀건 해골이 여유롭게 헤죽거리고 있었다 그는 후줄근한 츄리닝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챙이 꽤 넓어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이 서늘하게 어둑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말야
진료소에 임평화씨 아시나요? 우리 자기의 일을 도와주러 오늘 막 내려왔어요!
그래...? 나는 새준이라고 해 뼈다귀 박새준.

새준은 악수를 청하는듯 오른손을 내밀었지만 대동은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그것을 흘려넘겼다


저는 메타톤이라고 불러주세요 자기!
음.. 도시놈들은 원래 그렇게 다 '골' 때리는 이름인가?
하하 저는 특별한 스타이니까요!
헤.. 그래? 여튼 잘 지내보자구


새준은 이 요상야릇한 외지인이 평화가 데려온 카데바란 것을 알게 되자 그에게 더 이상의 제재를 가할 생각이 없어졌다 그는 실없는 농담을 몇번 더 하다가 이윽고 밭일을 해야 한다며 들고있던 낫을 휙휙 흔드는 간단한 작별인사를 끝으로 느릿느릿 작은 텃밭쪽으로 향하였고 처음으로 살가운 대화를 나눈 것에 대동은 퍽 즐거워졌다 괜한 걱정이었을까 생각하며 폴짝 정자에서 내려왔고 정말로 그 걱정이 무색하게 아마 내일, 빠르면 오늘 저녁 마을의 모두가 경계를 풀고 환영식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새준과의 대화를 본 마을 사람들이 어느새 하나 둘 상냥한 표정을 띄우고 대동에게 말을 건내기 시작했다 대동은 넉살좋게 웃어보였지만 글쎄, 그는 마을의 주민들 모두가 살짝 어설픈 배우라고 생각했다

마대동이 새준의 밭에 풀을 벨 만한 작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건 꽤 나중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