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이 바닥에 묶인 것 처럼 무거웠다. 목 아래까지 덮힌 무언가가 끈적한 액체에 젖어 찝찝한 감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 정면을 바라 보자 눈이 타는 것만 같아 곧바로 다시 감았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래서는 마치 죽은 사람 같아. 숨쉬는 것조차 맨 발로 자갈밭을 걷는 것 처럼 괴로웠다.

"아가야! 무리하면 안 된단다."

누군가의 둔탁한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온 몸을 무겁게 짓누르던 것을 벗겨내고 차갑게 식은 수건 같은 것으로 몸을 닦아 주었다. 찝찝했던 것은 땀 때문이었는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다시 한 번 눈을 뜨니 여전히 눈이 따갑기는 했지만 희미하게 하얀 물체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나 빨리 눈을 뜨다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푹신한 털뭉치가 내 손을 어루만졌다. 언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그리운 감각. 하지만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마냥 부옇게 흐려서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앉을 수 있겠니?"

절대로 무리라고 생각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힘을 주려고 생각해도 근육이 찢어질 것 처럼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하얀색의 누군가는 내 몸을 떠받쳐 앉혔다. 온 몸의 뼈가 비명을 질렀지만 입으로는 그 비명을 지르는 것 조차 할 수 없었다. 눈이 간신히 빛에 익숙해지고 차츰 상대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오, 아가야. 내 얼굴을 알아보겠니?"

그녀는 염소의 얼굴과 뿔을 가진 커다란 괴물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이형의 존재였지만 놀랍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 처럼 친근했다.

"아가야. 네가 조금 더 쉬기를 바랬는데. 잠시만 기다리렴."

괴물의 눈가에 그녀의 덩치에 걸맞은 커다란 물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방에서 나갔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뻣뻣한 목을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고 나는 창문 하나 없는 작은 방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빛이라고는 거의 다 녹아버린 양초 하나가 다였고, 내가 앉은 침대는 푹신했지만 틀이 전부 바래있었다.

나는 내 몸을 내려다 보았다. 달려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여자인 것은 분명했지만 굴곡이라곤 하나도 없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쿵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돌아온 괴물은 양 손에 가지런히 정돈 된 하얀 속옷과 초록색 스웨터, 갈색 반바지, 두꺼운 외투, 그리고 튼튼해 보이는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너를 시련에 들게 하는 나를 용서하려무나."

나는 괴물의 손에 이끌려 그것들을 입었다. 옷의 무게만으로도 온 몸이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지만 괴물은 단호했다.

옷을 다 입고 지팡이를 든 나는 괴물의 부축을 받아 벽난로가 있는 넓은 방에 올라왔다. 사실 말이 부축이었지 실상은 끌려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거기에는 염소 괴물 외에도 아주 작은 괴물들이 잔뜩 있었다. 그들은 내 모습을 보더니 신기한 것을 보는 눈으로 우리들 주위에 몰려들었다.

"키드! 어디 있니!" 염소 괴물이 우렁찬 목소리로 부르자 곧 노란색과 갈색의 줄무늬 옷을 입은 꼬마 괴물이 문 밖에서 나타났다. "네 원장님!" 씩씩하게 대답한 꼬마 괴물은 양 팔이 없었다. 하지만 반짝이는 눈동자는 그런 것 따위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단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식사를 해야겠지. 얘들아, 식탁을 차리는 것을 도와주겠니?"

네! 하고 큰 소리로 합창한 작은 괴물들은 우르르 다른 방으로 몰려갔다. 그 와 중에도 내게서 눈을 때지 못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에게 말을 걸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곧 우리는 준비된 식탁에 앉았고 염소 괴물이 커다란 냄비에 담긴 많은 양의 스튜를 가져왔다. 그녀는 하얀 접시에 스튜를 듬뿍 담아서 나와 꼬마 괴물의 앞에 놓아주었다.

"키드. 오늘은 많이 먹어도 된단다. 대신 너에게 중요한 부탁이 있어."
"원장 선생님 부탁이라면 이런거 안 먹어도 되요! 스튜는 다른 애들에게 주고 맡겨만 주세요!"

키드라고 불린 꼬마 괴물은 양 손 대신 코 끝으로 스튜가 담긴 접시를 밀었지만 염소 괴물은 고개를 저었다.

"키드. 이 일은 많이 힘들 거란다. 든든히 먹지 않으면 버티지 못 할 거야. 아가야. 너에게도 무척이나 힘든 여정이 되겠지만 이 모든 것은 너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란다."

그녀는 작은 수저로 내 입에 스튜를 넣어주면서 다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꼬마 괴물도 이제는 접시에 얼굴을 박고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묽은 스튜는 짜고 달았지만 텅 비어있던 속에 순식간에 스며들었다. 나는 스튜를 2 접시나 먹었다.

상황은 빠르게 바뀌었다. 마치 배속으로 재생하는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시급한 문제인지도 몰랐다. 염소 괴물은 식사를 마친 나와 키드를 꼭 끌어안았다.

"잊지 마렴. 스노우딘의 눈은 상냥하지만 혹독하기도 하단다. 항상 몸 조심하고, 다른 괴물을 믿으면 안 돼. 폐허를 나가면 눈 내리는 낭떠러지 아래서 아스리엘을 찾으렴. 키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를 아스리엘이 있는 곳까지 지켜주어야 한단다."

꼬마 괴물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나만 믿으라구!" 아이는 염소 괴물이 알려준 대로 내 오른쪽에 바싹 붙어 섰다. 나는 한 손으로는 키드의 머리를, 다른 한 손으로 지팡이를 잡았다. 그제서야 나는 후들후들 떨리고 아픈 다리를 간신히 움직일 수 있었다.

"오, 내 사랑하는 아가들아. 너희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구나. 하지만 그 아이... 아스리엘의 선택이라면 분명 괜찮을 거란다. 아스리엘은 현명한 아이야."

그녀는 육중한 돌문을 열었다. 앞쪽에서 차가운 돌풍이 얼굴을 때렸다. 나는 여전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랐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염소 괴물은 마지막으로 나와 키드의 목에 두터운 목걸이를 감아주면서 말했다.

"언제 어느 때라도 너 자신을 잃지 마렴. 의지를 가져야 한단다."

키드의 느린 걸음에 맞추어 나는 문 밖으로 향했다. 너 자신을 잃지 마렴. 그 말이 가슴 속에 또아리를 튼 것 처럼 답답하게 남았다.

그러고 보면.

"......난 누구지?"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