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스크 패러블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7.5  18  19  20  21  특별편  22  23  24  25  26  27 27.5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



 난 알피스에게 다가갔다. 프리스크 때문에 못 한 이야기를 여기서라도 해야 했다.


 "알피스 씨, 당신은 다 봤죠?"

 "으, 응?"

 "제가 폐허에서부터 여기까지 올 때까지, 제가 뭘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 다 본 거 아닌가요?"

 "맞, 맞아."

 "그러면 지금 제가 누군지도 아실 거고, 샌즈와 말한 것에 관해서도 아실 거고, 그리고 아스리엘에 대해서도 아시겠죠?"

 "……."

 "그리고, 시간을 돌리는 힘에 관해서도 들으셨죠?"

 "……."


 알피스는 땀을 흘리면서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맨 처음 프리스크를 만났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맞는 것 같았고, 정말 프리스크의 모험을 모두 다 본 것 같았다. 이 힘, '의지'의 힘에 관련한 이야기에 대해서 얘기했던 것도 분명 알피스는 안다. 다만, 특유의 멍청한 성격 때문에 계속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것이겠지. 어쨌든 난 그 모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일단 가요. 그 지름길이란 곳으로."

 "으, 응. 일단 연구소까지 돌아가야 해. 엘, 엘리베이터를 타자."


 알피스는 내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더니, 메타톤이 있는 방 바로 옆에 있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내가 했을 때는 아무 조작도 먹히지 않던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방문마저도 굳게 닫혀 있었다. 메타톤이 한 것은 나보고 지나가지 말라는 뜻으로 하나의 쇼였던 건지, 아니면 알피스가 지나가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문을 닫아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알피스가 나에게 다른 길을 알려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알피스가 나에게 지름길을 알려주려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어차피 프리스크는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능력이 있으니, 길을 열어주어도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프리스크가 해왔던 언행들, 괴물들을 구해주겠다는 말과 그에 따른 행동들을 보고 나서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프리스크를 돕지 않았냐는 의문은 남지만, 성격을 보아 하니 좀 결정 장애가 있다고 하면 설명이 됐다.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묻고 싶었지만, 딱히 대화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나와 알피스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알피스는 엘리베이터 버튼이 아닌, 자신의 핸드폰을 두드렸고, 아마 그 신호에 따라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단순히 코어의 1층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생각보다 꽤 오래 움직였는데, 지름길이 치곤 꽤 돌아가는 것 같았다.

 어색한 기류가 잠시 흐르다가, 알피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네?"

 "너가 차, 차라야?" 

 "네. 프리스크는 빌어먹을 괴물들이 감동적인 연기로 몰아세우는 바람에, 충격을 받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죠."

 "그, 그건……."

 "알아요. 저도. 다 프리스크를 위해서라는 거 말이에요. 하지만 남의 사정 같은 거 크게 신경 안 쓰거든요. 굳이 그렇게 거친 방법을 써야 했냐는 질문은 하지 않을 거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네요. 오죽하면 제가 지금 이러고 있겠어요? 그 얘긴 하지 마요. 이런 거 가지고 짜증내기 시작하면 프리스크가 더 싫어하니까."


 사실 내가 먼저 쏘아붙인 얘깃거리긴 하지만.


 "그럼, 의지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어?" 

 "잘 알고 있진 않아요. 어떤 식으로든 유용하긴 한데, 썩 유쾌한 능력 같진 않다는 것 정도? 샌즈가 이 힘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알피스 씨도 모르는 내색은 하지 않았으니까 서로 아는 사이였나요?"

 "그래, 샌즈, 샌즈는 좋은 괴물이야. 그저, 연구 과정에서 문제가 좀 많았을 뿐이라서 말이지……."

 "자세한 사정은 됐고, 도대체 이거 언제 도착하는 거예요?"

 "수, 수도로 가는 엘리베이터는 연구소 깊은 곳에 있어. 거기로 데려다 줄게."


 신경 쓰이는 말투였다. 무언가를 숨기느라 긴장하는 듯한 말투였다. 더듬거리는 혀끝과 흐려지는 말들, 알피스의 옆얼굴에서 보이는 식은땀, 안절부절 못 하는 것을 참으려는 듯 떨리는 손가락들,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기엔 적절한 친구는 아니었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흐르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 엘리베이터는 꽤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 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굉장히 복잡하고 괴상한 식으로 움직인다는 걸 계속 되는 관성의 변화로 알 수 있었다. 어쩔 때는 왼쪽으로 움직이는 듯 싶다가도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가고, 이런 식의 움직임이 반복됐다. 코어 윗층에서 연구소까지 가려면, 좀 걸리긴 하겠지.


 "하, 하하, 조금 긴장 되네, 그치?"


 알피스가 갑자기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색함을 깨기 위한 의미 없는 시도였던 것 같은데, 뭐가 긴장된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연, 연구소의 내부를 보는 외부인은 정, 정말 오랜만이거든. 너라면 혹시 봐줄 수 있을까 해서 말이야. 사, 사실 프리스크, 그 아이에게 고백하고 싶던 것들이지만, 지금의 너라면 상관 없을 것 같아."

 "뭘 고백한다는 거예요?" 

 "그 아이는 정말 착하지. 모두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줬지. 난, 난 그 아이의 모험을 지켜봤고 감화됐어. 그저 인간의 어린 아이일 뿐인데, 정, 정말, 감동적이었어. 그 아이라면 이해해 줄 것 같았거든. 하지만 상관 없어. 너를 도와주는 것도, 결국엔 그 아이를 도와주는 거랑 같, 같으니까 말이야. 나도, 너라면 뭔, 뭔가 다른 결과를 얻어낼 수 있, 있을 거라 생각해."

 "어떤 결과요?" 

 "의, 의지의 힘을 가지고 있는 본인이라면, 우리가 연구로 알아내지 못 한 여러 가지를 할 수도 있지. 결계에 관련된 거라던가, 아니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던가, 여, 여러 가지가 있겠지."


 아마도 알피스는 프리스크가 결계를 부숴주길 기대하는 것 같았다. 너무 큰 꿈이다. 프리스크가 혼자서 결계를 뚫고 나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망정, 결계를 부술 순 없을 것이다.

 잠깐 다른 생각이 드는데.


 "프리스크의 영혼을 취하지 않는 건, 정말 프리스크가 착한 애라서 그러는 거예요, 아니면 어차피 죽여봤자 소용이 없어서 그러는 거예요? 만약 후자라면, 그거에 대한 차선책으로 결계를 부숴달라고 하는 거예요?"

 "아, 아니야. 그, 그냥 진짜로 난 그저 기대하고 있는 것 뿐이야."


 내가 배배 꼬여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거겠지, 하고 치부하는 게 모두에게 좋은 상황이다. 굳이 의심해봤자 도움될 것도 없다. 오히려 믿는 편이 낫다.

 뭔가 더 물어볼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가 갑작스럽게 멈추는 바람에 까먹고 말았다. 지금까지 움직이던 속도가 꽤 빠른 것이었는지,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나는 잠깐 자세를 제대로 잡지 못 하고 넘어질 뻔했다. 살짝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완전히 자리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증기 소리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는데, 도대체 엘리베이터가 어떤 구조길래 이런 소리가 나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내, 문이 열리고 나는 그 문이 열리자마자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나뭇가지를 꽉 잡았다.


 "여, 여기가 내 진짜 연구실이야."


 굉장히 어두웠고, 매캐한 냄새가 났다. 며칠 동안 물에 절어 있는 지하실처럼 비릿한 물 냄새가 났고, 연구실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심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조명이 거의 없어서 상당히 어두운 곳인데도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눈에 보였다. 굉장히 오랜만에 맡는 냄새다. 이런 곳에 있기 싫어서 에봇산에 떨어진 거였는데, 에봇산에도 이런 곳이 있었네.

 알피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나도 알피스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의 문에는 이상한 모양의 전구가 네 개 박혀 있었다. 알피스가 다시 핸드폰을 꺼내서 두드리자, 네 개의 전구가 차례로 불이 밝혀지더니,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열렸다. 하지만, 알피스는 엘리베이터에 타지 않고 나를 쳐다 보며 말했다.


 "이제 언제든지, 수도로 갈 수 있어. 하지만, 먼저……, 좀 봐줘."

 "뭘요?"


 알피스가 왼쪽으로 길을 꺾더니 거침 없이 걸어갔다. 나는 뒤쳐지지 않게 알피스의 뒤를 따라갔다. 알피스는 나를 보지 않고 계속 걸어가면서 말했다.


 "나는 병든 괴물들을 살리기 위해서 의지에 대한 연구를 했어. 영혼에서 추출해낸 의지를, 괴물들에게 조금씩 주입해서 수명을 늘리는 방법을 알아내려고 했지. 어느 정도는 성공했어. 죽은 줄 알았던 괴물들이 살아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말이야."


 갑자기 알피스는 말을 더듬지 않았다. 굉장히 말하는 게 버거운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알피스는 말했다.


 "하지만, 의지는 괴물들에게 적합한 힘이 아냐. 괴물들은 물리적인 형태가 너무 약해서, 의지를 주입하면 몸이 녹아버리지. 그것 때문에……."


 알피스가 멈춰 섰다. 나는 알피스 앞에 서 있는 거대한 괴물 하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시선이 빼앗겼다. 소리를 지르려다 입을 막았다. 저 괴물을 별로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불규칙한 발걸음과 흔들리는 살갗, 입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거대한 구멍에서 쏟아지는 침, 다리가 몇 개인지, 알 수가 없는 몸의 모양, 설명할 수가 없었다. 굳이 모양을 따지자면 개에 가까웠지만, 나는 저렇게 생긴 걸 개라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거대한 괴물이 느릿느릿하게 알피스를 향해 다가왔다. 알피스가 저렇게 당당하게 있다면 그렇게 위험하진 않겠지만, 위압감과 혐오감을 동시에 풍기는 그 괴물의 외관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특히, 머리 부분에 있는 거대한 구멍에서 쏟아지는 침과 정체불명의 하얀 마법은 위협적이다 못 해 쳐다보는 것조차 하기 힘들었다.

 혐오감이 들어서 쳐다보지 않으려다가, 나의 감각이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혐오감이 곧 동정심으로 바뀌고 경계심은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프리스크는 프리스크네.


 "제니, 여기 있어."


 알피스가 품 속에 숨겨두고 있던 과자 봉지를 공중에 던졌다. 그 제니라 불리는 괴물은 봉지도 뜯지 않은 채, 커다란 구멍으로 봉지를 받아 넣었다. 구멍 속에서 와그작 씹히는 소리가 났다. 기분 좋다는 듯한 개 울음 소리가 구멍 속에서 울렸다. 마치 양철통에서 개가 짖는 듯한 울음 소리였다. 그런 식으로 울린다는 것 외엔 영락 없이 개였다. 제니는 과자를 다 먹은 듯, 알피스에게 다가와 몸을 비볐다. 알피스도 그런 제니의 몸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무리 괴물이라지만, 일관성이 없었다. 아까 알피스가 했던 얘기가, 바로 이런 괴물에 대핸 얘기였나보다. 확실히 기형적인 형태의 괴물들이었고, 살갗이 녹아 내리는 듯한 모양새가 신경 쓰였다. 의지에 관한 연구 때문에 이런 괴물이 탄생했단 건가? 제니 밑에 있는 다리 사이에, 웃고 있는 개들의 형체가 보였다. 다리 사이의 음영마저도 괴물의 일부였다. 지금 보니까 마치 마주 앉아있는 개들처럼 생기긴 했다. 역시나 설명할 수 없는 형태였다. 


 "내가 괴물들을 이렇게 만들었어. 가족들은 내 연락을 기다리면서……, 이 괴물들을 기다리고 있지."


 제니를 보면서 '괴물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의미 심장했다. 이 괴물이 '괴물들'이라는 건지, 아니면 이런 괴물이 또 있다는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피스는 제니를 쓰다듬으면서 계속 그렇게 있었다. 그렇게 제니를 쓰다듬고 있었다.

 음…….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전 바빠요. 알피스 씨가 만들어낸 실수 따위 신경 안 써요. 전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신경 써야 한다고요. 시원찮은 위로를 바라는 거면, 전 그럴 여유 없어요."


 알피스는 움찔하다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제니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였고, 고민하지 않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바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지금 중요한 건 아스고어를 만나는 거지, 저 말더듬이 괴물을 상대할 시간은 없다.

 프리스크의 감정 때문인 듯, 가슴 언저리가 저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프리스크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힘든 일은 모두 해결해 놓아야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자동으로 닫히고, 빠른 속도로 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알피스의 말이 맞다면, 이제 수도로 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