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서가 깜빡인다.

나는 멍하니 자리에 앉아 밝게 빛나는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사실은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바라본다 함은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걸 전제로 해야하지만, 지금 내가 모니터를 인식하고 보는 게아니라 모니터가 내 시선 중간에 있는 것 뿐이니까.
하지만 지금 난 모니터를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모니터를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모니터를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럼 당연히 모니터에 대해서도 인식이 미칠 게 아닌가? 그럼 난 지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지금 난 모니터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니터 안 화면을 생각하고 있다. 하얀 화면 위에서 깜빡깜빡이는 이 검은 커서를 바라보면서 그 커서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럼 모니터를 인식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모니터를 인식하지않고 모니터 안의 커서를 인식하는 게 가능한가? 그건 책을 읽으면서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 만큼 모순된 게 아닌가? 우리는 책을 읽을 때 종이가 아니라 그 안의 검은 활자를 읽는다. 하지만 그 활자를 읽기 위해서는 손으로 책을 잡고 넘겨가며 읽어야만 한다. 그러니 당연히 책이라는 물리적 실체를 인식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책을 읽는단 말인가?
그러나 이건 곧바로 부정당할 수 있다. 책이야 우리가 직접 잡고 있어야하지만 모니터는 그렇지 않지 않은가? 책이 아니라 그림을 생각 해 보자.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내부의 캔버스를 보지 외부의 액자를 보는 게 아니잖는가? 그림의 액자는 그저 틀일 뿐, 그걸 주의깊게 살필 이유가 없고 당연히 틀을 인식에서 배제하게 된다. 그러니 모니터 안 화면을 보면서 모니터를 인식하지 않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위와 같은 건 논점을 잘못 잡은 걸 수도 있다. 모니터는 액자의 틀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그림이 그려진 그 종이, 그리고 그 그림의 재료가 되는 물감들 그 자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당연히 그 그림의 상황을 보지만 동시에 그 그림의 느낌을 물감과 종이에서 받지 않는가? 그럼 이걸 인식하지 않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애초에 난 커서를 인식하고 있는 게 맞나? 어쩌면 이것 부터가 잘못 된 걸지 모른다. 난 커서를 보고 있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이 하얀 공백을 어떻게 채워나갈지에 대한 생각이 있다. 그럼 이 커서는 그저 하나의 기호이고, 내가 진정 인식하고 있는 건 이 공백과 그 공백을 채울 수도 있는 일종의 가능성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러한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 건 결국 이 깜빡이는 커서다. 커서가 아니라면 공백을 인식하지 않을 것이고, 화면이 없다면 커서가 깜빡이지도 않을 것이고, 모니터가 없으면 화면도 없을 것이다. 그럼 이 커서를, 화면을, 모니터를 모두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 공백을 채울 무언가를 생각하는 데 꼭 커서가 필요한 건 아니지 않은가? 지금이야 내가 이 커서를 보고 공백을 생각하는 것이지만, 물을 마시면서, 밥을 먹으면서, 길을 걸으면서, 누워 눈을 감고서도 생각할 수 있다. 결국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이 커서가 깜빡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잖는가?
하지만 이런 생각 자체가 불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커서는 여전히 깜빡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