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스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둘러싼 벽돌들을 보고 있자니 한층 의지가 사라졌다. 폐허에서 깨어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갈 곳이 바로 떠오르지 않자 프리스크는 자신의 앞에 쌓여 있는 붉은 낙엽 위로 자연스럽게 몸을 뉘었다. 낙엽들은 생각보다 푹신하였고 낙엽 냄새를 맡고 있자니 프리스크는 나른해졌다. 다음 기면까지 이대로 누워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았다. 스멀스멀 밀려오는 졸음에 프리스크는 눈이 감겨왔다.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무언가 언뜻 보이는 듯했다. 여기에서 잠들만한 괴물이 있었나, 하고서 프리스크는 몸을 반쯤 일으켜 어둠 너머를 응시하였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노란 꽃 플라위.
프리스크에게 있어 처음 보는 괴물(잠들어 있는 상태의)이란 몇 안 되는 흥밋거리였다. 몸을 일으켜 평소보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플라위 앞에 프리스크는 도착하였다. 살짝 그을린 플라위를 내려다보며 너도 별 수 없구나 하고 생각한 프리스크는 조소하였다. 모든 걸 아는 것처럼 구는 플라위조차 '내가 깨어나면 모두 잠든다'는 프리스크의 이론에서 예외일 수 없던 모양이었다. 프리스크는 플라위의 꽃잎을 만지작거리며 따지고 보면 이 녀석은 식물인데 깨어 있어야지 않나? 의문이 들었다. 스치는 생각들을 웅얼이던 중 손끝에 감촉이 달라져 고개를 갸웃하는데 플라위의 눈이 떠졌다.
* ...뭐하는 짓이야.
친절의 알갱이 받고 싶어?
플라위가 말을 하네. 말하는 꽃 플라위. 플라위가 말을 해? 플라위의 주변에 새하얀 알갱이가 떠다닐 때까지도 프리스크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눈앞의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해 날라오는 하얀 알갱이들을 반사적으로 피해내고서야 정신이 돌아왔지만 프리스크가 잎을 놓는 순간 플라위는 순식간에 땅속으로 꺼져 사라졌다. 뒤늦게 플라위를 불러보았지만 플라위는 오지 않았다. 홀로 남겨져 플라위가 사라진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던 프리스크는 또다시 무기력해졌다.
RESTTALE
EPISODE 1
FRISK
잠든 토리엘에게 기대어 프리스크는 생각에 빠졌다. 플라위는 분명 다른 괴물들처럼 잠들었던 게 분명했다. 잠든 괴물들을 감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막, 플라위 역시도 분명 그것에 감싸져 있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그 막이 사라졌고 플라위는 깨어났다. 프리스크는 토리엘의 등을 만져보았다. 미세하게 진동하는 표면, 힘을 가하면 그만큼 프리스크의 손을 튕겨내려고 했다. 프리스크는 문득 아직도 자신이 무언갈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플라위가 깨어났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P는 돌아올 것이고 모든 게 반복되겠지. 자신은 언제까지고 잠든 도시를 방랑할 것이다. 프리스크는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깨어난 프리스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며 다음갈 곳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토리엘의 집에 책들이 제법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잠들어있는 괴물들을 평소처럼 지나치며 프리스크는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들을 따라 빠르게 퍼즐들을 풀어갔다. 돌을 움직여야 하는 퍼즐에선 잠들어 있는 윔선으로 대체하느라 시간이 지체되기도 했지만. 냅스타블룩을 밟고 지나온 것을 못내 미안했지만 프리스크는 자신은 막을 밟은 것뿐이라고 스스로 변명하였다.
집에 들어선 프리스크는 책 한 권을 들고 토리엘이 항상 앉아있곤 했던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새로운 책을 읽는다는 것만큼 프리스크에게 즐거움을 주는 건 없었다. 그것이 비록 달팽이와 관련된 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프리스크는 폐허에서 P가 사라지는 일은 오늘이 아니면 없을지도 몰랐기에 저 책들을 전부 읽고 싶었다. 하지만 P가 평균적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고려했을 때 그 안에 저 책들을 다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가능할지도 몰라. 프리스크는 자신의 일지들을 보관해두는 도서판의 책장 뒤편을 떠올렸다. 그곳에 둔다면 P가 돌아왔을 때 복귀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길에서 주웠던 물건들도 그랬으니까.
할당된 시간을 전부 할애해서라도 책들을 옮기기로 마음먹은 프리스크는 책들을 갑옷처럼 둘러 장비하는 등 최대한 많은 책을 소지하였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가 스노우딘을 향하는 데 눈앞에 플라위가 나타났다. 원래의 여유로운 표정이 아닌 복잡한 기색의 플라위는 대뜸 프리스크의 복장에 대해 지적하였다. 프리스크는 마음이 급했기에 플라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플라위가 하얀 알갱이를 날림으로서 그 행동은 저지되었다.
* 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는 거니?
프리스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이 책을 옮기는 것을 돕는다면 가르쳐주겠다고 말하였다. 플라위는 싸움에서 지는 것보다도 더한 굴욕을 당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조롱을 일삼던 플라위의 낯선 얼굴을 짧게 감상한 프리스크는 그런 플라위를 뒤로한 채 스노우딘으로 향하는 문으로 걸어갔다. 다시 그것을 막을 것처럼 주변에 하얀 알갱이를 띄웠던 플라위는 이내 그것들을 거두고 프리스크의 뒤를 일정한 거리를 두며 쫓았다.
모든 책을 옮길 때까지 프리스크와 플라위 사이에서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고된 일을 마치고 프리스크가 지친 몸을 책장에 기대었을 때에서야 플라위는 임시로 만든 흙더미 위에서 언제 얘기해주냐며 말을 걸어왔다. 프리스크는 조금 쉬고 나서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플라위가 닦달을 하는 통에 그럴 수 없었다. 프리스크는 책장 안쪽으로 토리엘의 집에서 가지고 온 책들을 채워 넣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이곳에 떨어지고부터 시작된 P와의 관계에 대해서.
* P가 나타나면 너는 잠들고 괴물들은 깨어나고, P가 사라지면 너는 깨어나고 괴물들은 잠든다는 거야?
프리스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실 깨어난다는 표현보다는 주도권을 되찾아온다는 말이 더 적절했지만 프리스크는 플라위에게 굳이 말해주지 않았다. P가 나타났을 때의 일들을 꿈에 비유하는 게 버릇인지라 앞으로의 설명에도 이 같은 표현들을 무의식적으로 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해를 다르게 할지도 몰랐기에 P가 나타났을 때의 일들을 기억한다고 덧붙였다. 플라위는 생각에 빠졌고 그사이 프리스크는 접신을 한다면 이렇지 않을까싶어져 P의 정체에 대해 오랜만에 고찰하였다.
* 그렇다면 P는 언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플라위가 물어왔고 보통 8시간 정도 뒤에 돌아오는 편이라고 프리스크가 대답해주자 플라위의 표정이 썩 좋지 않게 변하였다. 가장 늦게 온 날이 언제냐는 자신의 질문에 프리스크가 10시간을 넘긴 적은 없다고 대답했을 땐 거짓말하지 말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프리스크는 당황하여 플라위에게 대체 뭐가 문제냐고 물었다. 플라위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신경질적으로 말들을 쏟아냈다.
* 네가 폐허에서 잠들어 있던 시간이 10시간은 족히 됐어.
책을 옮기는 덴 몇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해?
그리고 나는 어째서 깨어난 거지?
문제가 생긴 거야, 뭔가...
프리스크는 플라위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일들이 반복됐는지와 그 과정에서 있었던 미미한 변화들을 말해주며 이 상황 또한 그 일종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처음엔 들으려고 하지 않던 플라위였지만 프리스크가 포기하질 않자 어느 정도 가라앉은 모양인지 말들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프리스크의 말이 끝나자 플라위는 여전히 불안정한 목소리로 자신이 왜 이렇게 걱정하는지에 대해 토로하였다.
* 네가 잠들어 있을 때 폐허 안을 둘러봤어.
모두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봤을 때 처음엔, 몰라, 좋았던 거 같아.
하지만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깨어나지도 건들 수도 없단 걸 알았을 때...
이런 걸 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어.
하지만, 나 때문인지도 모르고...
당장에라도 울 것처럼 잎을 축 늘어트린 플라위의 잎을 잡아주며 프리스크는 P는 돌아올 것이고 괴물들이 깨어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프리스크의 말에 애써 웃어 보이며 플라위는 어딘가 갈 곳이 있으니 자신을 옮겨달라고 부탁하였다. 플라위가 떠나고 프리스크는 긴 한숨을 내쉰 뒤 도서판으로 다시 들어갔다. 책을 읽다 보면 언젠나처럼 예고 없이 나타날 거야. 프리스크는 자신에게도 전염된 초조함을 애써 떨쳐내며 책을 집고 읽기 시작했다. 프리스크는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처음으로 P를 기다렸다.
* 그러나, P는 오지 않았다.
뉴비 입갤 인사 드림
망갤에 뉴비가? 그것도 문학쟁이?
언하
게임이 꺼진 뒤의 이야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