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갤문학] 샌즈 혼자 남은 집에 프리스크가 찾아온 이야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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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즈는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밤이 깊어졌지만 날씨는 여전히 혹독했다.

이런 지독한 날씨에는 대책이 없다.

그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폭풍우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며 건강관리를 하는 밖에는.

샌즈는 약한 감기기운이 보이는 토리엘에게 따뜻한 온수목욕을 권했고 그를 받아들여 토리엘은 수건과 옷가지를 챙겨들고 욕실로 사라져 있었다.

 

식품 저장고에 꿀이 조금 남아있었는데.

떠올리며 그녀에게 대접할 꿀차라도 끓여낼까 생각하는데, 토리엘이 방으로 가져 온 짐가방이 일순 그의 눈에 띈다.

정리하려다 만 것인지 가방은 열려있는 채였고, 그를 보게 된 샌즈는 어쩐지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그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그리고 작게 떨리기 시작하는 손 뼈를 뻗어 가방을 완전히 열어젖힌다.

곱게 접혀있는 작은 옷가지들과  팔이 너덜거리는 곰인형. 그리고.

프리스크의 향기.

샌즈는 7년 전의 그 체취를 한 번에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며. 그 작은 옷가지에 손 뼈를 조심스레 갖다댄다.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의 손 뼈를 펼쳐보이며. 새삼 작았던 아이의 체구에 새로운 충격을 느꼈고 그 아래로 만져지는 딱딱한 것에 옷가지를 옆으로 치워낸다.

갈색 표지의 낡고 빛 바랜 두꺼운 노트가 그 아래에 존재하고 있었다. 노트라.

 

샌즈는 가만히 그 노트를 집어들었다.  ..꽤 오래 된 물건같아 보이는걸.

 

샌즈는 책 표지를 열었다.

 

......

Heh.. 이거, 왠지 몹쓸 짓을 하는 기분이군.

 

그것은 아주 오래 된 물건이었다.

얼마나 오래 된 물건이냐면, 샌즈와 프리스크의 오해의 골이 깊어지기도 전, 프리스크가 토리엘을 만나기도 전. 그리고.

프리스크가 샌즈를 만나기도 전의 일부터 쓰여있을 정도로 오래 된, 아이의 과거 이야기가 상세히 적혀있는 일기장이었다.

 

샌즈는 아무리 어린아이의 것이라도 남의 일기를 함부로 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호기심은 상식을 이기도록 하고 예의는 잠시 몸을 숨기도록 한다.

샌즈 자신으로서도, 아이가 어떤 일을 겪고 어떤 어려움에 대항하며 그 길을 걸어왔는지는 평소에도 늘 궁금히 여기던 문제였기 때문에.

샌즈는 첫 페이지를 읽어내렸다.

에봇산 아래로 떨어진 후 처음 만나게 된.

말하는 노란 꽃의 이야기.

친절 알갱이? 웃기는 말을 할 줄 아는 꽃이었군.

꽃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는 후에 상처입은 아이의 마음이 글귀에 그대로 남아 적혀있었다.

 

'많이 아팠어. 몸도, 마음도.'

샌즈는 한숨을 내뱉으며 다음 장을 넘겼다.

토리엘과의 만남.

'따뜻하고 푹신해. 엄마가 존재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파이는 정말 맛있었어.'

따스함이 넘치는 글귀는 곧 폐허를 나가려는 아이의 의지로 인해 토리엘과의 갈등을 빚어내며 괴로운 심정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자비로서 마침내 토리엘과 포옹하며 폐허를 떠나오게 된 이야기는 곧 자신과의 만남에 접어들게 된다.

'뼈다귀 샌즈. 정말 재밌는 괴물같아. 방귀소리 쿠션을 이용한 장난은 재밌었지만 조금 더 리얼해도 될 것 같아. 정말 냄새가 풍긴다던가.'

샌즈는 이마에 손을 짚고 피식이며 다음 장을 넘긴다.

'눈길은 무척 미끄러웠어. 땅에 박혀있는 돌을 보지 못해 크게 넘어졌어. 그런데, 샌즈가 도와줬어. 너무 고마웠어.'

샌즈는 눈구멍을 깜빡였다.

 


..기억나는데.

 

돌부리에 걸려 제법 크게 넘어졌는데도, 언제나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일어났었지.

 

까진 무릎에선 피가 배어나오고 그 조막만한 볼은 얼어붙은 눈 바닥에 쓸려 살갗이 일어나 있는데도 울지 않고.

샌즈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내가 아이의 다리에 반창고를 붙여줬었어.

 


「..우는 것을 배우는 것도 다 때가 있어, 꼬맹아. 어른이 울면 허물이 되기 쉽지만 네 나이대엔 그게 일상이자 특권이야. 아플 땐 아이답게 울어버리면 돼. 상처는 내가 치료해 줄테니까 넌 네 또래 아이들처럼 아프다고 칭얼거려도 되는거야.」


조심스러운 손길로 반창고를 붙여주며 말하는 샌즈의 충고에도, 프리스크는 울지 않았다.

 

.....

 

아이는 오히려 그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샌즈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생채기 난 얼굴로 자신에게 꽃같이 환하게 웃고있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어버리고 만다.

 

 

 

「 ..뭐, 그것도 나쁘지 않네, kid.」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린 샌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샌즈는 천천히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사락.

 

아직 일기 뒷 장의 빈 페이지는 많이 남아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 다음 장으로 프리스크의 일기는 끝나있었고 그 마지막 장은 단 한 문장으로 끝맺어져 있었다.

 


 

'샌즈가 너무 좋아.'

 

 


Heh...

 

마지막 페이지를 들여다보는 샌즈의 생기없는 얼굴에 텅 빈 미소가 지어졌다.

 

 

이 날부터였구나.


마지막 일기에 적혀있는 날짜는 레스토랑에서의 첫 고백이 있기 하루 전의 날이었다.

 


샌즈는 일기를 덮었다.

 

 


그런데, 프리스크.

 

손 뼈를 고요히 일기장에 갖다댄다.

 

 

어디서부터 틀어졌을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우리.

 

손가락으로 일기 겉 표면을 문지르듯 가만히 매만지다가 이내 손가락뼈 전체로 쓸어내리듯 매끄러운 표지 위를 천천히 훑어내리며 배회하던 그의 손길이 일순 일기를 통째로 구겨버릴 듯 힘주어 틀어쥐었고.

 

 


"..프리스크."

 


 

사무친 이름이 소리가 되어 그의 입에서 어렵게 흘러나온다.

 


"프리스크.. 프리스크."

 

감정의 둑이 흘러넘치는 것을 느끼며 샌즈는 일기가 프리스크라도 되는 양 품 안에 끌어안았다.

 

 

일기에서도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미나리아 재비꽃 향은 그의 코끝을 스친다.

 

샌즈는 눈을 감았다.

 


..언제나와 같은 향.

 

아이 때도 커서도 너한테선 꼭 이 향이 났었는데.

 


"..프리."

 

 

....

 

이번에 그가 부르는 사랑하는 이의 이름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살며시 열린 문 틈 사이로 경악에 젖은 얼굴의 토리엘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샌즈의 눈구멍이 커졌다.

 

 

토리엘은 몸을 돌렸고 샌즈는 정신이 번쩍 뜨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토리..!"

 

토리엘은 마구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렀고 샌즈는 그 뒤를 쫓으며 다급히 말한다.


"가지마요, 토리. 모든 걸 설명할게요."

 


어느 덧 토리엘은 마구 흐느끼며 계단을 내려갔고 샌즈는 조금 뒤늦게 그녀의 뒤를 쫒아 내려간다.

 


"아이를 싫어했던게 아니라, 당신.." 

 

젖어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토리엘은 소파 앞 협탁에 놓여있는 차키를 낚아채듯 챙겨들었고 그를 보는 샌즈는 기막힌 심정이 되고 만다.

 


"차? 지금 날씨가 어떤 줄 알아요? 너무 위험해요. 게다가 지금 시간에. 제발, 차라리 내가 나갈게요. 토리. 토리!"

 


토리엘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흐느끼며 현관을 나섰다.

 


쏴아아아...

 

 

곧 온 몸을 두들기듯 퍼붓는 빗줄기를 맞으며 둘은 바깥으로 나와있었다.

 

토리엘은 어느 새 차 문 앞으로 다가가 있었다.

 

빽빽히 내리치는 빗줄기와 눈앞을 가득 메워오는 눈물들로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는지 그녀는 열쇠를 제대로 끼우지도 못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열쇠를 헛 끼우며 흐느끼던 그녀의 손길이 곧 정확히 구멍에 맞추어 열쇠를 끼워넣었고, 곧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말없이 숨만 헐떡이며 서 있던 샌즈에게도 들려오게 되었다.

 


"...난.. ! 난 다른 시간선에서 왔어요!"

 

 

세찬 빗소리를 뚫고 악에 받친 그의 목소리가 아무렇게나 터져나왔다.

 

빗물이 사정없이 들이쳐 그의 얼굴을 때린다.

 

 

토리엘은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로 흠뻑 젖어 든 얼굴로 움직임을 멈추며 샌즈를 바라보았다. 

눈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퍼부어 내리는 빗줄기는 작은 온기조차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차갑기만 하다.


샌즈는 힘없이 어깨를 떨어뜨리며 토리엘을 향해 말을 잇는다.

 

 

"..난 이 시간선과 상관없는 존재에요. 사고로 7년 전에 이 시간대로 흽쓸렸고.. 내가 찾던 '세이브 포인트', 별 모양의 돌은 세이브한 시간으로, 지점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 장치에요 그래서 난."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점차 말이 빨라지던 샌즈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이내 안타까운 표정이 되어 그 말이 끊겼고 두 눈은 힘없이 내리감겼다. 

 

 

"...제발, 토리. 안으로 들어가요. 내가 모든 걸 설명할게요. 그러니 이렇게는 떠나지 마요."

 

 

빗물을 온 몸으로 뒤집어 쓴 채 샌즈는 닫은 두 눈구멍을 더 질끈 감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제발. 제발, 토리. 


일순 꾹 내려감은 그의 눈 앞에 갑자기 플래시라도 터뜨린 듯, 온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쿠르르르릉..!

 


뒤이어 끓어오르는 듯한 천둥 소리가 두두두두 쏟아져내리는 빗소리를 묻을 정도의 굉음을 내며 하늘 가득히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때.

차가운 빗방울만큼이나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가 사방으로 쏟아지는 빗소리를 뚫고 샌즈의 귓가에 똑바로 들려왔다.

 


"..그 말. 제가 지상을 여행하러 지하에서 나왔을 때도 당신이 절 막으며 했던 말이었죠."

 

 

...!

 

샌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표정이 되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고
토리엘은 표정없는 얼굴로 그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여지없이 차 문고리를 당겨 열었다.

 

 

덜컹.

 

"..당신이 몇 년간이나 창고에서 살다시피하며 복잡한 실험을 강행해온 것은 알아요. 하지만, 샌즈. 난 당신의 농담을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샌즈의 눈이 커졌다. 

 

"..차라리 당신에게 모욕을 당했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비참하진 않을텐데.."

 

토리엘은 가만히 눈을 감으며 빗물과 눈물을 흘려보냈다.

 


슬픔과 분노. 그리고 배신감. 그 경계의 어디쯤 자리잡은 감정이 흠뻑 젖어든 그녀의 얼굴에서도 잘 드러났다.

토리엘은 입을 한 번 사려물더니 곧 미련없이 차에 올라타고는 시동을 걸어 차를 출발시켰다.

 

"끼기이익-!"

 


곳곳에 커다란 물 웅덩이가 고여있는 탓에 뒷바퀴가 빠르게 헛돌아가며 끔찍한 소리를 내질렀고 고여있는 물을 사방으로 튀기며 곧 차는 움직여 차도로 진입했다.

 

그렇게 보란 듯이 그의 앞에서 점점 빠르게 멀어져가는 차의 뒷모습.

 

 

그리고 차를 출발시키며 절망적으로 무너지는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쏟아지는 빗 속에 샌즈는 도로 한 가운데 홀로 남아 서 있었다.

 

갓길에 설치되어 있는 커다란 가로등 빛이 그를 연극 속 비극의 주인공처럼 어둠 속의 그를 위에서 똑바로 내리비추며 뿌연 빛으로 쓸쓸히 흩어져 내렸다.

 

 

 

 

 

 

 

 


새하얗다.

 

 


그것이 침대 시트를 마주한 샌즈의 첫 인상이었다.

 

그리고 샌즈는 생각했다.

 


내가 여길 왜 왔더라.

 

 

....전화가 왔었다.

 

 

그래. 전화가 왔었어. 그런데 왜 나는 그 폭우를 뚫고 이제는 지름길이라고 부르기도 무색해졌을 능력을 그렇게 무리해가며 연달아 사용하고는 이 곳으로 도착해서

 

이런 몰골로 서있는거지.

 

 

그의 눈 앞에 굴곡을 그리며 덮여있는 침대 시트는 여전히 새하얗다.

 

신성하게까지 보이는 순백의 그것을 샌즈는 자신이 더럽힐까 차마 손대지 못하고 그저 바라 보고만 서 있었고 그러자 옆에 서있던 하얀 가운의 남자가 대신 시트를 걷어주었다.

 

....

 

"..Heh, 뭐야. 자고 있잖아."

 

편안해 보이네.

 

 

샌즈는 그렇게 생각하며 누워있는 토리엘의 어깨를 흔들었다. 왜 여기 있어요. 집으로 가요,하며.

 


그를 보는 하얀 가운의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어렵게 입을 뗀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 온 괴물들은 죽어서도 먼지로 돌아가지 않고 마치 인간처럼 시체로 남아서..
.. 그거 뭐 어디서 들었던 것도 같네. 그런데 지금 그 얘기가 토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좀 깨워주기나 할래요.

 

 

그렇게 토리엘을 가만히 흔들며 깨우는데.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있는 그녀의 얼굴에 일순 물방울이 하나 떨어져내렸다.

 

샌즈는 멍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 건물 방수가 별로인가본데. 비가 새기나 하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 보려는데 또 한 방울이 똑, 하고. 그리고 또 한 방울이...

 

샌즈는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나.. 왜 울고있는 거지.."

 

 

손가락 뼈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 

이 눈물의 의미는 뭐지.

가슴 한 켠이 차갑게 식어내린다. 잠들어 있는 토리엘의 모습이 어딘지 이질적이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샌즈는 토리엘의 어깨를 거세게 잡아 흔들었고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가 그의 팔을 잡아 제지했다.


고인에게 욕 보이지 말고 편안히 가시도록 해야..
..팔 좀 놔줄래요. 그냥 깨우려는 거니까. 그리고 시체니 고인이니.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깨워서 데려갈게요. 그러니 이상한 소리...

 


"..편안히 가셨습니다."

 


"..뭐라구요?"

 


"빗길에 커브구간에서 가드레일을 뚫고 절벽으로 떨어지기 전 심장마비가 온 게 원인이었습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습니다."

 

 

....

 

 

샌즈의 눈빛이 흐려졌다.

 

 

표정없는 그의 흐리멍텅한 눈구멍에서 비를 닮은 무언가가 광대뼈를 타고 쉼없이 흘러내렸다.

 


"..토리."

 

 

한기라도 느끼듯 덜덜 떨리며 흘러나오는 자신의 숨소리가 이상하게 들려왔다. 고개 숙여 잠든 듯 고요한 그녀의 뺨에 입 맞추며 샌즈는 무너져내렸고 침대를 붙들고 주저앉은 채 상처입은 짐승처럼 마구 울부짖었다.

 

 

 

 

 

샌즈는 부재의 시간을 보냈다.

 

공기를 모방하듯 소파에 드러누워 호흡하는 일이 그의 삶의 전부인 양. 가끔 그렇게 오르내리는 자신의 가슴께를 내려다보며 자조섞인 미소를 짓는 일 또한 그런 것처럼.

 


샌즈는 애도하지도 않았다.

 

애초 자신으로 인해 영면에 든 토리엘을 그의 기억 속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그녀를 욕보이는 행위라고 생각됐기 때문에.

 

 


창고는 폐쇄했다.

 

세이브 포인트,

 

그게 뭐더라.

 


장례식장에서의 기억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마치 부서져나간 것처럼 군데 군데 빠져 떠올랐다. 


긴 행렬. 비. 눈물. 울음소리.

기억이라기 보다 부분 부분 떠오르는 그날의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을 배회하다 이내 누군가를 떠올린다.

 


..프리스크. 그 아이도 왔었나?

 


그러나 이내 그냥 웃고만다.

 

 

안 왔을 리가 없지. 생각하며 소파 앞 협탁에 언제나처럼 놓여있는 맥주캔을 들어 쭉 들이킨다.

 

왔으면 어떻고 안 왔으면 또 어떻고.

애초 내가 그 아이를 떠올릴 자격이, 얼굴을 내비칠 자격이 있는건가. 그녀의 의붓 어머니를 죽게 만든 것이 바로 나인데.

 

 

금새 비어버린 캔을 아쉬운 듯 흔들던 손 뼈가 이내 휙 하고 미련없이 아무렇게나 빈 캔을 던져버리고. 협탁에 놓여있는 새 맥주캔을 들어 따고는 마치 처음 맛보듯 달게 들이킨다.

결국 그를 달래주는 것은 그저 술, 어느 때는 달게 넘어가고 어느 때는 타는 듯 쓰게 넘어가는 술만이 그의 정신을 온전치 못하게 흐려 놓았고 샌즈는 그 상태가 유일하게 편안하다고 생각됐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술에 빠져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유학을 포기하고 집으로 오겠다는 파피루스와 아침에도 한바탕 전화로 크게 싸우고는,

샌즈는 언제나처럼 소파에 처박혀 잠이 들었고 곧 그런 자신의 몸이 무언가에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샌즈, 일어나봐 샌즈. 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샌즈의 귓가를 간질이며 동시에 그의 가슴께를 젖어들게 만들었다.

 

샌즈는 잠에 취해 정신없는 와중에도 소파 등받이에 처박아 두었던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했다.

 

 


...헤, 뭐야. 아직 꿈이잖아.

 

 

흐릿한 시선으로 비치는 어깨까지 긴 갈색 머리에 깜빡이는 눈길.


자신의 시간선에 있던 프리스크, 그녀의 모습이었다.

 

 

... 한 동안 안 보이더니. 반갑네.

 


"Heh, 오랜만에 찾아왔네."

 

샌즈의 말에 흐릿하게 떠오른 그녀의 얼굴이 놀람에 젖어든다.

 


..뭐, 이번에도 데려가려고 나타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샌즈는 다시 돌아누웠다.


잊기위해, 그리고 잠들기 위해 습관적으로 들이켰던 술은 그의 불면증에 어중간하게 작용하여 온전히 잠에 든 것도. 들지 않는 것도 아닌 비몽사몽한 상태로 만들어놓았고

그것은 평안한 수면과는 거리가 멀었다.

 

샌즈는 괴로운 듯 두 눈을 꾹 내리감았다.

 


..가지말고 좀 더 내 이름을 불러줘. 더 얘기해줘, 프리스크. 내가 잠들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언제 다시 잠들었었는지 샌즈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 얼핏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의 흐리멍텅하게 뜨인 눈구멍과 몸의 감각에 의하면, 지금 자신은 누군가에게 안겨 계단을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선 어딘지 그리운 향기가 났다. 정말. 아주 그리운..

 

샌즈는 희미하게 떴던 눈을 다시금 닫아버렸다.

 

 

..그럴 리 없어. 이건 꿈이다. 그것도 아주 고약한. 악몽보다 성질 나쁜 종류의 꿈.. 그도 그럴게 이 집엔 이제 나 혼자 뿐이 남지 않았으니까.


샌즈는 가슴이 젖어드는 기분을 느끼며 그 품 안에서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