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의 기원을 보여준다.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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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차라..."
맥킨리 씨는 여전히 이런 말을 해야될지 말아야될지 갈팡질팡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아니, 그가 그러지 않는다해도 차라는 이미 맥킨리 씨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무엇일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단지, 그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을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마음 한 켠에서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하려 발버둥치는 것이 그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걸 방해하고 있을 뿐이였다.
"...너희 부모님께서...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단다."
맥킨리 씨는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차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호사 맥킨리 씨, 그리고 이제 막 8살이 될 참이였던 차라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채로 꽤 오랜 시간을 침묵하며 보냈다.
바깥에서는 상당히 구질구질한 잿빛을 띤 하늘, 그리고 가끔 간헐적으로 하늘을 뒤흔드는 요란한 천둥소리가 천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그리고 한 어린아이의 부모님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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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비가 내렸다.
차라는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딱 한 번 입었던 정장을, 오늘은 거의 하루종일을 입고 있어야 했다.
엄마가 깔깔대며 치수를 잰다고 부산을 떨던게 언제였을까. 그리고 아빠가 옆에서 애써 웃음을 참으면서 한 장 한 장 차라의 정장차림을 카메라에 담던 건 또 언제였을까.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한 때는 자신의 영원한 보호자였던 이들의 싸늘하게 식어버린 얼굴을 보며 차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시기가 좀 차이날 뿐이지, 결국은 모두 자신의 부모님같이 차디찬 시체가 되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게 될텐데...그들과 추억을 쌓는다는 게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걸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근엄한 표정을 지은채 '부모님의 일은 유감이다.',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이라고 혀를 차며 차라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다.
우산도 없이 쏟아지는 빗 속 아래서 몇시간을 서있었던 차라는 아무 생각없이 그들의 손을 꽉 잡고, 몇 번 흔들고, 놓았다.
자기가 물에 빠진 새앙쥐 꼴이 되어있었음을 알아차린 건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부모님의 변호사 맥킨리 씨는 장례식 이후 차라에게 몇 가지를 알려주었다.
차라의 이모 분께서 '고아'가 된 차라를 양자식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한다는 것과, 며칠 후에는 차라의 물건들이 모두 이모의 집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간단한 얘기였다.
차라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맥킨리 씨는 고개를 만족스레 끄덕이며 수첩에 무언가를 빠르게 휘갈겨 썼다.
그게 대화의 끝이였다.
차라의 부모님의 유산이 차라를 입양하기로 한 이모에게 모두 상속된다는 걸 알아차리고, 또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것도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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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는 이모를 볼때마다-부모님이 살아있었을 때는-정말 너구리를 똑같이 빼닮았다고 감탄하고는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성격도 외모만큼이나 몹시 닮았었고, 그런 엄청난 진리를 알아낸 차라는 엄마에게 항상 자신의 놀라운 발견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고는 했다. 그럴때마다 엄마는 의미 모를 웃음을 지으면서 차라를 품에 꼭 껴안아주었다.
하지만 이제 품에 자신을 껴안아줄 엄마도 없었다. 동시에, 그 놀라운 사실을 같이 공유할 상대도 없어졌다.
그저 짜증잘내고, 난폭하고, 또 돈에 대해서는 머리가 비상할 정도로 잘 돌아가는 이모와 그 아내에 그 남편꼴인 이모부가 곁에 있을 뿐이였다.
자식이 없어서 차라를 양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그들은 자식이 없어도 충분히 잘 살 인종이였다.
아, '자식'이 없다면 때려서 화풀이를 할 상대가 없을테니 없어도 완벽하게 잘 살 수 있다는 말엔 좀 과장이 들어간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이 된 차라는 이모와 이모부에게 충분히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별 거 없고, 미친듯이 어지러운 집안을 내팽겨치고 놀러나가는 이모와 이모부를 대신해 온갖 집안일을 처리하고, 그들이 돌아오면(대부분의 경우에는 상당히 기분이 안 좋은 상태였다) 샌드백이 되어서 신나게 얻어맞음으로서 화풀이 대상이 되어주면 충분했다.
그래도 차라는 이상하게도 그 모든 걸 그대로 버텼다.
온 몸이 피멍투성이가 되도, 이모부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자신을 훑고 지나가는 걸 느껴도, 자신이 감금된 노예나 다름없다는 걸 깨달아도. 그 단정한 얼굴 위에 떠있는 묘하게 밝은 미소는 차라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때부터 제정신을 놓아버리기로 결정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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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사실 정확하게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건지는 차라 자신도 떠올리지 못했다.
확실했던 점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모부는 그 살찐 배에 간신히 걸쳐져있던 셔츠 전체로 붉은 빛깔의 무언가가 점점 번져나가고 있는 채로 책장에 비스듬히 기대어앉아있었다. 숨소리는 가쁘고, 거칠었다.
이모는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로 새된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자리를 벗어나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무언가 미친듯이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몸과 마음이 제대로 팀워크를 이루지 못하는 상태라서 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럼 자신은?
모르겠다.
칼을 손에 들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환한 미소를 여전히 짓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악마년! 악마! 악마년!! 넌 괴물년이야!!!"이라고 깩깩 비명을 내지르는 이모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때는 분명히 정신의 끈을 놓아버렸다고 생각한다.
이모의 눈두덩 사이로 칼날이 파고드는 그 통쾌한 느낌이 두 손으로 짜릿하게 전해져오는 걸 시작으로, 차라는 미친듯이 식칼을 이모의 머리를 향해 마구 내리쳤다.
몇백번을 내려쳤는건지는 잘 기억이 안난다.
대신...자신이 미친듯이 웃어댔다는 건 분명히 기억이 났다.
너무나 기뻐서 소리내서 크게 웃지않고는 못버틸 것 같아서,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정말 즐겁게 깔깔거리면서,
그 즐거움을 계속 느껴보고 싶어서 지칠 때까지 이모라는 이름의 원수의 머리통을 난도질했다.
이제 앞에 남아있는 건 거의 죽어가는 이모부, 그리고 목에서 여전히 피를 내뿜으며 경련을 일으키는 중인 맥킨리 씨, 그리고 얼굴이 완벽히 짓뭉개져버린 이모의 잔해뿐이였다.
맥킨리 씨는 왜 찔렀는건지, 사실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안났다. 찌를 만 했으니까 찔렀다...정도의 생각이 들 뿐.
차라는 서서히 거실의 양탄자 위를 적시는 핏물 위로, 천천히 무릎을 끓었다.
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옷은 좀 많이 더러워보였다. 흙장난 하다가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해 얼빠진 어린아이 같았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킥킥댔다.
계속 웃다보니 어느새 무언가에 대해 진심으로 깔깔대고 있었고, 그래서 그걸 마음속에 담아둬봤자 좋을 것도 없을 것 같아서 더욱 더 명랑하게 웃었다.
차라가 아는 건 한 가지뿐이였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이렇게 기쁘게 진심으로 웃어본 일은, 자신이 이모와 이모부, 그리고 부모님의 변호사를 살해한 날이 처음인 것 같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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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봇산.
괴물들이 인간에게 패배해서 숨어들어가고, 갇힌 곳. 처음에 이곳의 전설을 들었을 땐 옛날동화 속 이야기쯤 될 것이라고밖에 여기지 않았다.
이곳을 제 발로 찾아오기 전까지도 그랬다.
차라는 지칠대로 지친 채 조심스레 산 분화구 가장자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이모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괴물, 그리고 악마.
차라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이모는 최소한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였다. 자기는 구제불능의 악마이고,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 맞았다.
자기는 엄연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인류는 하나다'라는 복잡한 이론같은 건 몰라도, 자신의 부모님같이 같은 동족끼리 애정을 가지고 돌봐주는 게 당연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같은 인간이라는 사람들은 자신을 철저하게 배신했다.
안타깝다고 말하고는 그냥 돌아서버리고, 자기네들의 욕심을 위해 차라를 헌신짝처럼 다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인간이라는 걸까.
그래서 차라는 결심했다.
인간으로서 살고 싶지는 않다고.
차라리 이모의 발악에서 들은 것처럼, 괴물로 죽겠다고...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인간세계에 대한 증오를 언제든지 간직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다.
차라는 힘겹게 일어섰다.
휘청휘청거리는 위태로운 걸음걸이인데도 거기엔 전혀 괘의치 않고,
망설이지 않고,
한 걸음을,
분화구를 향한 낭떠러지를 향해 옮겼다.
분화구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