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1편





괜찮다고 말은 했으면서도 흙먼지를 사방으로 튀기며, 분홍 슬리퍼 차림으로 용케 달려 들어간 정류장에는.

아저씨.”

항시 변함없는 목소리와 말투. 어린애. 숨 차는 어른의 마음을 모르는지 태연적게 인사를 건넨다.

. .. ... 숙구야.. 네가 뭔 일이여?”

버스 10분 늦게 온대요. 타이어 갈고 오느라.”

그래도 허탈한, 뜨거운 숨을 몰아쉬고야. 어른은 억지로 씩 웃어 보일 수 있었다.

다 늙었나 봐요, 그렇게 숨이 차고?”

글게 말여.”

큰일 났네, 나한테 장가들어야 하는데~”

차라리 능청맞기나 하지, 과묵한 아가 가끔가다 한 마디씩 담담하게 툭 던지는데 앙증맞은 서울 말씨 뒤에 한마디씩 뼈가 콕콕 박혀 있어 어른을, 특히 아저씨를 놀려먹는 데 도가 터 있었다. 항시라믄 기양 무시하고 말 것을, 괜히 장단을 맞추어 말 한 마디를 보태준다.

오빠도 아니고 아저씨라 부르면서 장가를 들라니, 이게 뭔 소리당가?”

좀만 기다리면 돼요. .. 8?”

괜히 말을 붙였다 싶은 생각이 들만치로. 진심인지, 째까난게 동자가 잘 보이지도 않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는 양 손가락을 힘주어 펄럭이는 아이의 모습이 마냥 귀여워 보이면서도, 지금 열 살짜리든 스무 살짜리이든 장가 들 생각할 때가 아닌데 싶어, 어차피 사춘기 지나면 살얼음 녹듯이 사라질 짝사랑엔 마음 쓰지 않기로 한다.

아야, 근디 읍내엔 뭔 볼일이여?”

내일이 승리 생일이어서요. 선물 사러 가요.”

이장님댁?”

.”

유채꽃이라도 피어났는지 환한 아이의 웃음에 마주 웃어 보이지만, 그 천진난만함이 부러워 되는대로 우겨 넣은 데다 뛰기까지 한 속이 적지않이 쓰리다. 같은 버스를 타고 가겠지만 목적지는 왜 이래 다른지, 오는 길에도 같은 차를 타기로 약속한 아이와 같은 표정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뻔히 그리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바라보는 게, 황소 같은 게으름 못지 않은 고질이었다.

10분보다는 조금 이르게 버스가 왔다.


읍내에서 동리로 들어가는 버스는 두 시간에 한 번 뿐이라, 유난히 서늘하다곤 해도 열감이 가시진 않은 버스 정류장에서 동리 사람들끼리 모여들 앉아 주절거리다 주절거리다 함께 돌아가는 일은 그리 귀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허나 오늘따라 저 멀리 뵈는 정류장엔 복작거리는 소리하나 들리진 않고, 낯익은 어린애 하나랑 낯익은 빨간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 다인아. 니가 여긴 뭔 일이다냐?”

언제나 눈치 없는 제, 썩 가까이 가서 이름을 불러 보믄 씩씩하게 웃어 보이는 게 장군감이다 싶다만 오늘은 수척허이 기운 없어 마치 뭍에 나온 생선과 같아 게름직해 보이는 면상이었다.

, 뭐 볼일이 있어서 하네랑 같이 왔소. 오빠는?”

, 나도 똑같쟤.”

그나저나 영감님은 어디 가시고 청승맞게 이러고?”

몰러, 하네가 그냥 여 있으라 하드라고. 뭔 일을 하는 디는 대강 알 것 같은디..”

평시라면 이쯤 되면 둘 중 하나가 웃거나 짜증내거나 할 일일 터인디, 어쩐지 시큼털털허이 막힌 말에, 눈치 바른 아이는 잠잠하다. 가볍고 힘없이 고개를 마주 젓는 품새가 영 찜찜하디만 사정이 손바닥 보듯 뻔 하니, 해줄 말이 없어 입안이 타들어가기만 할 뿐, 때맞춰 들어 온 썰렁한 버스에 뭐 그래 급한 일이 있다고 재촉하며 올라서서는 흙먼지에 희부연 유리창 너머로 아까 한 인사에 더해 동리에서 다시 보잔 말을 굳이 더해 놓고는 멀어지는디.

암만 눈치가 빨라도 애는 애라, 읍치고는 꽤나 멀끔하게 싸인 꾸러미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웃는 아에게 괜히, .

좋아?”

, 암만 시골이여도 읍내는 다르네요.”

그려? 난 마을이나 읍내나 똑같던디.”

애로서는 삼키기도 힘든 말을 던져 궁금증에 불을 붙여 놓고서는, 그 궁금증이 어느 새 은근한 타박으로 변할 때까지고 목석마냥 눈 감고 귀 닫아 있는 것이었다.


숙구야.”

왜요.”

버스가 온 모양새 그대로 덜컹거리며 자리를 뜬 뒤, 동리로 올라가는 가로등 점점이 철 모르고 밝힌 길 위에서 쇼핑백 가벼운 걸로 하나씩. 터덜터덜 걷는다.

삐진 것 아니지?”

이상한 소리 한마디 하더니 그대로 곯아떨어진 빌빌거리는 아저씨, 밉기야 밉지만 이 아저씨 아무데서나 곯아떨어지는 걸 이 동리 애가 모를 리 없으니 그냥 안 그런 척 대답하고 말아버리는 마음새가 눈에 뻔해, 괜히 한 마디 덧붙이려다. 마침 윗길과 아랫길로 갈릴 때다.

숙구야.”

.”

.. 아저씨가 이따 저녁 먹고 잠시 들른다고 리혜 씨, 아니 선생님께 좀 전해 줘.”

또 무심코 에 하고 답하려 달싹거리던 입모양이 쏙 들어가고, 옆으로 넓은 눈이 푹 더 째진다.

왜요.”

어린애의 보송보송한 첫사랑은 어찌 그리 쉽게 연적을 만드는 지.

왜긴 왜야, 어른들끼리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걱정 말고 얘기 드려.”

“... 알았어요.”

말이랑 달리 별로 납득한 것 같진 않지만 이래저래 분위기를 읽다 보니 대충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것 같았다. 리혜 선생이 어느 날 데려온 부모도 모른다는 아이는 처음에는 말을 못하는 줄로 껌뻑 속았을 정도로 과묵하고, 입을 열어도 이래저래 싫은 소리 하나 못했다만, 이제는 제법 자기주장도 생기고 말수도 늘었다. 허나 주변 눈치를 살살 살피는 버릇만은 안 고쳐지는디, 때로 불쌍할 지경이었다. 이도 차차 나아지겠지 싶다만.

그럼 이따 봐.”

.”

돌아서서 달려가는 아이를 둘러 싼 거무죽죽하니 살풍경한 전답이 절로 우째 될지 모르제-. 장탄식을 뽑아내게 하는 것이다.


성미에 맞질 않게 아침부터 이리저리 돌아다닌 탓이려나, 집에 가는 길이 꼬부렁허이 몇 곱은 더 멀어 뵈는 느낌에 숨이 차 중소나무 아래의 뜨끈한 너럭바위. 어릴 적부터 눕기만 하면 스르르 잠이 쏟아지던 그 위에 등을 깔고 엎어졌다만 이제 제법 기세를 잃어 누릿해져가는 산촌의 해, 허나 제 안의 물기 모두 터져 내보내고 쓰러진 채로 비틀어져버린 모습이 눈 닿는 곳마다 걸려, 미적미적 몸을 일으킬 밖에. 잠시 시종 손에서 놓디 않은 종이가방을 한 번 더 확인하고는 고갤 끄덕이며 다시 집을 향할제,

!”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뒤돌아 보믄, 저 멀리, 얇은 팔 훌렁이며 휘적휘적 올라오는 동상이 있고, 또 삐죽이 하나 더 머리가.

안녕, 오빠?”

이야, 평화 아녀. 네가 여긴 무슨 일이여?”

있냐, 필수가 오빠가 읍내에 보험 알아보러 갔다 그러드라고, 재해보험은 증거 사진이 필요한께 동리 돌아다님서 찍으러 다녔지라.”

시골에서 돌아다니기엔 좀 호화스럽진 않은가 싶은 카메라를 살짜기 들어 올려 보이며 멋쩍게 웃는 동리 동생의 씁쓸한 웃음 앞에, 아차 그걸 놓쳤다 싶었지만 고맙다고 마저 웃을밖에. 아무래도 둘러싼 에봇산이 한기를 가두어 그런 것 같다고 덧붙이는 어릴 적부터 머리 돌아가는 게 비상하고 손재주가 뛰어난 동생. 도시에서 뭘 겪고 왔는지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돌아와서는 온종일 뒤안에서 뭘 만들고 부수기만 하는 통에 요즘 코빼기도 못 봤건만 이럴 때 나서주는 걸 보아하니 어릴 때 께구락데기 잡고 놀던 그 애가 맞는 것 같아, 마찬가지로 못난 오빠는 또 다시 웃고 만다.

니네 집에 컴퓨터 있제?”

요즘 세상에 컴퓨터 하나 업는 집이 어디있당가?”

그냐? 그라믄 낼모래 정리해갖고 보내줄랑게 기다려잉.”

기여. 오늘 누나 고생 겁나게 했으니 얼른 들어가 쉬어야.”

기여. 오빠도 안녕.”

작은 손이 공연히 흔들리자 이제야 부끄러븐지. 돌아서 제 골방으로 향할 꼬리마저 후다닥 길 너머로 숨어 버리고 성큼성큼. 동생은 그림자 물들어 가는 길로 들어선다.

성 참말로 수고했어야.”

서늘한 숲 바람에도 흩어지지 않은 땀 냄새. 누가 누구에게 했는지 알 수 없는 위로에, 형은 껌껌한 목구멍으로 꾹 삼키고는 다정히 건넨다.

동상, 국수에 김치전 묵을끄나?”






* 사전 찾아 쓴 전라도 사투리... 당연히 이상한 점이 있을 거라 생각해. 만일 거슬리는 부분 있다면 이야기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