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침묵을 평화라 불러야 한다면, 지하 눈 쌓인 이곳은 전에 없던 평화에 휩싸여 있는 것이리라.

숨죽인 이 곳. 매일 살의를 불태우던 상대 중 하나, 작고 어린 하나가 장난스런 절대자의 모습으로 강림했을 때, 자신들이 믿고 불려오던 힘이 사실은 종이짝보다 얄팍한 것임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명예롭고 당연한 죽음과 치욕스럽고 당연한 도피를 누구나 마음 속에서 저울질하던 그 때. 찾아온 갑작스러운 평화.
얼떨결에 이루어진 휴전 협정, 무슨 조건이 붙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만 때때로 바람을 따라 고였다 흩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강줄기를 따라 난 외길을 막아선 당당한 경비대장의 앞에서, 장렬한 몇 합의 전투 끝에 인간이 마음을 꺾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더하여 경비대장이 인간을 데리고, 덤으로 구경중이었을 제 형제까지 끌고 스노우딘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몇몇 괴물들의 증언이 더하여져, 그 풍문은 꽤 신빙성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한 가지,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인간을 잡은 거냐고 묻자, 경비대장이 날카로운 눈을 더욱 날카롭게 구겨 가며.
"아니, 잡힌 거지."
라고 알 수 없는 대답을 남긴 뒤 입을 닫아버렸다는 말 만큼은 그저 대장의 위업을 질투한 누군가가 끼워 넣은 것이라 믿어지고 있었다.
진실은 그 셋 외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지만. 진실은 머나 현실은 가까워 온 지하는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느린 걸음으로 착실히. 일상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애도조차 하지 않는, 죽음에 익숙해진 세계다운 일이었다.
허나, 도살의 흔적을 제 영혼의 깊이에만 새겨둔 채 볼 밝히며 웃는 절대자. 예고 없이 어딘가에 불쑥 고개를 디미는 그 존재의 이물감마저 일상이라는 것이 눈처럼 덮어안을 수 있을지는. 그들에게도 의문이었다.
그래도 여기는 감옥 그 자체인 이 세상. 모두가 불안 짙은 기원으로 바라다볼 뿐인, 기적 같은 평화를.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마냥 조용할 수만은 없었다.
가장 작은 목소리는 왕실 근위대의 절반이 죽어나가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드리무어 왕가에 대한 지탄이, 그보다 조금 더 크게는 인간의 꽁지에 들러붙어 뒤를 닦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는. 눈에 거슬리는 땅달막한 뼈다귀에 대한 모욕이. 그보다 더욱 크게는. 인간에 대한 호승심 혹은 드물게 복수심으로 불타 앞뒤 가릴 것 없이 달려드는 불나방들의. 결국 죽지 않을 만큼 당하고 난 뒤에 떨떠름한 자비로 방생되는 나약한 괴물들의 목소리가 스노우딘의 평화 아래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늦은 밤. 아니 새벽 가까울 때, 세상 모든 상황과 진실을 압축해 담고 있는 이층 집. 경비대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소파에 푹 눌러앉아 텔레비전의 푸르스름한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같은 레퍼토리. 살인과 방화와 폭력.
그 에너지 넘치고 사나운 세 줄이 이렇게 몇 시간이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을 누가 본다면. 분명히 제 눈을 세 번쯤 의심하다가 돌아서리라. 탁자 위에 남겨진 스파게티 한 접시를 두어 번 바라보다 마는 파피루스는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점점 귀가가 늦어지는 망할 똥자루를.
지금도 지하 어느 한 구석에서 인간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어찌되었든지 형. 한심한 밥버러지를 살려둔 보람을 이제서야 찾게 된 동생의 기다림은. 형에 대한 걱정이 아닌 부하가 맡은 바를 제대로 해내고 있는지 감시하고 살펴보아야할 의무라고 스스로에게 이름붙였다.
"XX!! 이러다 진짜 밤이라도 새겠네!!"
그래도 공연히 텔레비전만이 떠드는 빈 거실에 소리를 질러 봐도 소용은 없다는 것 쯤이야 알고 있는 그는.
그저 반복되는 며칠 간, 멍하니 있을 때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움직임으로 피하더니 목을 겨누고 베어내리다 멈춰서서는. 그대로 웃으며 속삭이던 악마의 눈빛이. 안광이 반사되어 이글거리는 붉은 색으로.
"맘 같아서는 이거. 끊어놓고 싶은데."
속삭이고는 이내 미소 지으며.
"그러면 샌즈가 슬퍼할 거니까, 그만둬 줄게."
지껄이는 그 모습이. 그딴 쓰레기 덕에 목숨을 부지하였다는 굴욕감이. 더럽고 비겁한 안도감이 불쑥 솟아나 별 것 아닌 일에도 소리를 질러. 그저 떨쳐내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래 목청이 크고 소리를 잘 지르는 편이었기에, 아무도 그의 동요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뻔한 껍데기. 평화의 아래에서 요사이 제 기를 못 펴고 있기는 하다만 소리지르는 일은 천성이었는지 조금 속이 가벼워진 길쭉한 뼈다귀는. 뻔한 광고 사이, 슬슬 조금만 더 있으면 못 먹게 될 스파게티를 버리려고 몸을 일으켰다. 달그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휴.."
손에 든 접시를 도로 탁자위에 올려놓고 일어나, 형식적이지만 극진한 대접으로 마중나가 문 앞에 서면. 문고리를 잡고 선 작은, 왠지 구부정하니 더 작아진 뼈다귀 하나가. 벽 앞에서 잠시 멍하니 앞만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다. 억지로 웃어 보인다.
"어서 와."
"헤, 이거 XX 황송해 돌아가시겠네."
"입만 산 XX가. 누가 볼라. 얼른 들어와."
"알았어 대장."
말은 평소대로 더러우면서도, 끝에 기운이 빠져나가 흐늘거리는 모습에 습관적으로 코웃음을 치자. 답지않게 차가운 눈빛이 쏘아보다가. 그마저도 꺾이어 내려간다. 마치, 이런 데 소모할 에너지도 모자란다는 듯이. 장난감 병정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선 제 동생을 스치어. 곧장 소파 위로 올라가 쓰러지듯 눕더니 바로 움찔거리며. 차마 못 참는 비명을 갈린 이 사이로 내뱉는다.
"하.. X.. XX..."
한참 이어진 몸을 비트는 신음소리의 끝에는 제 성질을 못 참은 욕지거리가. 제 청중이라고는 방관하는 대장밖에 없기에 그의 귀를 진로로 삼아 꽂혀 들어간다. 마음 같았으면 경비대장은 한 다섯 대쯤, 버르장머리 없기 짝이 없는 언행을 바로잡기 위한 발길질을 저 얇은 옆구리에 선사했겠다만.
"닥처, XX야."
인간이 그의 형제를 불러내기 시작한 요 며칠, 그 짧은 시간을 지나며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이것이 먼지가 되어버리면 뒷 일이 참으로 곤란하였기에. 곧 인간을 잡은 공로로 왕실 근위대장이 되실 몸의, 각별한 분별력은 욕지거리 한 마디로 싼 값에 무례에 대한 값을 돌려주고 말았다. 허나 몸을 비틀며 끊임없이 신음과 기침섞인 것을 흘려보내는 작은 뼈다귀의 금속성 발작이 멈추는 데에는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 대장의 관용은 당연히 귀에 닿지 않았을 것이었다.
"배는, 안 고프냐?"
그런 형에게, 동생은 순전히 제 임무를 위하여 당부받은 대로 물었고.
"헤, 이것저것.. 먹은 게 많아서."
저도 모르게 흘린 것을 소파 등받이 너머로 몰래 훔치는 형은. 오늘의 메뉴를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대답하였다. 잠시, 그 형제의 집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용함이 깔리고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신음이 몸을 일으킨다. 일단은 씻고 싶다고 중얼거리면서. 그의 몸짓은 간단한 동작에도 수 없이 삐걱거려, 그 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긴 뼈다귀의 신경을 긁어 나간다.
"오늘은 인간이랑 무슨 짓을 한 거냐?"
"뭐야, 대장. 이젠 왕실에 그런 것까지 보고해야 하는 거야?"
"아니, 네 목 좀 봐봐라 XX야."
"아."
그제서야 줄 채로 매달려 있는 둥근 굴레를 발견한 얼굴에. 근원 모를 식은땀이 쏟아내린다. 가죽의 단단한 감촉을 느끼지 못하는 그는 확실히,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XX. 티나 내지 말고 다니든지."
"하.. 하아. 젠장맞을."
헤진 손가락이 유달리 얇고 가는 목을 단단히 조이는 목걸이를 뜯어내려 애를 쓴다. 다급한 마음에 제 목덜미를 긁어가며 헛 손질을 몇 번 하고서야 벨트가 달린 부분을 찾아낸 그는 목 졸린 숨소리로 그것을 풀어 해치더니.
"이 개자식."
누구에게 하는 욕인지, 숫제 바닥에 그대로 내던져버렸다. 그 팔을 휘두르는 몸짓. 거기에 제 나름대로의 마지막 자존심이 있다는 듯이. 당황한 식은땀은 지우지 못하였으나 사뭇 비장한 얼굴로. 그대로 일어서서 비틀비틀, 이 층에 있는 욕실을 향해 발을 끌기 시작하였다. 말없이 그 모습을 조소하다가 본디 제 것이었던 소파 위로 돌아가. 다리를 꼬고 앉으려 하는 동생에게.
"대장. 준비는. 잘 돼가는 거야?"
형은 갑자기 뒤돌아 물었고. 동생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몇 번 반복되었던 대답을 물린다.
"어, 거의. 오늘이나 내일이면 돼."
"XX.. XX 늦네."
"버틸 수 있냐?"
".... 나도 몰라. XX."
나날이 강도를 더해가는 그만의 지옥, 하루나 이틀이라는 시간이 줄 괴로움을 머릿속에 그리다. 이내 그만두었다. 두개골 속에는 지금은 온몸에 남은 찝찝함을 씻어내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의 힘이 더 강하였기에. 일단은 움직인다. 한 발짝 한 발짝, 금빛 이 사이로 질질. 잡스러운 소리를 흘려가며.



형이 욕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내패겨쳐진 목줄을 잘 감아 갈무리해 둔다. 거센 물소리가. 그리고 그것을 거칠게 첨벙대는 소리가 저 문 뒤편의 상황을 알게 한다. 아까전부터 의미 없는 전파만을 송출하는 텔레비전은 꺼 두고. 한결 컴컴해진 제 자리. 소파 위로 돌아와 앉는다. 눈을 감고 조용히 웃는다, 만족감에.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시간이 이만큼 걸린 것도 자격을 가진 여섯을 추려내기 위한 것일 뿐. 날이 밝고 항상 하던 대로 그런 것처럼, 코어에 도착하면.
파피루스, 그는 강해질 것이다.
이번에는 지난 수치를 씻을 것이다. 제 손으로 인간을 잡아 죽이고, 그 야들야들하고 생생한 살을 한 입 베어 물어 뾰족한 이에 물들일 것이다. 괴물 중의 괴물이 일곱이 될 것이고. 복수의 전쟁은 시작할 것이다. 모두가 오랫동안 꿈 꿔 왔던대로.
갑자기 이층에서 들리던 참방거리던 물소리가 뚝, 멈췄다. 파피루스는 한숨을 쉬면서 욕실로 향한다. 다소 결벽적인 그의 성향상 소리는 자연스러운 것이나 침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는그 침묵의 의미를 배웠기에. 그대로 힘주어 욕실 문을 열어 젖혔다.
작은 뼈다귀의 나신이 욕조 안에 오롯이 담겨 있다. 미동도 없는 그는 보기 드물게 평온해 보인다.
한갖 말단 병사의 하나의 자유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시간.
이것은 아주 싸게 먹히는 장사. 쥐어준 노리개를 잘 갖고 노는 것이 역시 어린애 다워 유치하다. 그 인간의 태도 변화를 보면. 어쩌면 살육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오한이 들지만 그 오만함도 여기까지.
장갑을 벗어 둔 오른손이 우악스럽게 해골의 뒷덜미. 가죽 목줄에 쓸려 흠집이 난 목뼈를 들어 올렸고, 용케 잃은 곳은 없으나 군데군데 이 빠진 몸이 물 밖으로 건져 나와 애처롭게도 매달렸다.
"XX.. 약해 빠져서는. 일어나."
투덜거리며 잠든 이를 불러보고 흔들어 보지만 부르는 소리에 대답은 없고, 감지 못한 채로 텅 비어 제 속을 드러낸 눈구멍. 아래를 향한 눈구멍에서 가득찬 무언가가. 영원인 듯, 쏟아져 내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졸도한 거냐? XX. 가지가지 하네."
늘 잠자던 보초병에게 하던 대로 한 두 대, 쥐어 박아 정신을 깨우려 들던 그는. 마음을 바꾸어 잘 가시지 않는 물기를 마른 수건으로 대충 닦아 침대 위에 데려가 누인다. 지금 그의 몸은 인간에게 넘겨준 것이었고. 내일이면 자유로워지는 동시에 정말로 쓸모 없어질 몸이었기에.


숨소리 하나 없는 희생양의 옆을 잠시 지키다 떠나는 파피루스 대장은 평화 없는 날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