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적인 이유에서, 아이는 그 일이 지상에서의 익사를 경험할 수 있을 만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이나 밤 짐승이 눈을 형형히 빛내는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이라든가, 혹은 그의 딱딱한 시신 곁 같은 곳에서 일어나길 바랐다. 하지만 그 일은 녹인 구리를 뿌려 놓은 것 같은 석양의 숲 속에서 일어났다. 그날, 정신이 어떻게 될 것 같은 질주 끝에 두 볼이 붉게 물든 아이는 지하로 이어지는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지금이 바로 그 일을 해야 하는 적절한 시기임을 통탄했다.


아이의 한 줌에 쥐고 흔들 만큼 작은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이는 뒤로 휘청했다가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작은 비명이 나오려는 걸 입술을 앙다물고 참았다.


아이는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단죄론적인 생각에 집착해서 나아지는 건 위안이라는 마취약을 넣은 것 정도만큼도 안 된다. 위안이란 건 본디 침대 위에서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일 때조차 그 힘을 발휘하기 힘든 것이다. 허울 좋은 위명이며 실체가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자신의 앞에 부닥친 것은 온전히 직접 감내해내지 않으면 누구도 그 일을 대신해 주지 않는다. 아이는 당연한 이치를 알고 있으면서도 회피하고 자신의 처지가 모두 불가사의한 외부의 힘으로부터 기인했다고 여기는 패배자들하고 태생부터 다르다. 아이는 비록 쫓기는 신세에 지하로 도망칠 수밖에 없는 유쾌하지 못한 상황이지만 자긍심만은 한없이 불타올랐다. 자신의 모든 행동이 뜻 위에 실천된다고 믿었다.


아이는 고개를 들고 구덩이를 보았다.


이것이 지하로구나. 옛날 언젠가 인간과 괴물이 전쟁을했었지. 결국 인간이 승리하고 그들 중 가장 위대한 마법사가 괴물을 땅 밑에 구겨진 휴짓조각처럼 내던지고 자물쇠를 채워 넣었어. 그 이후 수년이 지나고 인간은 기억 속에서 거의 괴물을 지워가고 있었다. 아이에게 일어난 '어떤 일'도 그즈음에 벌어졌다.


'지상에 미련이 있냐고? 아니.'


하지만 욕설을 중얼거리며 아이는 주춤했다. 시선 끝에 지하의 구덩이가 있었다. 언뜻 본 구덩이는 이 세상 모든 비밀을 품고 있는 것처럼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아이는 마른 팔로 풀잎을 그러쥐었다. 그 풀잎들이 튼튼한 손잡이가 되어 줄 거라 믿기는 어려웠지만, 아이의 태도만 은 땅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다. 아이는 분노와 두려움, 혼란 속에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기묘한 냉기가 뻗어 올라왔다. 아이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봤어.'


아이는 두려움을 쫓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주위에 짙은 녹음이 깔려있었다. 계절은 생명이 소생하는 봄이었다. 그런 축복의 계절에 죽기 위해 이런 외딴곳으로 쫓겨온 자신은.... 아니다. 난 죽기 위해 이 앞에 온 것이 아니야! 새로운 삶을 위해서다. 나는 내가 부여받은 모든 불가항력을 가소적인 것으로 바꿀 거야. 나는 충분히 그럴 자격과 힘이 있으니까. 나는 두렵지 않아!


'자신이 자선 사업에 능통하다 여기는 어떤 자들은 날 도와줄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지? 그들이 날 도와주고 난 다음에는? 선의를 가진 존재라 봤자 결국 나를 떠날 것임은, 그리하여 마지막엔 나 혼자 남을 것임은 변하지 않아. 무용, 그 모든 것은 무용이다! 나는 영웅전기의 유폐된 공주 따위가 아니야. 삶은 모든 여정이 끝난 후 '잘 먹고 잘살았다.' 라고 요약해 버릴 수 없어. 생활은 그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지잖아. 난 그 속에서 영원히 혼자야...'


아이는 풀잎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 오른손은 내버려 두는 대신 허리로 옮겨 갔다. 아이는 예리한 단검을 빼내어 자신의 목을 겨누었다.


'지상에서는 말이지. 일어나, 차라.'


아이는 자신이 두 개나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자신의 내면에서 타고 오르는 본질적이고도 처절한 두려움과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도피의식이 서로 충돌한 결과였다. 아이는 극도의 긴장 속에서 신음을 흘렸다.


'차라, 여기서 물러난다면, 다시 지상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넌 그곳에서도 추방당한 죄인이잖아? 지하가 아니라면 죽음뿐이야. 정신 차려!'


아이는 터져 나오려는 울분을 삼키느라 잠깐 입을 닫았다. 희미한 쇳소리가 났다.


'복수야. 알겠어? 이곳에서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지하로 내려가면 그럴 가능성이 생기지. 더이상 무의미한 소모전은 그만두자.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야?'


아이가 쥔 칼은 곧 자신을 해치려 할 것 같았다. 조금씩 상처가 나기 시작하고 핏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선을 긋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흘러내렸다.


'설마 너, 아니지?'


아이는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이해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멍청한 것! 그런 생각 따위 할 거면 그냥 여기서 죽어버려!'


아이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내찌르는 신랄한 말과는 달리 그 표정은 아이답게 살균된 느낌이 났다. 아이는 이 상황이 멍청한 배우를 향한 연출가의 불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발견이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석양에 하늘이 거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동쪽 하늘은 이미 잿빛이다. 몇 시간 만에 달리기를 멈춘 몸에 찬바람이 닿자 아이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이는 허리를 폈다.


'그래, 넌 지하에서도 지상에서의 경험이 반복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 악몽이 장소를 바꾸어도 끊임없이 너를 쫓아다니는 끔찍한 상상을 하는 거지. 지하의 괴물들마저 너를 업신여길 거라고 두려워하는 거지. ...아무도 너와 이야기하지 않을 거라고 불안한 거지.'


아이는 입꼬리를 올렸다. 가장 난도질하고 싶은 기억이 떠올랐다.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내려와 두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그다지 훌륭한 사람이 아니지.'


차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입술 뒤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순간 아이의 머릿속에 남은 건 목숨만은 지키고 싶어 하는 삶에 대한 구차함도 아니고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성취하고픈 복수를 향한 열망 또한 아니다. 도주나 복수 같은 것을 부차적인 문제로 만들어 버리는 것. 친밀감의 열망. 아이는 결국 복수보다 더 따스한 한 번의 포옹을 원하고 있으며 실천에 대한 의무를 벗어나 보통의 아이답게 살고 싶다는 것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더욱 철저히 숨겨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진심을 결코 알 수 없게 하고 싶었다. 뽑아 든 칼을 멈춘 채 그토록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그 단검이 다음에 머무를 장소는 아이의 목 안쪽이 아니라 칼집 안쪽이 될 것이다. 아이는 일어날 것이며, 그리고 다시 지하를 가루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할 것이다. 아이와 차라의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열대기후에서 장대비를 맞으며 몸체를 무시무시하게 키워가는 우림처럼 슬픔이 지속될수록 그들의 기분은 한없이 추락했다.그들은 더이상 고통받기 원하지 않았다. 차라는 그 작업에 필요한 준비를 끝내는 데 얼마나 걸릴지 추측해 보았다. 일단 시작되기만 하면 그 끝에 도달하는 과정은 돌풍이 불어닥치는 속도만큼 순식간에 지나갈 것이다.


아이가 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머리는 물리적으로 추락하는 것과 동시에 음울에서 벗어나 맑은 정신을 되찾았다. 단 몇 분간만이라도 고뇌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 아이를 행복하게 했다.


차라에겐 그런 행운이 없었다.


차라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햇빛이 전혀 들지 않는 주변 풍경이 모두 거무죽죽했다. 혼란한 정신 속에서도 코를 찌를 듯한 꽃내음이 공간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시야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도 발밑은 풍경과 극단적으로 이질적이게 밝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노란색? 차라는 선명한 색을 가진 꽃이 만개해 있는 꽃밭 정도에 자신이 떨어진 것을 파악했다. 하지만 차라를 붙잡은 것은 숨 막히는 노란 꽃향기도 아니었고 자신의 의식을 완전히 갈무리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여기서 들린 것 같은데...'


귓가를 간지럽히는 사그락 거리는 소리가 점점 형체를 키워 다가왔다. 그건 발소리였다.


'오! 너 떨어졌구나, 그런 거지... 괜찮아?'


알 수 없는 존재는 하얀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 존재는 차라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자, 일어나...'


차라는 주변이 갑자기 빛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고소한 버터 냄새가 풍겨왔기에.


'이곳이 지하라는 곳일까?'


'난 차라야.'


'차라라고? 좋은 이름이네.''


차라는 불신감에 차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이가 빗속이나 한밤중, 혹은 그의 주검 앞에서 일어나길 결코 바라지 않았던 일이 그 순간 벌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내 이름은 아스리엘이야.'







<끝>





옛날에 썼던건데 그냥 올려봄
원문은 피를마시는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