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터 10까지 순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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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상식을 뛰어넘는 상황이나 스트레스에 직면하면 방어 기제로 정신을 보호한다고 한다.

남 탓을 한다거나, 기억을 왜곡한다거나, 감정하고 행동을 분리한다던가..

내 경우를 말하자면..

나는 그냥 정신을 놓아버렸다.

방구석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와도 같은 경지로 나 자신을 끌어내림으로서 현실도피를 시도한 것이다.

방금 전까지 죽을뻔 했으면서 뭔 얼빠진 행동인가 하겠지만..

원래 방어기제라는건 말이 좋아 방어기제지 올곧게 표현하면ㄴ ㅑㅇ 미치는거다.

난 어느 누구보다도 얌전하게 곱게 미쳐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머리를 비운 채로 폐허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띵딩딩딩 딩~딩~딩~ 딩딩딩 딩~딩~딩~]


"어 씨발 깜짝아!"


착신아리 저리가라 할 정도로 음산한 실로폰 소리에 현실감각이 확 돌아왔다.

진동을 동반한 소리는 입고있는 로브 안쪽에서 울리고 있었다.

난 또 뭐라고.. 토리엘이 전화를 걸어온 모양이다.

전화를 걸어보기만 했지 받아보질 않아서 깜짝 놀랐네.

나중에 좀 안 무서운걸로 바꿔야겠다.


"여보세요?"


나는 본능적으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한 톤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인간, 지금 어디쯤 있어요?"


"아, 지금 꽃밭이에요 토리엘. 무슨 일 있어요?"


"괜찮다면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버터스카치랑 계피 중에 어느게 더 좋아요?"


다행히 내 목소리에서 이상한 기류를 느낀 것 같진 않았다.

나는 한시름 놓으며 대답을 이었다.


"계피는 뭔지 알겠는데 버터스카치는 뭐죠?

 뭔..버터맛 스카치캔디 얘기에요?"


"버터스카치는 버터랑 바닐라 같은 단걸 넣어서 끓인 달콤한 시럽이에요."


"그런 설명을 들으니 계피를 좋아했어도 버터스카치라고 하겠는걸요."


웩, 혓바닥에 꿀을 발랐나.

내가 생각해도 이건 심하게 역겹네.

근데 뭐 꼭 그거 아니더라도 버터스카치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명절 때마다 기름냄새 없앤다고 계피를 펄펄 끓이는데

아주 옷이고 이불이고 그냥 징글징글해서..

근데 명절?

명절이라니?


"호호호. 알았어요.

 아! 그리고 너무 늦게까지 밖에 있진 마세요.

 저번처럼 어두컴컴해지면 또 떨어질 지도 모르니까.."


토리엘은 전화를 끊었다.

망할.. 그 때 일을 생각하니 웃음기가 싹 가셨다.

썩을! 내가 누구 좋으라고 거길 또 떨어져?

마음 같아서는 한 시간은 더 누워있고 싶었지만 인간은 학습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지체하지 않고 어거지로 귀갓길을 서둘렀다.


나는 올 때보다 훨씬 빠르게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함정은 꽃밭까지 오면서 이미 한 번씩 봐둔 터라, 지나간 다음 구석에 숨겨진 리셋 단추 하나 누르면 할 일은 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묘한 표정의 개구리 괴물들과의 눈싸움, 몇 번의 푹신한 추락을 거쳐 돌아온 집은 어째서인지 조용했다.

내가 쉬라고 하긴 했었지만.. 설마 벌써부터 자고 있는건가?

소리쳐서 불러보려다, 그냥 들어가서 안쪽을 살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자고 있었으면 깨우는건 좀 그러니까..


집 안은 모두 불이 꺼진 채로 조용했다.

토리엘이 마법으로 지펴놓던 벽난로는 싸늘하게 식어있었고,

옷을 걸어두던 옷걸이는 방을 가로질러서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오싹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안 돼. 안 돼. 그게 뭐든 간에 안 돼. 안된다고!


"토리엘! 토리엘!!"


나는 주방으로 뛰쳐들어갔다.

그곳의 풍경은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다.

냉장고 문은 반쯤 열려있었고, 벽엔 불에 그슬린 자국이 선명했다.

방금전까지 휘젓고 있었던 것처럼 거품이 남아있는 보울은 단내나는 시럽이 거의 다 쏟아져있었다.

색조없이 명암뿐인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그건 혈흔과 사향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오싹한 흔적이었다.


"아, 아아.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대체."


혼잣말 하면 안 돼.

혼잣말 하면 안 돼.

내 생각을 남에게 드러내면 안 돼.

내가 옳은건지 잘못된건지 확인하고 싶어도 안 돼.

가만히 쥐죽은 듯이 있어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모든게 밝혀지는데.

혼잣말 하면 안 되는데.

싸우기 싫어.

맞기 싫어.

알려지고 싶지 않아.

불안해.

누가 옆에 있으면 좋을 걸.

아. 난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난 뭐지? 난 누구지?


"토리엘! 토리에엘!!"


나는 목이 터지도록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정말, 집 안 어디에서도 토리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요리 준비를 하다가 뭔가 큰 일에 휘말린 듯한 흔적만 여기저기 남아있고..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거지?

 왜 그녀가 이런 일의 표적이 되는건데?

 뭘 위해서?"


떠오르는 게 없진 않았다.


"샌즈.

 손도 안대고 몸을 우그러뜨리는 그 놈이라면..

 ..아냐.

 아무리 그래도 토리엘은 그 놈하고는 친했어.

 그만하라는 말만 듣고 날 끝장내지 않았고.

 그 놈은 아냐. 그 놈은.."


그럼 누군데?


"..플라위.

 분명히 얼추 그런 이름이었는데.

 그 또라이 새끼는 정신이 나갔어.

 내가 쓰러지고 열받아하는걸 풀발기하면서 웃어제끼던 놈이야..

 지금 내가 나 말고 아끼는게 있다면 토리엘 밖에 없어.

 그걸 알만한 놈이 그 녀석 말고 더 있나?

 그 새끼다. 그 잡배놈이야. 이건 그 새끼 말곤 없어.

 플라위, 플라위라고, 야 이 씨발 개호로새끼!!!"


나는 목발 짚던 지팡이를 부숴버릴듯이 바닥에 대고 눌렀다.


"하지만 그 놈을, 토리엘을 어디서 찾지?

 폐허는 익숙해지면 살기엔 비좁은 곳이다.

 토리엘이 시장 보러가는 시가지조차도..

 애초에 인망좋은 그녀가 억지로 끌려가는 모습을 봤다면 저항을 맞닥뜨려야했을게 분명한데 그 쪽으로 갈 리는 없어.

 그렇다면 어디로 갔다는건데?"


불현듯, 내려가본 적 없었던 지하실 쪽에 생각이 미쳤다.


"아주머니, 인테리어 좋은데요."


"평소엔 지금보다 더 깨끗해요.

 내 정신좀 봐. 샌즈. 혹시 파이 좋아해요?"


"아뇨, 나중에.

 폐허의 대문을 부숴버린 마당에 한가하게 그럴 수는 없죠.

 건강한 걸 알았으니 됐습니다."


"..그래요. 그럼 나중에 봐요."


..그래. 분명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뭔가 폭발하는 소리는 지하에서 났었고..

샌즈는 그 다음에 나타났다.

폐허의 대문이 뭐든 간에, 이 아래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길이 있는 것이다.


나는 망설임없이 계단으로 향했다.

평소같았으면 개수대 아래쪽에 낑겨있었을 하얀 터럭이 뭉텅이로 떨어져있었다.

분명히 이 쪽이야.


지하는 훨씬 어두웠다.

계단을 다 내려오자 긴 통로가 나타났다.

일반적인 가정집 밑에 뚫려있을 필요라곤 전혀 없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공간.

거듭된 확신과 상황이 주는 중압감은 그 너머에 있을 무언가를 좇아갈 의지의 불쏘시개였다.


망가진 다리마저 디디다시피하며 다다른 곳은 대문으로 막혀있는 원형의 방이었다.

..가만.

누군가 서 있다.


"토리엘?"


불안한 마음에 짜내듯이 내가 찾는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정적.


"토리엘.. 당신이에요?"


묵묵부답.

나는 떨리는 손으로 로브 앞섶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낸다.


[또르르르르.]


[띵딩딩딩 딩~딩~딩~]


미처 바꾸지 못한 내 휴대폰과 같은 착신음이 바로 앞에서 울렸다.

상대가 천천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어두운 방 가운데, 그가 꺼내든 휴대폰의 미미한 스크린 라이트가 그 주인의 얼굴을 밝혔다.


"아, 아..."


거기 서있는건 토리엘이지만 토리엘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야. 이게 대체.


털복숭이 얼굴이 피와 시럽으로 지저분하게 엉겨있었다.

눈은 감긴채 피눈물이 흘러내렸고, 몸은 불안하게 꾸물거렸다.

계속해서 한 마디 말 없이 경련하던 얼굴이 별안간 크게 꿈틀하더니,

토리엘이 입을 열었다.


"안녕.

 오늘 벌써 두 번째지, 안 그래?"


그리고 엉망진창이 된 그 입 속에서 낯익은 흉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플라위......."


나는 이성이 끊어지는 것을 막지못하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온 몸을 덮치는 뜨거운 기운에 밀쳐져 벽으로 튕겨져나갔다.


"하하하..

 역시 이 년을 취하길 잘했어..

 네가 이렇게 발광하는 꼴이라니!

 최고야!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라고!"


플라위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미친듯이 웃어댔다.

나는 일어나려고 했지만, 전신에 엄습하는 고통 때문에 팔다리가 오그라들고 있었다.

놈은 그런 나를 계속 지켜보며 웃다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그와 동시에, 토리엘의 몸이 꿈틀거리며 양 팔을 나란히 들어올린 자세가 되었다.


"불에 데여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안 그래?"


그 말을 신호로,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토리엘의 손 위에 시뻘건 불덩이가 나타났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그리고 순식간에 방 안이 불지옥이 되어버렸다.


"일어나.

 난 일 대 빵 같은 점수는 취급 안해."


그을린 지팡이 두 개를 지면에 꽂듯이 눌러서 겨우 일어났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