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남자로서 자존심의 문제였다. 연인의 입에서 좋다는 말 한번 듣지 못하고 매일 구박만 받는 생활이 지긋지긋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성격인 걸 뻔히 알고 있었고 그 도도하기 그지없는 자존심에 이끌려 사랑에 빠진 것이었으니, 하지만 단 한 번도 심지어는 뻔히 좋아 죽는 게 보이는 정사의 끝에서도 연인은 사랑한다든가 좋다던가 하다못해 다정한 행동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자존심이 와장창 박살이 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처음에는 그저 정사 끝에 다정하게 끌어안는다던가 그런 사소한 것을 바랬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오냐 어디 이래도 네 입에서 좋다는 말이 나오지 않고 버텨? 라는 유치한 마음으로 변해서 참다못해 폭발해 결국 치사하기 그지없는 짓까지 하게 이르렀다.


손에 들린 작은 갈색 병을 씨익 웃으면서 내려다본다. 갈색의 병 속의 액체가 찰랑거린다. 나름 비싼 물건이지만 효과는 확실하단 걸 알기에 텅 빈 지갑을 외면하고 웃어댄다. 오늘이야말로 짜증이 날 정도로 도도한 연인, 파피루스의 콧대를 꺾어주리라 생각하니 기분이 매우 좋다.


갈색의 병에서 흘러나온 것은 아주 연한 유백색의 액체였다. 그것을 파피루스가 좋아하는 음료수에 슬쩍 흘려 넣고 살살 흔들어 잘 퍼지도록 해 두었다. 맛과 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닥터 페퍼의 강한 향과 맛이라면 깔끔하게 감춰주리라. 시원하게 음료를 들이켜고 화끈하게 달아오를 그를 생각하니 아무런 자극이 없이도 아래에 뻐근하게 힘이 몰린 것이 느껴진다. 아직 때가 아니기에 마음속으로 불경을 외며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적어도 연인이 귀가할 때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연인이 찌푸린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미리 외출복을 입은 채로 마중하니 안 그래도 찌푸린 표정이 더 험악하게 일그러진다. 기대감이 너무 과했는지 데이트를 할 때 조차 입지 않는 옷으로 꾸며대서인지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따갑다.


"어딜 가려는 거냐 멍청한 놈아."

"친구랑 술 한잔 하려고."


아무렇지 않은 듯 찔러오는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빙글빙글 넉살이 좋게 웃어댄다. 술을 마시러 간다니 안 그래도 따갑던 시선이 더욱 뜨거워지지만 무시하고는 샐쭉 웃어 보이니 오히려 파피루스 쪽에서 시선을 돌려버린다.


"마음대로 해라."


더이상 아무런 말도 없이 휙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따라가 냉장고에서 닥터 페퍼를 마시는 것을 보고 뒤에서 가볍게 포옹을 해준다. 떨쳐내지는 않았지만, 딱히 신경도 쓰지 않고 소파까지 걸어가서야 떨어지라고 투덜거려대는 것이 약효가 돌면 어떤 식으로 변할지 마음속으로 새까만 웃음을 흘려댄다.


"다녀올게. 나 없는 동안 외로워하지 말고~"


손으로 키스를 날리니 웩 이라며 고개를 돌리고 뭔가 욕을 중얼거리는 것이 역시 도도하고 멋지다.


후끈한 여름밤의 열기가 안 그래도 뜨거운 머릿속을 데워준다. 아까 마셨으니 얼마나 기다려야 약효가 돌지 생각하며 조용히 집 근처 공원으로 걸음을 옮긴다. 애초에 친구를 만난다는 것 자체는 거짓말이었으나, 뜨거워진 몸을 식히기 위함인지 아니면 오히려 덥히려는 생각인지 맥주를 사서 벤치에 앉는다. 차가운 맥주 캔의 냉기가 손바닥을 지나 머리를 식혀준다. 한 모금 마시니 차가운 열기가 뱃속에서 끓어오른다. 주변에 머릿속까지 열기로 가득 찬 연인들의 신음을 들으며 지금쯤 제 연인이 어찌 되었을지를 떠올리며 비죽비죽 웃음을 흘린다.


다 마신 맥주 캔이 하나 벤치에 덜렁 올려지고 얼마나 지났을까? 전화기에 드디어 연인의 이름이 떠오른다. 마음속으로 10초를 세고 통화버튼을 누르니 곧장 터져 나오는 욕설에 미리 귀에 전화를 가져가지 않은 선견지명에 자화자찬한다.


"야! 이 개새끼야! 무슨 짓을 한 거야!"


욕설 중간마다 뜨거운 숨소리가 섞여 있는 것이 참 듣기 좋구나 하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댄다.


"무슨 일 있어?"

"당장 집으로 돌아와! 안오면 죽여버릴 거다! 시발!"


몸이 제법 달아올랐지 말 중간마다 숨소리와 작은 신음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져온다. 그렇지만 상처받은 남자의 자존심은 아직 부족하다 외쳐대고 모처럼 주도권을 잡았으니 즐겨보리라 마음먹는다.


"이런 어쩌나? 애석하게도 이미 버스를 타서 말이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잘해봐."

"이 좆같으"

뚝.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자존심상 다시 전화를 걸어올 리는 없으니 여유롭게 다른 맥주 캔을 깐다. 한 캔을 비우고 곧장 또 다른 캔을 비워갈 때쯤, 처음 전화를 끊고 한 이십 분 정도 지났으려나? 다시 전화에 연인의 이름이 떠오른다. 그 높던 자존심마저 꺾고 걸어온 것으로 생각하니 곧장 받고 싶어지지만 애써 마음속으로 시간을 세어간다. 평소의 파피루스라면 20초 내로 안 받으면 그냥 끊어버렸는데 과연 이번에는 몇 초나 기다려줄지?

19..20..21..22.. 처음으로 20초가 지났음에도 끊기지 않고 울리는 전화벨에 척추를 타고 승리감이 올라온다. 쪼잔하다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소소한 부분이 늘 불만이었으니.


놀라운 신기록! 무려 1분이 지났음에도 전화는 계속해서 울려댄다. 슬슬 사소한 승리에 만족하고 전화를 받으니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신음이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온다.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니 헐떡이는 소리에 아랫도리가 뻐근해진다.


"흐..하..제발..개새끼야. 집으로 와줘. 나,나좀 어떻게 해줘 제발.."


말 너머로 질척한 소리가, 제발이라는 애원이 박살 난 자존심을 기워 맞춰주고 다 마신 맥주 캔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친 듯이 뛰어대며 집 앞에 도착해서 숨을 고르며 뛰어온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옷매무새를 매만지고 처음으로 파피루스와 몸을 섞기 직전보다도 뛰어대는 심장을 달래서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문지른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문에 열쇠를 넣고 돌린다. 손이 얼마나 떨리는지 얼마나 긴장했는지 열쇠 구멍 주변에서 미끄러지는 열쇠에 무슨 총각 딱지도 못 뗀 동정같이 구는 게 웃겨 피식 웃음을 흘린다. 불이 켜진 채 아무도 없는 거실, 소파에서 굴러떨어진 쿠션을 지나 굳게 닫힌 파피루스의 방문 앞에 선다. 똑똑. 작게 노크를 하고 대답을 기다리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니 부드럽게 열리고 불이 꺼진 방에 불을 켠다.

내가 돌아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 도도하던 얼굴을 붉힌 채 침대 위에 뒹굴고 있는 연인을 본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려는 것을 붙든다. 불이 켜졌음에도 주변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는 것인지 그저 잔뜩 흐트러진 시트 위에 그보다 더 흐트러진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잔뜩 벌어진 입에서 흘러내린 타액이 턱을 적시고 부정확하게 뭉개진 말이 토막이 나 떨어져 내린다. 자기 손으로 골반을 긁어대고 쑤셔대는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욕정에 정신이 팔린 모습이 아름답다. 그 와중에도 떨어트리지 않은 휴대전화가 한 손에 꽉 쥐어진 채로 자신의 욕망을 억지로 달래려는 모습이 기특하기 그지없다.


바로 옆까지 다가가 평소라면 질색할 머리를 쓰다듬는 것에 풀린 눈이 드디어 나를 바라본다. 뜨겁게 타오르는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과 이미 풀려서 눈물로 젖은 눈이 마주친다. 그제야 쑤셔대던 손을 빼내고 질척하게 젖은 손으로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헐떡이는 것이 지금 당장에라도 달래주고 싶지만 쪼잔하기 그지없는 마음이 조금 더를 외쳐댄다.


능글맞게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기만 하니 힘이 빠진 몸을 억지로 일으켜 나를 붙든다.


"무슨 일인 가했더니 발정이 난 거였어?"


빙그레 웃으면서 허리를 감싸 안아주자 풀린 눈이 아주 약간 찌푸려졌지만 이내 자신의 얼굴을 감싸주는 내 손에 풀린다.


"개새끼야 으흑..제발..어떻게 좀 해줘. 죽을 거 같아."


흐느끼듯이 힘이 빠진 채로 휘청이는 몸을 내게 전적으로 기대오며 간절하기 그지없는 말을 내뱉는다. 입이 간질간질하고 척추를 깃털로 문지르는 듯한 기분에 참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핥으며 작게 속삭였다.


"개새끼라니..부탁하는 주제에 너무 콧대가 높은 거 아니냐? 좀 더 고분고분해져 보라고."


멍하니 풀린 눈으로 바라보던 파피루스의 얼굴이 분함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구경하는 재미가 생각보다 쏠쏠하다. 그 높은 자존심으로 제발이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평소에 고분고분하던 내가 이렇게 통수를 칠 줄은 몰랐으리라. 약효 때문에 몽롱한 정신에도 이번에 순순히 원하는 대로 해주면 앞으로도 골치아파질 것을 눈치챘는지 입을 콱 다물어버린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몸을 내게서 떼어내려고 힘없는 몸을 애써 비틀어보지만, 오히려 작은 마찰에도 거대한 쾌감이 머릿속을 메워가는지 다문 입안으로 작게 신음소리를 흘려낸다.


"어려울 거 없잖아? 그냥 다정하게 자기야 라던가 음..아니면 제발 박아주세요? 그래 이거 좋네! 자, 박아주세요 해봐."


"우, 웃기지마! 네놈이 이렇게 만들, 히익!"


고분고분하지 못한 태도에 슬쩍 척추를 쥐여주니 곧장 신음을 흘리며 애써 떨어트리려 한 몸이 품 안으로 쓰러져내리다. 몇 번이고 섞고 맛본 몸이니 어디가 약한지 어딜 만지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뻔히 알기에 조금씩 지분거리자 자존심에 대놓고 앙앙거리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매우 만족스럽다.


비싸던 약값이 전혀 아깝지 않은 모습에 영상으로라도 남기고 싶지만, 나중에 맞아 죽기는 싫으니 눈을 부릅뜨고 빨개진 얼굴을 풀린 눈을 흘러내리는 타액을 기억해둔다.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는데 가지도 박아주지도 않으니 미칠 거 같아하는 게 뻔히 보이는 데도 자존심을 세우는 모습에 또 한 번 반해버릴 것 같다.


"다...닥치고 빨리 박아!"


자존심을 세워가며 강하게 말하는 그지만 이미 풀린 눈에 겁먹을 리가 없지. 히죽거리며 그저 골반을 쓸어주기만 하니 애탈 대로 애타서는 옷자락을 찢을 듯이 쥐어온다. 어깨 위에 머리를 올리고 헐떡이다가도 드디어 참다 못했는지 귓가에 버럭 소리를 질러온다.


"이, 씨발새끼야! 그냥 박으라고! 네 자지로 미친 듯이 처박아달라고!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일그러진 채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얼굴을 마주 보니 확실히 장난이 지나쳤던 건지 맑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자존심을 세우고 있던 게 어느 쪽인 깨닫고 양심에 가책이 마음을 이곳저곳 쿡쿡 찔러댄다. 바지를 풀러 내자 이미 옛날에 설대로 선 아래에서 투명하게 액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질척한 골반에 대고 단번에 집어넣자 그것만으로도 참고 있던 연인이 아무 소리도 못 내고 가버리는 것에 오히려 죄책감이 늘어난다. 부드럽게 골반을 그러잡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자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뜬 파피가 팔을 목에 둘러온다. 미안함과 사랑스러움으로 여태껏 해온 그 어떤 정사보다도 부드럽고 다정하게 안쪽을 휘저어준다.


신음소리 너머로 작게 귓가에 파피루스가 속삭여준다.


"씨발새끼야. 사랑한다."


그 한마디에 서러웠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고 빙그레 웃으며 키스를 나눈다. 혀와 혀가 얽히고 길게 실을 늘어트리며 떨어지는 것을 아쉬워한다.


"나도, 사랑해. 파피루스"


꽉 끌어안고 안쪽 깊이 토정 해 골반과 침대를 잔뜩 더럽힌 뒤에 기분 좋은 허탈감에 침대에 푹 늘어진다. 이제 좀 쉬려나 싶던 찰나, 약효가 떨어진 것인지 어느 정도 힘이 돌아온 파피루스가 위에 올라타서는 사납게 웃는다. 아하하 하고 웃으며 어색하게 용서해주는 게 아니었느냐 물으니


"사랑하는 거랑 이따위 장난질 치는 건 별개의 문제지. 개새끼야 오늘 어디 한번 죽을 때까지 떡 쳐보자고"


밤은 길고 용서받긴 먼 거 같다 느끼며 골반을 잡아 허리를 짧게 올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