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시발 3천자도 모자랄까봐 전전긍긍했는데 냅다 500자로 줄여버리니 당황스럽네


이미 써놓은 감상문을 500자로 줄이는 건 불가능하니 그냥 올린다.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애를 썻는데 이게 한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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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ptsd가 조명 받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개인의 의지 부족 혹은 일반 정신증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이라크 전쟁의 미군이 겪은 사례와 여타 4대 범죄의 피해자들이 겪는 후유증이 언론을 타면서 어느 정도 외상 후 스트레스에 대한 개념이 잡혀가고 있지만, 젊은 세대는 그렇게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자신들이 즐기는 창작물에서만큼은 ptsd의 가능성을 열어두려 하지 않는다. 서브컬쳐에서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밖에 안 된 아이들이 칼을 쭉쭉 그어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독자들은 그러한 비현실성에 무게를 두고 빠져드는 법이니 현실에 있어야 할 정신적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극의 재미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는 그러한 아이들이 모두 ptsd에 빠져드는 것이 당연하다.

 

유명한 작품인 데스노트만 보아도, 주인공인 야가미 라이토 이전의 소유자들은 노트를 몇 번 써보고 포기했다는 설정이 있다. 라이토도 처음으로 노트를 사용해서 폭주족들을 죽였을 때 끔찍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뇌하는 모습이 충분히 표현된다. 법조인을 희망하고 극단적인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학생으로서 누가 봐도 범죄의 질이 나쁜 폭주족을 응징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데스노트를 자신의 무기로 삼기 전까지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일반인의 첫 살인에 대한 충격을 잘 표현해 놓았다는 점에서 데스노트의 주인공 보정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극 전체의 밸런스가 보장되며 독자에게 창작의 영역에서 살짝 벗어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이후에 주인공이 악마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입체적인 구조를 연출함으로써 몰입도를 끌어올릴 수 있다.

 

본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차라/프리스크로 대변되는 주인공은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의 아이이며, 아무런 연고도 없이 주변 사람들과 헤어져 괴물들 세계에 떨어진 입장이다. 현실을 무작정 대입하는 것은 어려우나, 이미 에봇 산에 떨어진 상태에서 주인공의 멘탈은 하늘로 날아가야 정상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정신을 조각내버리면 게임이 진행되지 않으므로, 루트를 몇 번씩 반복한 후 성인이 된 주인공을 토대로 주변 사람(샌즈)와의 뒤틀린 관계를 그려낸 것은 밸런싱이 잘 된 설정이라 할 수 있다.

 

여러 가지 형태로 발현되는 ptsd의 증상 중에서 차라가 안고 있는 것은 일종의 자포자기이다. 어찌 되었든 주변에 건드릴 만한 괴물들은 쌍방으로 위험한 존재이나, 샌즈만큼은 수십 번을 찔러죽이고 죽어왔으니 심적인 고통이 지속되다못해 익숙해진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고통을 감내하기에는 어렵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암울한 기억을 성적인 리비도로 쏟아내면서 없던 일로 치부하려는 심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 씬에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며 질척한 떡정이 아닌 진실한 감정으로 포장하려 하는 것을 보면, 반쯤은 샌즈에게 빠져든 주인공의 애정이지만 나머지 반쪽은 현실과 기억으로부터의 도피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주인공이 샌즈와 성적인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은 치료와 도피, 구원의 성격을 지닌다.

 

첫째로, 이제 막 성인이 된 주인공에게 첫 경험을 선사해준 인물이라는 점에서 치료의 성격이 두드러진다. 일반적으로 남성의 첫 경험은 한 순간의 꿈과 같다. 모든 총각들이 화려한 첫 날밤을 꿈꾼다. 그 황홀한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이미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셈이 될 정도로 첫 경험은 강렬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성은 첫 경험을 자신이 상상했던 대로 아름답게 보내지는 못하며, 거의 기억을 하지 못하고 이미지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본편에 묘사된 샌즈와의 첫 경험은 풋풋한 연애로 시작해서 사랑의 결실을 맺는, 일반적인 남녀의 첫 경험 궤도와는 다르다. (인간 여성과 해골과의 차이점은 언급하지 않는다.) 애초에 두 사람의 관계는 상당히 뒤틀려 있다는 것. 허무주의에 빠져있는 샌즈가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인간을 품에 안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한 번 꼬이고, 주인공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이 수없이 죽였던 해골에게만 애정을 쏟아붓는다는 사실에서 두 번 꼬인다. 그렇게 노력해서 불살의 길을 걸어왔지만 결국 남아있는 것은 샌즈에 대한 애정이라는 것이 떡씬의 기폭제가 되는데, 사실상 남성의 궁극적 목표인 삽입행위는 단순히 한 줄로 끝난다는 점에서 허무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별을 쳐다보며 자신이 빠져있던 상대의 리드를 따라 몸을 섞는 행위는 몇 번의 리셋을 거쳐 쌓인 애정과 울분이 해소되는 치료의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질척하게 서로 몸을 섞는 것이 일상이 된 나중에도 첫 경험을 항상 잊지 못하고 그 기억으로 도피하려 한다. 이 파트가 액자식 구성으로 표현된 것도 들어갔다 나오는 형태이기에 몰입을 수월하게 만들어 준다.

 

둘째로, 현재 시점에서 이루어지는 베드신은 주인공에 대한 불완전한 구원이 표현되어 있다. 뜬금없는 고백은 샌즈의 관점에서 주인공을 씁쓸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이며, 의지를 잃어버린 주인공이 새로 얻은 안식처라는 것은 어느 정도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어디까지나 일방적이며, 샌즈는 암울한 기운을 떨쳐낼 수는 없지만 상대를 밀어내기엔 현재의 시간선과 차라가 불쌍하기 짝이 없다. 그러한 측면에서 주인공에게는 불완전한 구원이 될 수 밖에 없다. 1차의 경우 주인공이 방사한 체액이 그저 쾌락을 퍼질러 놓은 것이지만, 과거 회상을 통해 또 다시 치료의 행위를 거친 주인공은 2차에서 애정이 담긴 베드신을 찍는다. 매번 샌즈와 관계할 때마다, 주인공은 뒤틀린 애정으로 몸을 움직이다가 과거로 도피한 후 현재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일 것이 분명하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더욱 위축되는 주인공의 심리가 독자들의 애간장을 태움은 물론이고, 안타깝게 차라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입장에서 샌즈가 육체적인 리딩을 해주는 것 자체가 언갤럼들에게도 구원의 행위로 느껴질 수 있다. 혹자는 스스로 샌즈에게 몰입하여 불쌍한 아이를 구제해 줄 것이며, 다른 누군가는 불살 루트를 기억하며 샌즈에게 지친 몸을 맡길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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