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1)
슬슬 무더위에 호박꽃은 지나 밤엔 어덴가 모르게 쌀쌀한 바람이 불어 봄 이불을 치우지 못한 유월 한날이었다.
“서.. 성 퍼뜩 일어나 보소!”
시계를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서늘헌 아침. 근 십년 안에는 맞아 본 적 없는 시간에 그가 눈을 뜬 것은.
“아 동상, 뭐다러 그런디야.”
하늘이 뒤집혀진대도 게으른 송아지마냥 아침잠만은 포기한 적 없는 제 형을 연신 불러싸면서 골이 아프랴 흔들어대는 통에 어거지로 두 눈을 똑바로 떠서 동생을 바라보니, 쇠스랑 잘못 밟아서 그랬을 때 이후로 한 번 본 적 없는 성성한 눈물과 약간의 원망이 비쳐 보이는 거였다. 아직 덜 깨 태평하던 형의 눈이 황소같이 꿈뻑이는 것을 볼란제, 설움이 복받치는 지. 등치도 산 만한 놈이 형을 덥혀누르듯 하며 안겨서는 펑펑 울어대는 통이었다.
“뭐 땀시 이러는데, 응? 필수야.”
형님은 한동안 동생의 이름만 부르며 손 뽑아 등을 다스려 줄 밖에 없었다. 허나 울음은 그치질 않고 이내 서글픈 딸국질로 변하는 통에 뭔가 딱.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거라 짐작은 하면서도 통 감이 잡히질 않아서.
“야가 애만치로. 일단 뭔 일이 있는디 말을 해야 알 제. 계속 이러고 울고만 있을라고?”
부러 목소릴 좀 높여 한 소릴 한 후에야 그 입도 큰 놈이 개미 기어가는듯한 소리로 겨우 한 소리를 뽑아 내는 것이었다.
“서..성님. 거.. 거시기 일단은 밖에 함 나가보쇼.”
입말로는 거 참 뭔 일인데 그러냐, 하면서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만. 그 몇 걸음 안되는 동안 자기를 따르는 우짜쓰까잉이란 말이, 귀에 엉겨 돌아.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바싹 들어간 갈비뼈나 란닝구 안으로 볶아 대면서 문 밖을 나서자, 여린 햇살에 조금 상했을 지라도- 계절을 되감기한 듯한 하얀 서리밭이 펼쳐져 있었다.
“흐미-. 그래서.”
간밤에 느낀 한기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허탈감에. 왠지 하얀 한숨이 목구멍을 간질이더니 흐느적거리며 흩어진다. 그 뒤를 따라 나온, 글썽거리는 동생이 앙상한 손가락으로 작달만한 형의 어깨를 짚는 데, 차마. 눈이 마주칠 수 없는 쩌르렁한 맘에 그저.
“필수야, 괜찮다. 응? 괜찮아.”
“성..”
적이 작은 짐승마냥 괜찮다 울부짖을 밖에.
동리가 뒤집힌 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일, 형은 동생이 오지랖 넓게 남 등을 덥혀줄 때에야 자기도 힘을 얻는 다는 걸 아니, 굳이 동생을 마을 회관으로 내려 보내고는 열없이 어미와 새끼, 애지중지하는 한우의 누런 대갈통만 쓸고 있을 따름이었다.
“느그라도 무사한 게 다행인디..”
미역 줄거리라도 되는 지, 검고 흐늘흐늘히 녹아내린 채 자라지도 못한 모가 밟히어 즐겨 물던 강아지풀도 하나 꺾을 생각 못하고 집으로 도망 온 길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이른 봄부터 이렇게 될 것도 모르고 싱글거리며 쏟아 부은 땀과 웃음과 희망이 너무 아깝다기 보다는 되려 허망하여서. 무릎 높이나마 자라올린 그 열심과 생명력이 누구인지 모를 이의 하룻밤 변덕에 다시 무로 돌아가는 그 일방적인 상황이 분통 터진다만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잃은 후에 또 허망해질지 모르는 웃음 뿐이라서.
“이래서 내가 농사를 안 짓는다니까요.”
어머니. 또렷한 서울 말씨로 중얼거리고는 침을 퇘 뱉으며, 환한 꽃분홍 슬리퍼 머릿축으로 축축한 흙을 덮어 올린다.
“가만보자, 거시기 보험이...”
느릿느릿 안방 서랍에 있는 자질구레한 종잇짝들에 조금식 머리가 간다. 이런 때에 수가 밝은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또 다른 재앙이었다. 하지만 자기는 그렇다 쳐도- 일평생을 땅만 바라 온 동생은. 적어도 둘 중 하나는-.
형은 차라리 자기인게 다행이다 싶었다.
“성. 그라도 거손 할아부지가 아직은 괜찮다고 한께, 너무 괴념치 말드라고.”
모여 봐야 거기서 거기일 처지끼리 딱히 뾰족한 수도 없어 전전긍긍하다 말았나 보다. 그래도 연장자라는 명목으로 그 굼뜬 거손 영감이 고생했을 거라는 뻔한 비디오에, 형은 저도 모르게 수고하셨소 한 마디를 툭 던질 뻔 하다가 냉큼 삼켜 둔다. 수고는 아직 먼 것만 같으니.
“있냐, 성. 우째 다른 방법이 없응게 낼 부터라도 일단은 갈아 없는 게 낫디 않?”
형을 어쩔수 없이 내려다보는 그 둥글둥글한 눈매가 어딘가 모르게 빛나서.
“그라제.”
별빛을 길어 올린 우물마냥 빛나니, 형은 그 앞에 찔린 그림자가 되어 주절주절 늘어놓는 내일과 또 내일의 계획을 자동인형처럼 까닥까닥 고개 숙이며 들어 줄 밖에. 맘만 같아서는 다 때려치자고 하고 싶다만 또 그럴 수는 없게 붙잡았다.
“에혀, 아츰부터 이게 대체 뭔 사단이다냐, 말해 뭐 해. 일단 밥이나 묵어.”
그러니 괜히 들어가지도 못할 밥이나 핑계대고 자리를 뜰 밖에.
“성, 냉장고에 어제 말아 논 국수 있는디.”
“그 불어 터진 걸 우째 먹어? 저그 뒤안에 다 내다 버리고 밥에 묵은지나 먹고 말아야디.”
허나 가리지 못한 뾰족한 마음이 어리숙허이 국수를 핑계로 동생을 찌른 긋을 문턱을 반쯤 넘어가서야 깨달았으나, 더 따끔한 게 괜히 험한 말만 입에서 삐져 나올까봐 딱딱한 이를 더 앙다물다 마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기분이 좋았더라면 묵은지 죽죽 잘라 바스락한 부침개라도 하나 부쳐 주는 것인데, 너무한 밥상에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는 동생을 보니, 미안한 마음에 얼굴도 들지 못하고 콧구멍이든 입구멍이든 들어가는 대로 맨밥을 들어늫으려니, 밥상이 더욱 더 고역스러웠다.
“필수야.”
“왜 성?”
“나 저기 읍내 좀 다녀올게.”
“낯간지럽게 문 서울말이여, 무슨일인디.”
“그냥, 은행도 가 보고 보험도 알아보고 해야지.”
“기여. 근디 시간이 괜찮을랑가, 버스 시간도 얼마 안남았는디.”
“응, 빨리 가면 괜찮을 거야. 미안한데 설거지 좀 부탁할게.”
“기여.”
부리나케, 먹다 만 밥상은 내버려 두고. 아까 종이 가방에 차근히 넣어둔 종이짝들을 답지 않게 꼼꼼히 챙겨서는 뵈는 거 없는 황소마냥 뛰어가는 형을 보며,
“말만 서울말로 바꾸믄 뭐하나. 껍닥이 저런디.”
어디서 지근지근 씹어 넘기는 소리가 들린다.
* 못 쓰는 전라도 사투리를 찾아 쓰려니 힘드네.. 혹시 보고 거슬리는 부분 있으면 이야기 해 줘. 바로 수정할게.
퍄 구수하다 정성들인 문학은 개추야
한가지 오타가 있다면 '축축한 흙ㅇ르 덮어'
ㄴ 고마워ㅎㅎ
이거 왜 안날아오름?
날아오르라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