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손님이 없는 늦은 밤이었다. 문이 열려 고개를 든 그릴비는 들어온 것이 인간이란 것을 알고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인간은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천천히 바테이블 쪽으로 다가오더니 그릴비의 정면에 앉았다. 그릴비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잔들을 닦는 데 열중했다. 인간은 테이블 위를 검지로 톡톡 치면서 아무말 없이 그릴비를 응시할 뿐이었다. 침묵이 주는 압박감에 그릴비는 숨이 막힐 거 같았다.


* 술.

* ...?

* 술 말이야.

  아무거나 독한걸로.

잘못 들은건가 싶어 그릴비가 쳐다보자 인간은 뭐가 문제냔 식으로 주문을 반복하였다. 그릴비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이성과 자신이 겪고 있는 일들로 인해 혼란스러운 나머지 술을 따라주고 말았다. 인간은 술을 곧바로 마시지 않고 잔을 든 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용물을 관찰했다. 내부의 조명에 비추었다가 빠르게 흔들어 그 안에서 휘몰아치는 작은 회오리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마치 장난감처럼 잔을 다루었다.


* 술을 마시는 인간치고 제대로 된 놈은 없어.

  괴물들은 어때?


흥미를 잃었는 지 잔을 내려놓은 인간은 대뜸 그릴비에게 말을 걸었다. 바에 와서 하기엔 황당한 말이었지만 그릴비는 침착하게 꼭 그렇지는 않은 거 같다고 대답했다. 인간은 그렇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대답이 석연치 않았는지 테이블을 발로 쿵쿵 찧었다. 허공을 응시하며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던 인간은 돌연 고개를 돌리더니 그릴비를 한차례 슥하고 훑어보았다. 그릴비는 인간의 그런 행동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 그러고보니 말도 하네, 너.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에 그릴비의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인간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하도 말이 없어서 벙어리인 줄 알았다는 둥, 이것 저것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을 늘어놓더니 어느 순간 무언가에 대해서 푸념하기 시작했다. 생략되는 주어들로 인해 이해가 잘 되질 않았지만 잠차고 듣고 있던 그릴비는,


* 기생충같은 것들, 누군가는 없애줘야겠지?


뜻모를 인간의 말에 소름이 끼쳤다. 인간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느낀 그릴비는 잔을 닦고 또 닦았다. 잠시 뒤 인간의 입에서 큰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뭘그렇게 긴장하냐며 자기는 댁한테 관심 없으니 오해하지 말라는 식으로 그릴비에게 말한 인간은 의자위에 일어섰다. 갑작스런 행동에 그릴비가 고개를 들자 인간은 싱글싱글 웃더니 술잔을 들고 단번에 들이켰다. 인간이 그대로 고꾸라진 것은 그로부터 몇초 뒤의 일이었다.


* ...인간?


뭔가 바뀐거 같은 이질감에 잠시 멈칫하다가 그릴비는 쓰러진 인간을 떠올리고 급하게 테이블 앞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인간이 있어야 할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릴비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간이 있던 자리는 마치 아무도 오지 않은 것처럼 깨끗했다. 문이 발칵하고 열렸다. 인간은 아무렇지 않게 들어오더니 테이블에 돈을 지불하고 나가버렸다. 아무도 없는 바에 그릴비만이 혼돈 속에 남겨졌다.






그릴비가 시간선을 기억하는 만화에 챠라를 끼얹나

문제시 자삭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