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갤문학/단편삽화대회] abused children  에서 이어지는 이야기. 


동펠샌이다.


작중의 당신은 프리스크나 차라가 아님. 그냥 인간이라고 해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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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바람이 분다. 바람결에 흰 꽃들이 날아간다. 품에 안은 꽃들이 흩날리는 것을 조용히 해골은 바라보다 문득 손을 들어 날아가는 꽃잎을 잡으려 한다.




뜨겁던 햇볕이 한풀 꺾여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가을의 공원에 당신은 조용히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꼬마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마음에 꽃이 피는 기분이다. 바람이 조금 차가운가 싶어 뺨을 손으로 녹이려니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연인이 제 겉옷을 건네준다. 빙그레 웃으며 올려다보니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눈에 다정함이 어려있다.


"추우면 이제 들어갈까?"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네 옷 덕분에 하나도 안 추워."


 어께에 두른 팔에 기대어 작게 어리광을 부리니 따듯하게 안아오는 품에 파고든다. 그리고 감은 눈 뒤로 부디 이 시간이 길게 늘어나기를 빈다. 조금 더 자신에게 시간 있기를...하고.


뉘엿뉘엿 해가 붉게 멀어져간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뛰노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당신은 연인의 손에 휠체어를 맡기고 그가 미는 대로 움직인다. 단단히 입은 연인의 외투에 기대 찬바람을 피하면서. 



작은 상아색 병실에 누워 당신은 조용히 과거를 되돌아본다. 아마도 이제 남은 시간은 길지 않으리라.


그리 후회 없는 삶이었다. 짧았지만 나름 행복한 삶이었으니. 다만 어찌해도 남는 걱정이 하나.

여리고 착한 연인이 걱정된다. 당신에게만 의지하고 당신이 곧 삶인 자그만 해골을 생각하면 죽어도 죽지 못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당신없이 그가 과연 잘 살아갈지. 아니, 그저 죽어가는 당신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당신이 없어도 잘 적응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처음 당신이 쓰러진 날을 돌이켜본다. 징조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간간이 찌르는듯한 통증과 극심한 피로는 분명 몸의 이상을 알려왔으나 당신은 쉴 수 없었다. 여태껏 노력해온 것에 대한 보상이 코앞인지라 쉬지 않고 계속 달리던 당신의 몸은 결국 한계에 도달했다. 밤늦게서야 일을 마치고 이미 잠든 연인에게 키스하고 누운 평범하던 그날. 자그만 몸을 안고 잠이 들었던 마지막 일상.



평소보다 늦은 시간까지 잠들어 있는 당신을 깨우지 않고 샌즈는 조용히 아침 식사를 준비해둔다. 요즘 계속 지쳐 보이던 당신을 위하여. 따끈하게 김이 오르는 밥을 공기 가득 퍼 담고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당신을 깨우고자 샌즈는 침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당신을 깨우려던 찰나 뭔가 이상하단 것을 눈치채고 경악해서 빠르게 구급차를 불렀다.


정말 끔찍한 고통이었다. 칼로 배를 도려내는 듯한 고통 속에서 입 밖으로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시간. 그저 빠르게 샌즈가 당신을 발견했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강한 진통제에 취해서 응급실에 누워있는 동안 머릿속으론 온통 오늘 하루 미룬 만큼 내일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쉴 생각 대신 일할 궁리를 해댔었다. 그게 얼마나 쓸데없는 생각인지도 모르고.



별거 아닌 일이고 통증도 가셨으니 돌아가겠다는 당신을 붙들고 샌즈는 강하게 주장했다. 검사를 받아보자고. 걱정된다고. 울먹이는 그를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온갖 검사를 받는다고 넓디넓은 병원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별일아닐거라고 쓸데없이 이런 데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한숨만 내쉬는 당신을 샌즈는 위로하며 혹시 모르니까 하루 정도는 쉬는 게 좋다고 달래주었다. 두어 시간쯤 지나 Ct 촬영 결과가 나왔다 하여 잠시 응급실을 떠나 진료실에 들어가 검사결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X-Ray 검사와 Ct 촬영에 보이는 하얀 덩어리 두 개를 짚으며 말하기를


"조직검사는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좌측의 11㎝ 우측에 8㎝ 정도의 종양이 두 개 발견되었습니다."


그뒤의 말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종양. 암. 그 두 단어가 머릿속을 새까맣게 뒤덮은 채로 비틀비틀 걸어나와  의자에 앉아 기다리던 샌즈가 말 거는 것도 모른 채 그저 털썩 주저앉는다. 


'아닐 거야..이건 꿈이지?'


머릿속이 복잡하게 까맣게 물들었다가 별것 아닌 희망에 확 트이고 어두워지길 반복한다. 걱정스레 당신을 붙들고 무슨 일이냐 물어오는 샌즈의 목소리마저 그 순간은 거슬린다. 버럭 화를 내려다 문득 눈에 들어온 그의 모습이 어제보다 지치고 힘들어 보인다. 마음을 새까맣게 태우면서 기다려줬단 게 뻔히 보여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그를 안고 그저 괜찮을 거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그리고 당신은 마음은 공포로 서서히 물들어간다.


조직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집에서 쉬기로 한다. 그동안 바쁘게 일하느라 쓰지도 못하고 쌓아둔 휴가를 끌어다가 한 번에 써버린다. 화단에 조금 시든 꽃들에 물과 영양제를 준다. 샌즈는 그저 당신이 피로로 쓰러진 걸 거라 믿고 있다. 그저 당신은 웃어준다.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게 믿기로 한다. 그게 얼마나 의미 없는 믿음인지 알면서도.



결과는 참혹했다. 이미 손을 쓰기도 늦은 상황. 조금 더 몸에 신경을 써야 했다는 의사의 무감정한 동정.  무심한 그 말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간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 왜 하필 지금. 왜 내가? 머릿속이 새까만 진흙으로 뒤덮인다. 무슨 정신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휘청이는 발걸음을 옮길 뿐.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어딘지도 모를 거리를 그저 헤매고 있었다.

이미 늦어버린 제 몸도 모르고 아등바등 꿈 하나 이뤄보겠다고 이 악물고 달린 시간이 허망하고 겨우 꿈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순간에서야 사형선고를 받은 게 처참하기만 하다.

샌즈가 기다릴 텐데...


보라빛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샌즈. 당신만을 바라보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가 과연 당신이 사라지면 버틸 수가 있을까?


아니.당신이 곧 죽으리란 걸 알고 과연 괜찮을까?

죽음을 눈앞에 둬도 걱정은 사라지질 않는 모양이다.

짧지 않은 고민 끝에 일단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아직 자신조차 마음의 정리가 안 되어있어 울어버릴 것만 같아 조금만 미루자고. 그렇게 마음먹는다.

사실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 같은 게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생기지 않겠지만 인정하기엔 너무 이른 것이다.


아무일 없었다고 그저 피로 때문에 그런 거였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당신은 연인을 달래주었다. 믿는 것인지 아닌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꼭 안아주는 작은 품에 마음이 쓰라리다. 사실 이대로 붙들고 죽고 싶지 않다 울부짖고 싶다. 공포가 마음을 새까맣게 태우려 든다. 그렇지만 도저히 입을 뗄 수가 없다.


얼마남지 않은 시간에 아쉬워하며 당신은 신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회사에는 사표를 내고 인수인계를 하는 동시에 공기가 좋고 한적한 시골에 작은 집을 알아보고 다녔다. 샌즈는 당신의 변화에 크게 당황스러워했지만, 건강과 요양을 위해 좀 쉬어야겠다는 말에 쉽게 수긍을 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인수인계와 남은 일들을 정리하기 위해 회사에 남아 밤을 지새우며 별도 없는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고민한다. 여태껏 꿈꾸고 노력해온 일을 이루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기엔 너무나도 긴 시간이 당신에겐 남아있으니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어릴 적 소박하던 꿈. 아마 그 정도는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씁쓸하게 웃으며 창에서 시선을 돌려 컴퓨터를 바라본다. 떠있는 문자의 나열들에 몇 가지를 추가해둔다.


의사의 사무적인 걱정이 당신을 지치게 한다. 치료를 거부하고 시골로 내려가겠다는 당신의 말에 의미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치료를 받으라 종용한다.


"선생님. 솔직히 제가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얼마나 더 살 수 있죠? 한 반년 정도? 저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런 병원에서 의미 없이 보내고 싶지 않아요. 짧더라도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요."


대답을 듣지 않고 당신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간다. 말이 없는 의사의 시선이 잠시 따라오지만 이내 사라진다.


남은 시간과 통장 잔액을 생각해본다. 그동안 여유 없이 살아온 덕분에 돈만큼은 어느 정도 있으니 다행이리라. 적어도 당신이 죽고 난 뒤에도 샌즈는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테니. 저물어가는 해를 쳐다보고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울고 싶지만 울어버리면 눈이 부어서 걱정 끼칠 테니 웃는다.


교외를 지나 시골구석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법한 한적한 마을의 작은 집.

새로운 우리 집이라고 웃으면서 들떠 떠드는 샌즈를 바라보며 당신은 그저 웃었다. 작고 포근하고 안락한 집에서조차 죽음은 당신을 쥐고 놔주질 않는다. 강하지 못한 당신의 마음은 짓눌려 삐걱거리지만 애써 웃는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한 것은 남는 자뿐만 아니라 떠나는 쪽 역시 마찬가지니까.


앞으로 여기서 계속 같이 사는 거냐고 해맑게 웃는 연인의 말에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다.


'어디에도 가지 않고 계속 같이.'


몇 년 전에 제 입으로 뱉은 말이 가시가 되어 마음속을 찔러댄다. 결국, 약속을 어기는 쪽은 당신이 되리라. 무너지는 마음을 억지로 붙들고

"그래. 여기서 같이 사는 거야."


짧게 대답하고 빙그레 웃는다. 품에 그를 안고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감춘다. 작게 떨리는 몸을 애써 눌러 참는다. 샌즈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당신에게 안겨온다. 온기가 서글프다. 그렇게 해는 또다시 저문다.



몇일이 지났을까. 당신은 집 앞의 땅을 갈아낸다. 무얼 하냐 물어오는 말에 화단을 만든다. 웃으며 대답을 해준다. 아마 오늘 심는 꽃이 피는 걸 당신은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욕심이라도 꽃이 피는 그 계절까지 살고 싶다. 


처음해보는 일은 어색하고 서툴지만, 열심히 둘이서 땅을 고르고 돌을 빼내고 작지만 어엿한 화단을 만든다. 이런저런 꽃들의 씨앗을 심고 물을 뿌리고 둘이서 웃는다.

젖은 옷 너머의 체온이 뜨겁다.


시골의 하루는 길다. 일이 없다는 것이 어색하지만, 점차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알아간다. 바쁘다는 핑계로 혼자 뒀던 연인의 손을 잡는다든가 그저 서로 바라보고 웃는다든가.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지만 구태여 붙들지 않는다. 시간은 강물과 같고 흐르는 것을 막아 세울 명분은 누구에게도 없으니까.


안락함 속에 죽음이 다가온다. 매일 배를 찢는 고통에 밤잠을 설쳐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평온을 가장한다. 아직은 버틸 수 있다. 중얼거리고 잠든 연인의 이마에 짧게 키스를 한다. 꽉 끌어안은 몸이 무의식적으로 파고들어 오는 것이 기쁘다. 얇은 옷 너머로 윤곽이 느껴진다. 뭉근하게 용암처럼 마음이 흐르는 것 같다.


작게 푸릇한 싹들이 돋아난 것을 발견하고는 당신에게 달려와 얘기해주는 샌즈를 품에 안는다. 봄이 왔다. 


고통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간다. 참지 못하고 병원에 찾아가 모르핀을 처방받았다. 흐릿한 양귀비향이 어지럽다. 꽃들은 자라나는데 당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느낌이 나쁘진 않다. 약효가 떨어지고 나서야 어느 왕자가 말한 삶은 고통이란 것이 뼈저리게 이해됐지만. 그저 서 있는데 자신의 무게로 발바닥이 아프다는 것은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결국은 모르핀에 더욱 기대어 고통을 지우고 몸이 축날 걸 알면서도 의존하게 되었다.



언제까지고 샌즈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고 느끼면서도 조금만 더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싶다는 당신의 욕심을 욕할 수가 있을까? 


하루 이틀 미뤄둔 고백이 부채처럼 쌓여 무거워진다. 계속 거짓말로 속여온 아슬아슬한 나날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수척해진 몸은 어떻게 해도 감출 수 없었고 계속되는 투약으로 몸이 망가져 가는 것 또한 숨길 수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때 샌즈가 보인 표정은 당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 따라올 것이다.


"왜...왜 나한테 먼저 말하지 않은 거야?"


울면서 당신을 때리는 그 손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 서글프고 서러웠다.  너를 위해서? 네가 걱정할까 봐? 온갖 말들이 머릿속을 떠돌았지만, 그 모든 것이 위선임을 당신은 잘 알고 있다.


당신은 그저 죽는 게 무서웠을 뿐이었다. 자신의 입 밖으로 꺼내어 말로써 형태를 빚어내면 그때는 정말로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아서, 죽음이란 게 당신에게 닥쳐올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입을 굳게 다문 당신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샌즈의 눈길이 아프다. 애써 웃으며 입을 연다.


"괜찮을 거야."


그런 의미 없는 말을 내뱉고 샌즈를 끌어안는다. 화가 난 것인지 당신을 밀쳐내려 애를 쓰지만 이내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울음을 터트린다.


당신이야 말로 울고 싶음에도 그가 울기에 울 수가 없다. 그렇게 눈물을 삼키고 쓰디쓴 눈물에 마음이 젖어 썩어간다.


"날 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절규하는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곤 텅 빈말들뿐이라 서글프다.


"괜찮을 거야. 난 아무 데도 가지 않아."




울다 지쳐 잠든 샌즈를 침대에 눕혀놓고 당신은 혼자서 외롭게 절망했다. 샌즈의 사랑이 이번만큼은 너무나 무겁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으로도 버거운 당신이기에 지금만큼은 그 사랑마저 괴롭기만 하다. 눈을 감고 그저 어린아이처럼 울부짖고 싶은 약한 마음에 무너질 것만 같다.



결국은 고통에도 무뎌지기 마련인 걸까. 샌즈는 시간에 따라 진정하고 당신을 병원에 넣을 궁리를 해대는 통에 골치가 아프기 그지없다. 병원 따윈 질색인데 그런 곳에서 죽으라니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쏘아주고 싶지만 그러면 울어버릴 테니 웃어넘긴다.



어느새 가짜 웃음이 얼굴에 잘 맞는 가면처럼 익숙해졌다. 파릇하게 돋아났던 새싹들이 제법 튼튼한 줄기를 뻗어 간다. 아직 꽃을 피우기엔 멀었지만 그래도 생명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면 당신은 서글퍼진다. 여름이 되어 모든 게 폭발적으로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럽다. 마음을 아무리 다잡아도 외발자전거처럼 휘청이며 억지로 버틸 뿐.


고통이 모르핀의 효과를 서서히 넘어서기 시작했다. 칼로 난도질당하는 고통에 약을 호소하고 결국은 약마저도 병에 져버렸다. 


고통에 겨워하는 당신을 보다 못한 샌즈는 강제로 당신을 입원시켰고 이제는 버티는 게 무리란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작은 시골집에서의 온화한 시간의 대가는 온몸으로 전이된 암이었다. 고통은 점점 심해져 갔고 꽃에 물을 줘야 한다든가 하는 작은 걱정들은 어느새 사라져갔다. 그저 하루하루가 덧없고 소중했을 뿐.


폭발적으로 자라나던 자연도 어느새 조금씩 당신처럼 시들어간다. 물론 저들에겐 내년이라는 기약이 있겠지만 당신에게는? 아마 어려운 일이겠지. 이제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서서히 누그러져 간다. 결국, 사람은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단 하나뿐인 생명이 사라지는 일이더라도.


그 대신 마음속 가득히 샌즈에 대한 걱정이 차올랐다. 오로지 당신이 그의 세계이고 당신이 그의 신이기에. 과연 나 없이 그가 살 수 있을까? 어쩌면 아무렇지 않게 털어내고 살아가 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니라면? 서글픈 일이다. 남겨질 사람을 걱정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럽다.


약이 바뀌고 머리카락이 서서히 약해지고 있다. 모르핀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고통은 다른 약으로 숨기고 몸이 망가지더라도 어차피 앞날이 없기에 거리낌 없이 처방된다. 약의 부작용 보다도 죽어가는 자에게 고통을 안겨주지 않는 인도적인 행위겠지. 어차피 중독이나 그런 것은 미래가 있는 자에게나 무서운 법이니까.


문득 바람이 그리워져 공원으로 산책하러 가자 샌즈에게 졸라대었다. 뜨겁던 햇살은 한풀 꺾여 시원한 바람에 자리를 비켜주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꽃처럼 번져나간다. 서늘한 바람에 뺨을 손으로 녹이니 샌즈가 제 외투를 벗어 당신에게 덮어준다. 빙그레 웃으며 올려다보니 걱정과 다정함 뒤에 깊은 슬픔이 어려있다. 당신도 샌즈도 그 슬픔을 애써 외면한다. 정면으로 부딪치기엔 둘 다 너무 지쳐있으니까.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남은 시간은 줄어들어 가고 서서히 몸은 기능을 상실해간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관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 이런 게 살아있는 걸까? 아닐 것이다. 아직 샌즈는 당신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하지만 이별은 준비되지 않았더라도 다가오는 법.


"뼈 괴물은 넌데. 어째 내가 더 뼈만 남은 것 같지 않아?"


마른 입술을 달싹거려 그렇게 농담을 하고 애써 웃는다. 정말 뼈만 남았단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가느다랗게 메마른 몸이 애처롭다. 이런저런 관이 몸을 뚫고 그것에 의지해서 간신히 숨을 쉬는 당신을 보고 이별을 직감하면서도 샌즈는 울면서 말한다.


"제발 날 떠나지 말아줘. 제발."


무리한 일이란 걸 알면서도 또 당신은 거짓말을 한다.


"난 괜찮을 거야."


샌즈가 힘주어 당신의 손을 잡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감각이 약에 취해 사라진 것만 같다. 힘을 주어 마주 잡아주고 싶지만 이미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기야.."


 서글프게 당신을 부르며 고개를 숙인 그를 흐려진 눈으로 애써 찾는다. 아주 작게 속삭여 주고 힘없이 입꼬리를 올린다. 웃음조차 되지 못한 무언가를 남기고 그렇게 당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국화꽃들 사이에 눈을 감고 누운 당신은 긴 투병생활로 수척해졌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울지도 소리 지르지도 않고 샌즈는 그저 그 옆에서 잠든 당신을 깨우려는 건지 손을 내밀고는 멈추고를 반복했다. 젊은 나이에 죽은 당신을 추모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족이라 할 무언가는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니. 그저 붉은 꽃잎들에 몸을 맡기고 어느새 작디작은 유리병에 남은 가루만이 당신이었다.


반짝이는 강물에 비친 걸까? 빛나는 것 같은 가루만이 바람에 흩날린다.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은 착각에 샌즈는 텅 빈 갈비뼈 사이가 아려온다. 아직도 손을 내밀면 손을 잡아줄 것 같은데 당신이 없다. 울면 당신이 나타나 안아줄 것만 같은데 그 품의 감촉이, 다정한 향기가 아직도 어른거리는데 당신은 없다. 텅 빈 마음을 추스르고 몇 날이 지나서야 돌아간 작은 집은 텅 비어있었다.


당신은 그곳에 없었다.


넓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멍하니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그 앞에 앉아있었다.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어리석음을 비웃을 수가 있을까?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긴 할까.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아니 올 수 없었다.


멍하니 집안을 배회하다 문득 문밖으로 나가니 꽃들이 만발해있었다. 둘이서 함께 심은 이 꽃들이 피는 걸 혼자서 바라보는 샌즈의 뒷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처량했고 한 방울 두 방울 비도 오지 않는데 꽃 위에만 비가 내렸다.

왜 이런 시골에 와서 꽃을 심느냐 물었던 것이 기억난다. 부끄럽다는 듯 살짝 시선을 돌리고 대답해준 말이 뱅글뱅글 맴돈다.


"어릴 때 꿈이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해서 작지만, 꽃이 가득한 집에 사는 게 꿈이었어."


당신은 그 꿈을 이룬 걸까? 피는 꽃조차 보지 못하고 떠난 연인이 가여워서, 돌아오지 못할 길로 연인이 가버린 걸 인정해야만 해서 샌즈는 오열했다. 


꽃만이 아름답게 눈물을 머금고 처연히 빛난다.



회색 건물로 가득한 도시로 샌즈는 돌아왔다. 잠시나마 둘이서 살았던 집에는 이미 다른 자들이 있었고 연인이 꿈을 이루겠다고 제 건강과 젊음을 바친 회사에는 이미 그의 흔적은 없었다. 울어버릴 거 같아서 이를 악물고 거리 끝에 자그마한 꽃집에 들어간다.

무엇을 사러 왔느냐 묻는 점원의 말에 잠시 손을 꼼지락거리던 샌즈는 빙그레 웃는다.


"애,애인을 만나러 가는데 최고로 멋진 꽃다발을 만들어주세요."


그는 꽃을 아주 좋아했으니 꽃다발을 들고 다시 만나러 가자. 이번에야말로 매달리는 게 아니라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연인이 되어야지. 작게 다짐한다. 어쩌면 왜 온 거냐고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당신이 없는 세상은 여전히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당신이 그의 삶이고 그만의 신이었으니까. 신을 잃은 신도는 신을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품에 가득해 안기도 버거운 꽃을 들고 가장 높은 건물의 계단을 천천히 올라간다. 입을 꾹 닫고 애써 웃는다. 당신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다가도 아마 다를 거란 생각에 서글프다. 끝까지 그는 당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당신의 고통을 알 수 없어서 서글프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온다. 꽃다발에서 꽃들이 흔들리고 약한 꽃잎이 떨어져 나간다. 샌즈는 흩날리는 꽃잎이 꼭 당신 같아 문득 손을 들어 붙들려고 하지만 바람결에 흐늘거리며 날아가 버려 잡을 수가 없다.


꽃잎이 섞여든 하늘을 올려다본다.


"거,거기 있는 거야? 자기야."


당신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까 싶어 무심코 중얼거려본다.


"어디에도 가지 않고 계속 함께라고 약속했잖아."


거짓말쟁이라고 작게 원망을 담아 중얼거려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당신은 약속을 지키게 될 거다. 떠난다면 따라가서 다시 함께하면 되니까.


모든 것이 작고 아래에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지만, 저 어디에도 당신이 없다. 아무런 의미 없는 지상 대신 하늘을 다시 올려다본다. 바람에 꽃잎이 아직도 흩날리고 있다. 품에서 꽃들이 한두 송이 떨어져 내리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저 위 어딘가에서 자신을 내려다볼 당신만을 찾는다. 바람에 눈물이 흩날리고 꽃송이들을 적신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저 앞으로 나아간다.


바람이 서글프게 해골의 선택을 질책하듯 소용돌이치며 스쳐 지나간다. 품에서 흩어진 꽃들이 하늘을 수놓는다. 눈을 꼭 감고 웃는다. 분명히 눈을 뜨면 당신과 다시 만날 그곳일 것이다.


"자기야. 이제 헤어지지 말자."



하늘에 꽃과 반짝이는 가루가 부드럽게 섞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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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의 Nine Point Eight을 듣고 쓴 글. 도중에 슬럼프 와서 19일동안 2000자 밖에 못쓴거 간신히 완성시켰다.

늦어서 넘나 미안한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