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터 9까지 순서대로.
이 똥이 벌써 10연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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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폐허조차도 그렇게 안전한 곳은 아니란 사실을 의미했다.
하긴, 이건 내가 너무 안일했다.
폐허에 산다고 해서 그게 꼭 토리엘의 뜻에 동조한다는 표시가 되지는 않지.
입에는 꿀을 발라놓고 뱃속에 칼을 감춰둔 상종못할 새끼들이 어딜가나 하나 씩은 꼭 있다.
내가 썩어가는 이 햇빛 안드는 인외마경조차도, 결국 크게 보면 거기서 거기라는 거겠지.
이런 거지 발싸개같은 세상 같으니라고!
그 사실이 호신용 지팡이를 잡은 내 오른손에 의지를 불어넣었다.
"흡!"
그저 걷거나 반쯤 달리다시피 하는 건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하지만 도약하거나 슬라이딩을 하는건 얘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점프를 이야기하자면, 가속도 한참 모자란데다가 힘을 충분히 싣기 전에 지팡이가 몸이랑 딸려올라와서 이게 점프인지 포X몬 튀어오르긴지..
슬라이딩을 이야기하자면 오른쪽 다리는 앞으로 나가는데 왼쪽 다리는 그대로 가만히 있어서, 옆에서 보면 ㅅ자 모양이 되었다.
결국 그 상태 그대로 땅에 떨어지면서 몸이 왼쪽 다리 위에 그대로 떨어지고..
그리고.....하.....시발.....
땅바닥을 거부하고자 했던 부질없는 육체의 반항이 이내 중력에 굴복하고 약속된 셀프 고간폭격이 나에게 형용키 힘든 굴욕감과 고통을 선사했다고만 해두자.
결국 슬라이딩은 포기하고, 달리다가 땅을 쾅 찍고 그 관성으로 두다리 다 앞으로 내지르는 드롭킥을 터득했다.
사실 드롭킥보다는 지랄옆차기가 더 맞겠지만.
하여튼, 그 삽질 이후로 도망이나 격투같은 격렬한 움직임은 완전히 포기했다.
지팡이를 든 팔을 바꿀 수가 없으니 오른팔 근육이 지치는건 순식간이었고,
왼쪽 손목은 일상생활에서 실리는 하중만으로도 항상 뻑적지근한 상태.
체중을 실은 공격 한 번이면 막다가 그대로 자세가 무너져서 땅에 고꾸라질게 뻔했다.
한마디로 도망도 못쳐, 방어도 얄팍한데다 스테미너도 조루.
실로 처참한 피지컬이었다.
꼭 다리가 아니더라도 몸에 근육이 있어보이지도, 운동신경이 좋지도 않다.
그런데도 말이다.
이렇게 싸우기엔 영 안어울리는 몸뚱이를 해갖고서 싸우는 쪽으로 머리 굴리는게 익숙하게 느껴진다.
난 도데체 저 위에서 뭘 하면서 살았던거지?
무허가 태권도 사범이라도 했었나? 이빨만 터는 격투기 덕후였나?
염병할, 이게 무슨 조화야.
누가 내 머릿속에 들어앉아서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고 넌지시 알려주는 것 같은 기분이다.
보라색 폐허에 둘러쌓여있었더니 뇌까지 보라색으로 멍들어가는 건가..
아니, 뇌가 보라색이면 그건 멍이 아니라 걍 뒈짖..
"에이 씨발!"
빡돌아서 지팡이를 던져버렸다.
벌써 손때가 타기 시작한 작대기가 경박한 울림을 내며 벽을 때린다.
이렇게 잡념이 많은 상태에서 뭘 하겠다는건지.
나는 병신같이 혼잣말을 주절거리면서 지팡이를 다시 주워들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는게 좋을 것 같다.
"벌써 돌아가려고? 그럼 안되지~"
이 목소린..이런 썅?!
"하하하.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우리 구면이잖아?"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노란 꽃 하나가 피어있는 것이 보였다.
자잠깐, 저거 혹시 저번에 그?!
"너..넌, 뭐야? 분명히 내가 밟아서.."
"그래! 밟았지! 있는 힘껏 꽉꽉!
인사를 건네고 있는데 얼굴을 밟히는건 참 색다른 경험이었어!
세상은 오래 살고 볼일이라니까?"
이 목소리..
이건 분명히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나타났던 꽃 괴물 녀석이다.
보자마자 놀라서 밟아버리긴 했지만.
저번엔 내 주변을 빙빙 돌면서 속삭였었지.
이 번만 세번째라 눈치 채기 싫어도 채게 된다.
분명히 그년이 어쩌고~ 그놈이 어쩌고~ 했었지.
저 꽃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그걸 캐내기 위해서 냉정해지려고 노력했지만, 일전에 저놈이 주신 빅엿의 맛을 잊기엔 시간이 부족한 터라 혓바닥에 독기가 올라버렸다.
"그게 얼굴이었냐? 아이구 몰랐네.
너무 좆같아서 그만 저절로 발이 나가더라고.
아, 좆이 맞지 참? 그것도 수십개."
"맞고 말고! 똑똑해. 아-주 똑똑해.
그리고 너는 지금도 내 좆물을 코로 들이키고 있지!
어때? 기분 좋아? 향기로워?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모아놨다구.
하긴 몸에 좋다고 꿀떡꿀떡 삼키기도 잘하는데 대수로운 일은 아닌가?"
뭐, 꿀과 꽃가루와 수술과 암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긴 한데..
단어의 중요성이 절절히 와닿는 통에 도저히 이런 대화는 이어나갈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내가 버틸 수가 없다.
그 정도까지 썩어 문드러진 인간은 아니란 말이야..
"그래, 대수롭지 않으니까 일없으면 썩 꺼져라.
살아 생전에 대수롭지 않은 것들 싸제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못하는 놈아."
"너무하네. 인간들은 자기 친구에게 항상 그런식으로 밖에 말 못해?"
"아 씨발 진짜.
누가 니 친구야. 이 좆만한 좆대가리 새끼가."
"괜찮아. 이해해.
내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는거니까."
아.. 혈압..
저 새끼는 왜 갑자기 또 저렇게 태세전환질이야?
"그럼 이건 어때?
친구가 되는게 아니라.."
꽃이 말을 흐리자, 그 순간과 맞물려 80년대 카툰 풍으로 그린듯한 하얀 얼굴이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내 노예가 되는거야!!"
갑자기 하얀 알갱이 몇 개가 꽃에서 튀어나와 나에게 날아왔다.
뭔가 했더니 얼척 없어서 진짜 내가, 어이구 참.
"이건 또 뭐야? 니 씨앗이냐?
이젠 하다하다 불알을 떼다가 날-"
"-윽..!"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뭐에 맞거나 한 기분은 아닌데.
아닌데..
근본적으로 뭔가 어긋난듯한.
내가 조각나버리는 듯한 이 느낌.
욕지거리가 치밀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꺾이려는 무릎을 갓태어난 기린처럼 바들거리는게 고작이었다.
"하하하하하..
내가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나는 이 세상의 왕자야.
너 같은건 얼마든지 끝내버릴 수 있다고!"
일그러졌던 꽃의 얼굴이 다시 아까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절대로 전과 같은 이미지로 다가오진 않았다.
마치 샌즈의 웃음처럼.
"괜찮아. 난 귀족이니까 죽이거나 하진 않아.
대신 따끔하게 알려줄게.
노예는 기어오르면 안된다는걸..
이 친절의 알갱이로 말이야!"
별안간 아까 그 하얀 알갱이가 날 포위하듯 원을 그리며 허공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것들이 사방에서 나를 향해 쇄도해들어왔다!
"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중압감에 몰린 나머지 스스로 뭘 하는지도 모르는 채 앞으로 뛰쳐나갔다.
앞으로 한 번, 뒤로 한 번 팔을 휘두르고, 쓰러지고.
사선 방향으로 날아오던 탄환들이 표적을 놓치고 이내 마주보는 탄들과 교차하며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지팡이를 잡고 있던 손에서는 뭔가 쳐낸 듯한 둔탁한 저항감이 느껴진다.
"..죄어드는 탄막 속에서 한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면 실제로 마주치는 점은 두 개 밖에 없다 이거구나.
아무도 그런 무모한 짓은 안했는데."
머리를 들자 꽃이 표정없는 얼굴로 나직하게 제 할말을 읊어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놈이 떠벌이는 걸 한참이나 생각한 다음에야 내가 어떻게 움직인건지 깨달았다.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ㅏㅏ하ㅏ하!!
이야, 한 방 먹었네! 축하해! 현재 스코어는 인간 1점, 플라위 빵점!
첫 승리의 소감이 어때? 말해봐! 말해봐!"
꽃이 잎사귀를 마이크 마냥 기울여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확 물어뜯어서 보복하고 싶었지만..
놈이 아까 내게 한 짓이 뭐였든 간에 그 영향으로부터 내 몸이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흐음. 말 할 기운도 없는거야?
저런저런.. 그럼 두 번은 못 피하겠네?"
내가 움찔하자, 꽃은 다시 한 번 미친듯이 웃었다.
"농담이야, 농담!
넌 이렇게 금방 치워버리기엔 아까운 말이야.
지켜보는 맛이 있어.
그러니까.. 지금은 살려줄거야.
지금은 말이지."
미친..관음증 걸린 새끼 같으니라고..
"뭐.. 어차피 내가 살려줘봤자 얼마 못가 죽겠지만!
어차피 한 번인 인생 마음껏 즐기라구.
예를 들면..
흐흐흐.. 내가 토리엘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얘기해줬던가?"
"아..징그러운 새끼 진짜.. 꺼져..!"
녀석은 마지막으로 듣기 싫은 웃음소리를 갈겨댄 후, 두더쥐처럼 땅 속으로 정말 꺼져버렸다.
"애미뒤진......이게 다 뭔 개같은 경우야..."
나는 쓰러진 몸을 뒤집어 바로 누웠다.
이건 뭐..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곱씹어보고 싶은 생각도,
이해하려는 노력도..
열폭할 기운도 없다..
그냥..
하......
몰라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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