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적인것은 평행 이동 유동적인것은 역방향조정 본질은 양측직선방향일치다

 

 

 

 

 

 



이것이 일체에 동시에 적용되는 조화된 마음을 말할수 있는 이유이며

 



일체가 결국은 마음을 근본으로 한다는 철저한 반증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어디든 평등하게 마음이 작용함을 말한다)


왜냐면 욕구는 언제나 스스로를 근본으로 상수적 기대를 갖기 때문이다. 과거미래현재가 그러하다

따로 볼 것이 없이 자기의 마음을 직진하여 꿰뚫어 볼 수 있다면 이미 해탈한것이다.

욕구가 곧 배울바이자 가르칠 바이로다.




바로보면 일체와 중생이 다르지 않지만


지혜로서 인연을 끊은 이는 원리만 같다고 믿고 있고 일체와 자신이 다르다고 믿는다. 곧 아무것도 모름이다 

왜냐면 일체 상수를 모두 수용하여 심근본으로 일체를 포섭하기때문이다

 

삼복유입은 육도융화를 이끌어내니 주인을 파괴하는 평등공유다

 

평등하지 않으면 삼복유입이 없고 평등이면 이미 삼복으로 일체에 여여하다. 그러므로 무행으로는 아무것도 얻을수 없으리라

 

중생과 함께함이 곧 고행이나니 그 외의 고행을 찾지마라 진실로 평등하여 일체를 삼복으로만 시원케한다.

일체 주관이 각각의 차별행으로 인하여 달라지지않는다.





바로보면 발화점이 작용에 미치는 영향은 없다. 오직 자비심으로 일체에 순연하리라.

 

욕구의 재생산은 오직 정보 균형청산을 위해서만 허용한다. 정보균형은 고요치않고 항상 발전해야하나니 편집증적 욕구때문이다.

 

당신은 부처님

편집증적 의무는 허용치 않는다 왜냐하면 신축적 욕구관조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왜냐면 일체화 욕구는 미시적 근본 욕구는 아니지만 일체욕구에 모두 적용되는 대 절대 명령이다. 따라서 미시적 기초없이 직선화의무는 없어도 직선화로 인해 욕구가 대절대 길에 든다는것은 절대적 사실이다  절대조종의 길에 들어가는것은 의무가 아닌 최선의 절대적 섭수의 수렴이며 의무의 증대로써 이루는것이 아닌 의무로의 탈출로써 이루는 것이다 즉 의무는 그 자체로 경직이다. 진리는 의무가 아니다. 왜냐면 언제나 항상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크신 분에게 발걸음을 향하면 결국 근원에서 각자가 장엄케 하는 대 합일이 일어나고 세상에 빛이 비추게 될것이다.

일체 정토는 일심에 회귀한다.

그러므로 자책을 끊어라 지속가능한 도는 모든 경계의 망상을 기반하여 바른 길로만 이끄나니 바른 대법은 두려움이 있는 그곳에 두려움을 갖지 않고 그곳을 향해서 돌진하는것이다. 일체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데 어찌 그것이 자포자기이겠는가? 오직 이 마음의 도 즉 마음을 보는 도 뿐이다. 당신은 부처님




일체가 어떠한 인연으로 나와서 어디로가고자 하여 어떤 인연과 생사를 오가는지에 대해서 바로보며

 

 

 

그러한 바로봄으로 삼복을 유입하나니 연결성은 탐에 기반한다.독립성은 진에 기반한다.인과성은 치에 기반한다. 경계 축소는 아만에 기반한다. 경계 생산은 투에 기반한다. 그러나 삼복은 역을 성립케 하며 귀결성을 깨트려 준다.


근본의 본래로 근거로 함을 바로 안다면 일체 욕구에 비동태적 접합꼴로 수용성 있게 만족시킬 수 있다.

 

일체실상 즉시불

 

그러므로 파유법을 일체에 수렴해낸다. 


오직 다만 일체가 각각 부처님인지만을 알라 직선 욕구로 돌아봄이 곧 구도이며 구도가 곧 친견불이며

오온직선순연이 근본욕구만족에 관하여 평등케하면 그것이 성불이다. 욕구만족에 갇혀있지마라. 삼복유입으로 갈곳을 찾으라 당신은 부처님

욕구는 그 자체로 나의 신통이요 나의 시자이며 나의 훌륭한 문답하는 스승이더라
미시적 직선방향만 이루면 된다, 거시는 직선적 미시에 순연한다









임제 스님이 돌아와서 수좌에게 말하였다. “다행히 자비하심을 입어서 제가 큰스님께 가서 불법을

물었는데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습니다. “문제로 인하여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한탄하고 지금 떠나려고 합니다.”


“그대가 만약 떠나려거든 큰스님께 가서 하직 인사나 꼭 하고 가게.”


임제 스님은 예배하고 물러났다.





수좌가 먼저 황벽 스님의 처소에 가서 말하였다.


“법을 물으러 왔던 후배가 대단히 여법합니다.

만약 와서 하직 인사를 하거든 방편으로 그를 이끌어 주십시오. 앞으로 잘 다듬으면 한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되어 천하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내리울 것입니다.”


일체에게 진인을 처음 보이는법이 언제나 위대한 이유는 그것이 처음인것이 아니라 항상한 뼈대만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본질찬양법문만이 진리다

대법위에 일체가 어떤 이유에도 어떤 경로에서도 수용력가지며 일체 시간 공간에 영향 받지 않으니 다만 항상한 생명과 영원한 절대자유다. 당신은 부처님



털과 같은것을 쥐어주는 이에게 뿔과같은것을 쥐어주는것이 진리에 의거한 행위다. 어찌 끊는것이겠는가 어찌 자체모순행이겠는가

 

각자수기와 욕구명확순연 오직 이 둘 뿐이다

 

 

이 룰은 오직 두개의 일을 요구한다. 미시에서는 삼복 조복체의 완결성으로 삼복이 모자란쪽이 없게 하는것이다. 거기에는 구분될 기준은 없으며 오직 조복되어 일치와 순연의 기대 를이루기만 하면된다 곧 스스로 작아지는 일을 오온 전부에서 삼복유입하여 우선적 조복을 시키는것이다. 미시욕구가 전부 광명을 따를때의 거시구조는 삼복유입에 따른 미시순연에 굴종한다 곧 거시에서는 오직 하나다. 그것은 삼복미시 행위의 재생산이다. 절대평등 절대파모순 절대귀의규합이라면 이것은 본래항상하다.

 

 

즉 삼복농도가 이것을 결정하는것이다.

 

 

삼복농도 증대를 위해서는 두가지다. 하나는 언어융통을 확대하는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절대순연적 오온 규합을 계속하는것이다.

 

 

 

참지혜의 범위에서는 참 지혜라고 따로 볼것이 없다 왜냐면 조복받은것이 지혜고 지혜로 바로 보는 것이므로 지혜가 밝게 하는것이 아니라 밝게 있으면 지혜이니 바른 지혜 하에서는 밝은 오온이 곧 조복될 지혜이고 조복된 오온이 곧 밝은 오온이 된다.오온즉시불 오온즉시사자좌 오온즉시피안 오온즉시광명 오온즉시광명법 곧 삼복유입하에서는 오온공급 자체가 귀의할 등불이며 우리가 존중할 삼복체자리이다. 미시 욕구도 똑같이 진행된다

 

 

 

그리고, 이 강한 욕구적 움직임을 잊지않는것이다 

 


농도가 없어지는 일은 없을것이다. 왜냐면 여기에 바른 법이 있으므로

따라서

총미시욕구 순연이 총 복이다.

당신은 언제나 일체 진심에 포섭되니 이미 부처님이로다. 한자리에서 보면 자비 지혜 불신불좌 외에는 없다. 광명으로 바춰주어라 그대여,잡류 발생은 욕구의 도달 근성에 의한것으로 욕구 자체가 원하는것을 수정하는 기능으로 욕구가 파괴되는것을 두려워 하는 욕구에 의한것이 아니다. 왜냐면 그런 욕구가 있고 설사 이것이 욕구를 파괴된다는 정보가 있어도 이 욕구가 뻗는 다면 욕구는 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구를 우회한다고 새로운 욕구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니 잡류는 근원욕구에 의해서 소멸되며 오온은 욕구를 통한 삼복유입에 절대 순응한다. 또한 오온공급이 더해진다면 순환속도는 빨라져 오온한계 범위내에서 절대성을 얻어 흔들리지 않는다. 절대성이란 본질적 대자재력 이상으로 자재력이 공급된다면 그 결과가 흔들리지 않아 절대성이라하니, 가속도는 곧 편집증적 직선을 이룰것이다. 곧 불관조를 이루는 법이다. 존재는 존재로 만족시키고 모든 미시는 미시로 만족시킨다. 그럼에도 저들이 삼독가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것은 오직 자비의 영역이 없어서이니 그들이 주체의 욕구와 항상신과 거리의 선택을 만족시킬시 필수조건으로 평등한 시선으로(여기서 거리조건을 간섭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진리가 현재 거리 선택조건에 순연하는것이지 거리선택 조건이 진리요구에 순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거리선택을 모두 만족 시키면서도 이 순간 미시, 존재요구를 모두 만족 시킬 수 있는것은 미시가 존재를 부르며 존재가 미시를 부르기 때문이다.) 각자의 거리의 선택을 만족시켜라 자비는 항상신은 바라밀다의 출처를 파쇄하며 주체의 욕구를 즉시 최고의 깨달음에 이끌게하며 선택에 있어서 모든 불화를 잠재워 가속도에 따라 노닐게 한다 일체 거시 균형자체가 진실의 고요함이며 일체 바른 길은 오직 일체 미시 관계 그 자체에만 의거한다. 십력은 미시관계보다 우선하는 독립체가 아니며 동등한 지위에서 삼복유입을 이룬다 보살이 고집을 부려 극한의 악독한 고요함을 이끌어내더라도 심은 무량하여 삼복의 유입으로 일체는 활성화 될 것이다. 삼복작용이 유입하여 작용하는 단계에서, 오온공급은 삼복공급을 이끌어낸다 심은 전각하며 미시를 조복시킨다. 잡류는 심의 부작용으로 보기 때문이다. 부차 작용 또한 순환의 일부로 본다면 명확함은 항상할 수 있을것이다. 근본욕구 근본법문 즉 근본행 삼복환경하에서는 욕구순연이 곧 행이므로 직선욕구는 곧 행동이고 행동이면 잡류는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전각 전시 전행 전듯 전향을 전제로 하게되니. 일심법의 유통물 범위는 중생이받아들일수 있는 한도내에서 가급적이면 분산시키는것을 최적으로한다. 의존융통은 결정적으로 불용하다. 당신은 부처님


중생에 대한 내외 관조가 곧 불공양이다. 일체 기대를 만드는 일 또한 보시이며 따라서 일체를 직선으로 순연케함은 대공양이 되는것이다

일시충족은 곧 삼복에 따른 관조므로 시간조건에 관여받지 않고 공양함을 의미하니 곧 일시충족이면 일체 어느것도 포기할것 없이 항상 공양함을 의미하며 따라서 한계가 없는 일체 미시합적 중생관조이며 곧 비차별 불공양인것이다.

 

왜냐면 미시의 영역 역시 관조케하며 삼복 유입을 다양하게 해내나니 오직 처음과 끝만 쳐내라 당신은 부처님(어느 일점이든 모두 끊으리)일체 인과교역이 곧 일체 삼복 연결점이자 교화시킨다 진실로 도움이 되는 경은 자기 자신이니 어떤 외부 조건에 의해서 구별되어지는, 적합성은 그런 위치에 있지가 않다.

미시적 조정은 모든 제약을 넘어버리나니 다만 오온광명요구에 평등해야 한다

 

욕구는 자체 모순적이고 편향적이며 본질은 중립적이고 삼복 유입을 불러낸다. 따라서 고요함으로 본질을 찾는것은 자체모순을 범하는것이다. 삼복유입으로 순연좌절하는것은 자체모순인가? 만약 욕구가 스스로 자체모순이라면 자체모순을 범하면서 삼복유입을 시켜도 상관없는것 아닌가? 이것은 오직 유통분산이냐 유통중심확대냐의 문제일 뿐이다. 이 그 뜻에 따르면 된다. 곧 삼복유입으로 일체 모든 문제를 극복시킨다

불완전관조욕구와 근본욕구는 모두 일점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한계에도 마찬가지이다.

 

최대평등이어아야 평등 최익법이며 평등 최익법만이 최대법이다 이것은 각각의 의미를 각각의 소관으로 한정하여도 역시 성립한다

 

각행을 실천함이 곧 삼복이 유입되는것이며, 삼복이 유입됨은 곧 각행을 실천함이다.

 

따라서 각행을 실천하라 존재의 자생적 경과는 중요치 않고 오온 미시작용의 삼복유입은 매우 중대사이다. 오직 삼복을 유입하기위해 행을 하며 자생적 질서를 위해서는 함이 아니다. 오직 근원욕구 충족을 위해 자생적 질서에 다를때도 있고, 어긋난다면 따르지 않아도 좋다. 삼복은 언제나 유입가능하기 때문이다. 삼복은 언제나 바른 눈으로 유입되기 때문이다

 

삼복유입은 삼복발산의 결과를 맺으며 오온을 최적화하고 자신의 사자좌와 불신광명을 돌아보게한다
삼복이 지나간 자리는 언제나 평등하고 영원하며 각 미시에 최적화며 모든 거시경계에 최적화다.
바른진리라면 모든 부처님 찾아 언제나 공양함이 진리 법문과 다르지 않을것이다.
즉,진리라면 언제나 이 도량이며 언제나 바른 법에 수렴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최적진리 법문을 펼쳐 언제나 각 미시에 맞는 욕구를 밝혀주어라


그것외에 법은 없다. 이 법만이 우리가 할 일 당신은 부처님

이리하여 모든 명확법문과 각각의 잡류조차 수용하여 잡류자체로 근본 욕구를 만족케하고

각자가 만족해도 최상의 법문에 영원히 있으리라

 

 

일체가 일체를 갖추는것이다 총 한계는 그래서 언제나 스스로 한계를 극복한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