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잘 모르겠다. 명확한 계기나 이유도 없다. 그저 어느 순간에 정신이 들어보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반복되는 기대와 실망 속에 드디어 모든 걸 놓아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뭔가를 느낄 수 있게 된 것도 아니다. 감정의 잔재가 이따금 기억을 통해 흘러나올 뿐.

나에게 보는 것은 한낱 시각 작용에 의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고, 듣는 것, 냄새를 맡는 것, 피부에 느껴지는 것 또한 그러하다. 그런 내가 감정을 되찾게 될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항상 나를 괴롭힌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와 고요한 내면에 돌을 던진다. 매번 여지없이 그렇게, 나의 평화는 부서진다.

사실 때때로 의문이 든다. 자신의 입으로 감정이 없다 말하는 내가, 어떠한 것에 대해서는 마치 분노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감정과 생각을 구분짓는 경계가 모호함을 염두에 둔다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나에게는 한때 느꼈던 감정에 대한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니.

감정은 올바른 사고의 흐름을 방해한다. 지금껏 겪어온 수많은 일들 중, 감정이 개입하여 상황이 나아진 경우는 없었다. 그러니 이 문제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내 의지를 가로막는 것들이 있다면? 주저없이 베어 길을 터 놓으면 된다. 이게 바로 정상적인 사고 방식이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는다. 우리에겐 이 반응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망설임은 빈틈을 부르고 결국 목숨을 위협한다. 싹은 미리 잘라두는 것이 현명하다.

그리고 지금 너와 나는 서로의 걸림돌이다. 그러니까 답은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없단 얘기다. 그냥 서로가 서로를 베면 된다.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다. 각자의 날붙이를 쥐고, 서로의 몸뚱아리에 깊숙이 찔러 넣으면 된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다.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날 손쉬운 일이다. 무기를 들어라. 왜인지 모를 이 껄끄러움이 방해가 된다면, 동시에 휘두르자. 셋을 세면 상대에게 달려가 서로를 조각조각 찢어 널부러뜨리자. 하나, 둘, 셋...


분명히 누군가는 이겼는데, 왜 눈물이 흐르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