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예능이 끝났다. 당신은 노트북 앞에 앉았다. 아내는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나갔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혼자만의 시간이다. 노트북의 전원을 킨다. 버튼을 눌러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이 낯설다. 이제 기계는 당신이 몇 마디 꺼내기만 하면 완벽히 준비된 상태로 당신 앞에 나타난다. 더 이상 저런 고물이 필요 없음에도 붙잡고 있는 이유는 미련 때문이 아닐까, 당신은 잠시 생각한다.
‘윈도우 XP’라는 글씨가 잠깐 화면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팬은 위잉위잉 시끄럽게 돌아간다. 잠시 기다리니 어떤 그림이 눈 앞에 펼쳐진다. 사람들이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이다. 아니 자세히 보니 사람이 아니다. 계속 들여다보니 누군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사실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이 좋아했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전부 잊기 마련이다. 그래도 당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나마 기억을 한다. 잊을 수 없었다. 당시에도 촌스러웠고 어떻게 보면 조악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림. 그 그림이 나왔던 게임.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당신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물론 당신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 빼곤 전부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당신은 잠시 노트북을 덮고 맥주를 꺼내러 간다. 세상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전을 이룩한다. 하지만 발전을 바란 부분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법이다. 컴퓨터는 나날이 똑똑해져 온 집안의 가전을 관리하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막상 맥주를 눈 앞에 가져다 주는 기계는 아직도 보급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막연하게 다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비용, 기술력의 한계, 수요. 어른들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당신은 다시 자리에 앉아 터치패드 위에서 살살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만 있으면 다시 능숙하게 조작할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아직은 낯설다. 맥주 캔을 땄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당신은 구석에 있는 빨간 하트 아이콘을 눌러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고전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당신이 어렸을 때에도 촌스럽다고 놀림 받았을 법한 노래다. 당신은 그것이 싫지 않았다. 이유는 당신도 모른다. 당신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화면이 바뀐다. 인간과 몬스터가 싸웠다. 몬스터는 지하에 갇혔다. 낡아빠진 클리셰다. 에봇 산에 가는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누군가 떨어졌다. 그리고 로고가 나올 차례인가? 하지만 화면은 여전히 어둡다.
*헤, 오랜만이군.
*얼마만이지 꼬맹이? 모두가 널 찾았다고. 아니 이제 꼬맹이가 아닌가?
낮은 기계음이 연속적으로 들린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상한 느낌만 들 뿐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군. 나는 샌즈, 뼈다귀 샌즈야.
방귀소리가 들린다.
*헤, 이래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하긴, 너에겐 나는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던지는 해골이었겠지. 나는 그렇다 쳐도 파피루스를 기억하지 못하면 파피루스는 정말 실망할 거야.
*아니, 다시 친구가 되자고 할 지도 모르겠다. 걔는 전혀 변하지 않았어.
*네가 기억을 못하더라도 우린 항상 너에게 고마워하고 있어, 친구.
화면이 밝아진다. 인간 모양의 캐릭터가 런닝머신 위를 걷고 있다. 화면 한 구석에는 작은 소용돌이가 돌고 있다. 자세히 보니 양말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반대쪽 구석에는 작고 뚱뚱한 해골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이상하게 생긴 캐릭터다. 하지만 얼굴을 보니 기억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기억이 난다. 게임의 최종보스였고 친구가 정말 좋아했던 캐릭터다. 친구뿐만 아니라 모두가 좋아했다. 친구는 괴물들을 다 죽인 후에 볼 수 있는 샌즈가 정말 멋있다고 했었다. 하지만 당신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당신은 친구들과 게임을 하러 갈 때마다 발컨이라며 욕을 먹었다. 이 게임이라고 다를 바는 없었다. 소위 ‘몰살루트’를 타다 장군 캐릭터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서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당신은 그 캐릭터를 싫어하지 않았다. 당신을 죽이려고 들었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캐릭터가 묘하게 아내를 닮은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뭘 해야 될 지 잘 모르겠지?
당신이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다시 낮고 반복적인 기계음이 들려왔다.
*왼쪽으로 쭉 가봐. 음 그쪽이 아니라 반대쪽. 그리고 일단 이 집을 나가야 돼. 그건 내가 도와주지.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었다. 당신은 숲 앞에 서있다.
*이제부턴 너의 몫이야. 한 번 가봐.
왼쪽으로 문이 하나 나 있다. 당신은 지체하지 않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란 복도를 따라 들어가니 어떤 집이 보인다. 익숙한 풍경이다. 당신은 꽤 오랜 시간 그곳에 머물렀었다. 이 집의 주인은 굉장히 인자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항상 당신을 지켜주고 응원해줬다. 왜였을까. 그 때도 지금처럼 이유 없는 호의는 찾기 힘든 시절이었다.
집을 나왔다. 이상한 장치들을 지나가니 새까만 화면이 다시 나타났다. 다시 그 해골바가지가 나타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려도 나오질 않아 그 해골이 말하는 대로 왼쪽으로 갔다. 어린 염소가 꽃밭 앞에 앉아있다. 당신은 기억한다. 그 노란 꽃밭에서 씁쓸하게 웃던 어린 괴물을.
당신은 잠시 컴퓨터에서 손을 떼고 맥주를 들이켰다. 알싸한 알루미늄 맛이 느껴졌다. 다시 Z키를 눌렀다. 어린 괴물은 당신이 잘 모르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당신은 찬찬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어린 괴물의 입에서 잔인한 이야기가 나온다. ‘죽거나 죽이거나.’ 당신은 이미 미지근해진 캔을 내려놓고 화면에 집중했다.
*하지만 널 만난 후로, 나는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게 됐어. 난 옳았어. 완벽한 결정은 아니었지만 매번 후회하며 살 순 없잖아?
*내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
*아, 그리고, 바깥으로 나가면 조심해야 해. 사람들이 여기만큼 따뜻하진 않을 거야. 저기 저 바깥엔 수많은 플라위가 있거든.
*여기처럼 친절하게 구는 것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순 없을 거야.
*프리스크, 죽지도 마. 죽이지도 말고. 그게 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야.
당신은 어린 괴물에게 작별을 고하고 문 밖으로 나선다. 다시 보라색 배경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그 길을 걷는 당신의 기분은 다르다. 플라위. 당신은 그 꽃을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지 않았더라도 플라위에 대해선 잘 알 수밖에 없다. 당신은 플라위다. 당신은 죽진 않았지만 이런 저런 미명 하에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왔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멍하니 길을 걷다 보니 배경이 하얗게 바뀌어있다. 별 생각 없이 길을 따라간다. 어두워졌다 다시 붉어졌다. 잠시 걷다 보니 다시 어두워진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당신은 모든 것이 기억났다. 당신이 실수로 그녀를 죽였을 때도 당신을 생각해주던 토리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응원해주던 파피루스, 결국엔 내 편이 되어 준 언다인, 당신의 팬이었던 알피스, 메타톤, 아스고어.
그리고 샌즈.
*헤, 꼬맹아. 이제 과거에 네가 얼마나 훌륭한 일을 했는지 기억해?
*네가 바깥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나는 잘 몰라. 우리가 기억하는 네 모습과 다를 수도 있었겠지.
맞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그렇게 따뜻했잖아? 넌 밖에서도 잘할 거야.
그리고 빛나는 태양이 보였다.
당신은 노트북을 덮는다. 잠시 노트북 위에 고개를 묻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내가 돌아왔다.
“오빠, 왜 그래?”
“아냐, 별 거.”
“별 거 아니긴. 오늘 좀 이상한데? 정말 뭔 일 없었어?”
당신은 계속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 당신은 꽤 잔인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당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 불안감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웠다. 어때? 그 소감이? 모두를 딛고 일어선 소감이 어때? 그리고 네가 그렇게 다른 사람을 죽였어도 아직도 넌 아래에 있어. 그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파트너?
당신은 위선자야. 솔직히 말해봐. 너는 나를 만나기 전부터 알량한 권력을 위해 사람들을 짓밟았지. 그러다 나를 만나고 성인군자마냥 모두를 살리고 다녔지. 그러면 뭐해. 우리는 그저 프로그램의 일부일 뿐인데. 진짜 사람들에겐 넌 어떻게 했었지? 뭐, 네 아내에겐 친절했을 지도 모르겠네. 근데 가끔 난 네 아내가 네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란 생각이 들어. 가족. 좋은 핑계야. 가족이란 이름 하엔 그 어떤 잔인한 짓도 용서될 수 있지. 부모의 기대, 가정의 안위. 다 좋은 핑계야. 그렇지?
게임을 같이 했던 친구를 기억해? 그 친구는 어떻게 됐더라? 그래. 회사에서 잘렸었지. 너 때문에. 나중에 그 친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 뭐해. 어른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아냐 파트너. 다른 방법이 분명히 있었어. 단지 넌 네가 두렵다는 이유로 그 친구에게 모든 걸 떠넘겼지. 넌 모니터 안에서는 용기 있었지만 태양 아래에서는 겁쟁이였어.
당신은 고물 노트북을 구석에 집어넣는다. 아내는 피곤했는지 이미 잠이 들어있다. 당신은 그 옆에 조용히 눕는다. 눈을 뜨고 일어나면 당신은 이 일을 잊어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경험이 당신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기를 바란다. 아마 당신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겁쟁이가 한 순간에 영웅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이미 우리는 당신에게 죽지도, 죽이지도 말라 부탁했었다. 하지만, 당신은 그대로였다. 주말이 끝나면 당신은 다시 플라위로 돌아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닐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바란다. 당신이 바깥에서도 잘해주기를. 그리고 나는 당신이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당신은 그들에게만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당신은 가능성이 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죽지도 죽이지도 않을 수도 있다. 사람은 그렇게 변화하는 것이다.
파트너,
추억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어줘.
티비보다 생각나서 씀. 밑에는 그냥 쓰다가 버린 것들.
*Bonus-몰살루트.
멍하니 길을 걷다 보니 배경이 하얗게 바뀌어있다. 별 생각 없이 길을 따라간다. 어두워졌다, 붉어졌다, 잠시 걷다 보니 다시 어두워진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당신은 모든 것이 기억났다. 당신이 실수로 그녀를 죽였을 때도 당신을 생각해주던 토리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응원해주던 파피루스, 결국엔 내 편이 되어 준 언다인, 당신의 팬이었던 알피스, 메타톤, 아스고어.
그리고 샌즈.
*헤, 꼬맹아. 이제 과거에 네가 얼마나 훌륭한 일을 했는지 기억해?
*네가 바깥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나는 잘 몰라. 우리가 기억하는 네 모습과 다를 수도 있었겠지.
*사실 그런 건 관심 없어.
*…
*왜 돌아왔지?
샌즈의 눈이 어두워졌다.
*왜 이제 돌아와서 시간을 다시 되돌린 거지? 네 알량한 추억을 되짚고 싶어서? 그래서 우리가 겨우 쌓아 올린 희망을 다시 짓밟은 거야?
*헤, 이봐.
*너 같은 놈들은 나쁜 시간을 보내야 돼.
샌즈의 왼쪽 눈이 빛났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게임 오버란 문구가 떴다. 당신은 찝찝한 기분으로 노트북을 덮었다. 당신은 몰살 언다인도 깨지 못한 발컨이기 때문이다.
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