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선한 밤바람이 건물 사이로 불었다. 하늘에선 비가 가볍게 내리고 있었다. 에봇 도시에서도 가장 큰 번화가, 그 밤은 화려했다. 온갖 색깔의 네온사인들이 높고 낮은 건물들에 달려 빛났다. 그 사이로 난 넓은 도로에는 자동차들이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늦은 시간인데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북적이는 소리가 빌딩 위까지 올라왔다.
그 빌딩 옥상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있어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옥상 난간에 걸터 시끄럽게 살아있는 도시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모든 일을 감시하는 듯 날카롭고 숨죽인 시선으로 도시를 훑었다.
그 침묵을 깨트린 건 등 뒤에서 들린 발소리 때문이었다. 순간, 보라색 눈이 빛났다.
"좋은 밤이야. 그치?"
털털한 목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땅딸막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 또한 후드티를 입고 있었지만 뒤집어쓰고 있진 않았다.
"아, 샌즈. 문 여는 시늉이라도 좀 하지그래."
그를 보자 경계하듯 빛나던 보라색이 사그라들었다.
샌즈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언제나 소리 없이 나타났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서 자라던 나무처럼 항상 그렇게 나타났다.
"아, 내가 오는 걸 못 '본' 거야? 보라법사?"
샌즈는 씨익 웃고 있었다. 평소에도 늘 그런 표정이긴 했지만 말이다. 언제나 한결같이 웃는 얼굴 덕에 샌즈에게서 표정을 읽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사는 내심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샌즈에게 살짝 소리 내 웃어주곤 입을 열었다.
"여전하구나. 그런 개그에 웃어주는 사람이 있기나 해?"
"있지. 너."
"하, 참 나. 그리고 나 그 별명 별로 안 좋아해. 보라법사라니."
"다들 그렇게 부르는걸. 왜, 난 괜찮은데."
"애들 만화에 나오는 이름 같잖아. 대체 누가 지은 거야?"
"누구겠어. 애들 만화 좋아하는 누가 지었지."
이번만큼은 마법사도 진심으로 웃었다. 꽤 오랜만에 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러곤 정적이 잠깐 흘렀다. 정적이 있던 자리는 도시의 소음으로 빠르게 채워졌다.
사실, 이렇게 여유롭게 있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상황은 꽤 심각했다. 말 그대로 도시 전체가 이 '보라법사'를 쫓고 있었으니까. 그는 세계에서 가장 핫한 수배자였다. 그를 쫓는 사람은 두 부류였다. 하나는 법을 집행하기 위한 사람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냥 좋아서 쫓아다니는 팬들이었다. 양쪽 모두 다 보라법사를 잡아 보려 극성이었다. 그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마법사는 이런 시간이 좋았다. 이렇게 여유롭게 있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런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 친구와 한가롭게 농담 따먹기나 하는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먼저 입을 뗀 건 마법사였다.
"아스고어는?"
"똑같아. 여기저기 사람들 만나러 돌아다니지."
"그거 싫어했잖아."
"어쩌겠어. 괴물 대표인걸."
마법사는 아스고어를 떠올렸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땐 큰 체격에 놀랐지만, 몇 마디 나누고 나서 정말 순수하단 걸 느꼈다. 그와 정치는 정말이지 하나도 어울리는 구석이 없었다.
샌즈는 난간 쪽으로 걸어 나와 도시 풍경을 쳐다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모두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어. 언다인은 다 때려 부수려는 걸 억지로 참고 있고, 알피스는 다시 조사에 들어갔지. 파피루스는... 뭐 걘 워낙 긍정적인 애니까. 그리고 토리엘은..."
샌즈가 말을 한참동안이나 흐렸다. 이런 일은 좀처럼 없었다. 샌즈는 언제나 말하고자 하는 건 확실하게 끝까지 말하는 남자였으니까. 마법사는 이런 샌즈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대신 말을 이었다.
"말 안 해도 알아. 자식같이 키우던 애가 실종됐는데 멀쩡할 리 없지."
샌즈가 시선을 내려 건물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항상 웃는 얼굴이 왠지 무표정하게 보였다.
프리스크가 실종된 이후로 친구들은 더 돈독해졌다. 모두 다 같은 목적으로 불타 올랐으니까. 그리도 모두 다 진심으로 힘들어했으니까. 그중에서도 특히 토리엘이 심했다. 샌즈는 당시 토리엘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모두 다 내 탓이야. 내가 좀 더 주의했어야 했는데...'
샌즈는 기억들을 좀 더 더듬다가 프리스크가 떠올랐다. 그 표정 없는 얼굴이 떠오르자 사뭇 자기가 얼마나 프리스크를 그리워하는지 알게 됐다. 프리스크를 납치한 그놈, 누구인지는 몰라도 반드시 찾아 내 아주 나쁜 시간을 보내게 만들 거다. 그런 생각이 들자 샌즈의 눈에서 두 가지 빛이 살짝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특이한 광경이었지만 바로 옆에 있던 마법사는 눈치채지 못했다.
마법사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약간 상기된 듯한 얼굴 표정과 불안한 듯 떨리는 눈동자로 봐서는 분명 아직 궁금한 것이 남은 듯했다.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의 시도 만에 드디어 말을 뗐다.
"어... 그리고 또..."
마법사가 얼버무리자 샌즈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머펫 말이야?"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잔뜩 빨개진 얼굴이 가려지진 않았다.
웃긴 일이었다. 보라색 마법은 정신과 감정을 다루는 마법이다. 그는 그런 보라색을 사용하는 마법사였다. 굳이 따지자면 마법사들 중에서도 상당히, 아니 거의 최고였다. 국립 마법사에 소속되어 있을 때 그의 계급은 아래보다 위에서 세는 게 훨씬 빨랐으니까. 젊은 나이를 고려하면 더 대단한 일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고양이가 쥐를 사랑하도록 퐁당 빠트릴 수도 있었다. 물론 마법 지속시간이 끝나면 쥐는 한 끼 식사가 되겠지만. 어쨌든 그는 웃기게도 자신의 이런 감정을 다루는 덴 서툴렀다.
그건 어린 시절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한 까닭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마법사 학교에서 우정과 사랑이란 것은 허상이었다. 거기에 있는 모두에게는 국립 마법사라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고, 그 뒤엔 항상 성적이라는 철저한 수치가 따랐다. 더욱이 보라색 마법은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꺼리는 색이었다. 보라법사는 언제나 우등생이었던 만큼 언제나 혼자였다. 그에게 사랑이며 우정이며 하는 긍정적인 감정은 이론으로 알고있는 것이지 느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 얻은 친구들에게 더 애정이 갔다. 비록 그들이 괴물이라 할지라도. 특히 머펫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 그래. 머펫은 잘 지내?"
"네가 직접 보러 가는 건 어때? 다시 가게 연지가 언젠데. 너만 괜찮다면 제과점이 아니더라도 자리 마련해 줄 수 있어. 번거롭겠지만 뭐 너라면 기꺼이 해 주지."
보라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알잖아. 마법사들 철저한 거.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순 없어."
샌즈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머펫은 잘 지내고 있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장사도 나름 잘 되고. 그 대머리 놈은 트라우마가 제대로 박혔는지 머펫을 무슨 공주님 대하듯 한다니까."
마법사는 다행이라는 듯 눈을 살짝 감았다. 그것이 오늘 들은 것들 중 가장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다.
"근데 머펫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걔도 자기 몸 하난 지킬 줄 알아."
보라법사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가자. 알피스가 기다리겠다."
샌즈가 못 말리겠다는 듯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 인간은 언제나 정직했다. 그게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점이었다. 그리고 그게 샌즈가 마음에 들어 했던 점이었다. 샌즈는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머니에 넣고 있던 한 쪽 손을 빼서 인간의 손을 잡았다.
"자, 전에도 해봤었지?"
보라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옥상을 내려가는 문 쪽으로 걸었다. 샌즈가 문 앞에 다다라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둘의 모습은 사라졌다. 옥상은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듯 텅 비어 있었다.
둘은 알피스 박사의 연구실 안으로 이동했다. 보라법사는 아직도 이 주문이 작동하는 원리를 알지 못했다. 아마 어떤 마법사도 알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하며 샌즈의 손을 놨다.
"기다렸지 알피스?"
"어... 왔어? 보라법... 아니, 보라색 마법사! 오랜... 만이야."
알피스 박사는 열심히 타자를 치던 노트북을 닫곤 어색한 웃음을 짓더니 얼굴을 찡그려 트려 안경을 올렸다.
"그리고 샌즈도!"
샌즈는 보라법사의 뒤에서 웃는 얼굴을 빼꼼 내밀어 손을 흔들었다.
"바... 바로 시작할 거지?"
알피스는 보안 장치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후..."
보라법사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부터 시작할 일이 어떤 것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곧 기계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어두웠던 방에 빛이 쏟아졌다. 알피스가 장치를 조작하자, 방 한가운데에 있는 불투명한 원통 장치가 작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방에 불이 켜지면서 원통 안이 환하게 들어다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인간 여자가 의자에 단단히 묶인 채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쏟아진 빛 때문에 눈을 찡그렸다. 그녀는 오랜 시간 이 안에 갇혀 있던 것 같았다. 적어도 며칠 동안이나 씻지 못한 듯 살짝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그다지 힘들어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왠지 모르게 상당한 여유가 느껴졌다.
그녀는 눈이 빛에 적응되자,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보라법사가 아무 표정 없이 원통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가 보라법사를 보며 매력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선배."
개추먹어!
개추 - D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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