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위대한 전투였다. 괴물들에 이어 인간들의 운명까지 품에 안은, 해야만 하기에 할 수 있게 된 영웅. 수많은 생명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은, 할 수 있기에 해야만 하는 학살자. 그 둘의 격돌을 위대한 전투라 부르지 않으면 무어라 부를까. 대지가 죽음을 거부하고 바람이 울부짖었다. 온 세상 사람들의 심장이 하나되어 뛰어, 학살자를 쓰러트리는 것을 목표로 가졌다. 결국 그녀의 목표는 이뤄지지 못한채 사그라 들었지만.
"이 힘으로도…. 부족했나…?"
의지로 일어난 영웅의 힘은 이 지하의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실제로도 그녀는 인간 아이를 수차례 죽음까지 몰아넣었다. 그렇지만 인간의 의지는 그 수많은 죽음조차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었다. 알피스의 도끼가 인간의 숨을 끊는 순간, 인간은 자신의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왔다. 수차례의 죽음이 반복되고, 결국 인간은 다시 한 번 알피스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던 괴물이 있었다. 모니터 너머로 영웅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특히나 언다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잔혹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켜봐야 했다. 사랑하는 이의 용감한 모습을, 정의로운 최후를. 의지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리는 몸, 그곳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언다인의 두 눈은 눈물만을 쉴 새 없이 흘렸다.
"언다인…."
연구소 바닥에 주저앉은 언다인을 냅스타톤이 일으켰다. 인간이 핫랜드를 향한다면 그 길에는 이 연구소가 있다. 목을 조여오는 절망스러운 심정도 알고 있지만, 그래서 핫랜드의 괴물들을 대피시키고도 여기 남은 박사의 곁을 지킨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녀를 일으켜야 했다.
"괜찮냐고는 못 물어보겠네. 그냥…. 걸을 수 있겠어?"
"응…. 미안, 부축해주지 않아도 돼."
"언다인, 대피도 끝났고 여왕한테 연락도 보냈지?"
"응. 토리엘 여왕님께 영혼을 흡수하라고 전해뒀고, 핫랜드의 괴물들은…."
"내가 인간을 막을께."
난데없이 말을 끊고 들어온 냅스타톤의 목소리에 언다인이 숨을 삼켰다.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이해했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은 더 필요하잖아, 그렇지? 이렇게 덧붙인 로봇이 짓고 있었던 표정에는, 언제나 넘치던 자신감을 빙자한 허세도 공연을 할 때 흘러나오던 활기도 없었다. 그 미소에는 그저 약간의 씁슬함과 비장함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냅스타톤, 너…."
"다녀와."
DJ 일을 했던 손가락이 언다인의 포니테일을 풀어 내렸다. 길게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 위로 푸른 캡 모자를 덮은 냅스타톤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머리끈도 좀 빌려갈께!'라고 말하고는 예전처럼 짖궂은 웃음을 안면에 띄웠다. 언다인은 그 모습을 뒤로 연구소를 나섰다.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붙잡고 싶었다.
알피스도 떠나 버렸어. 그런데, 너마저 사라진다고 하면, 나는-
새어나올 것 같은 흐느낌을 속으로 삼킨 왕실 과학자는, 캡 모자를 눌러 쓰고 연구소의 반대편으로 달려나갔다.
"드디어 도착했네. 우리가 처음 본 이후 말이야, 난…. 뭔가 좀 오싹했어."
새하얀 피부와 발그스레한 뺨, 밀크 초콜릿 색 단정한 단발, 연둣빛 줄무늬 셔츠, 생기 없는 갈색 눈, 병든 것처럼 기묘하게 비틀려 올라간 입꼬리. 모든 게 먼지투성이다.
"넌 괴물들뿐 아니라 전 인류의 위협이기도 하잖아? 우와. 정말. 대단해."
인간은 조금의 자비도 보이지 않고 모두를 죽였다. 지하세계의 왕이 아닌 아버지로써 아이를 보호하고자 했던 자를 철저하게 배신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믿음을 놓지 않았던 하늘빛 작은 해골을 처참하게 짓뭉갰다. 세상을 구하기 이해 의지로 되살아난 영웅을 완전히 꺾었다. 그리고 지금, 지하세계 최고의 DJ가 학살자 앞에 섰다.
"너도 알겠지만, 시청자가 없는데 스타가 될 수 있겠어? 거기다가…."
냅스타톤은 말을 잇다가 언다인을, 지하의 괴물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적어도 이제 안전할테니. 그는 생각했다. 자신은 박사가 사랑하는 영웅처럼 될 수 없다. 무자비한 악당을 눈 앞에 두고 각성하는 영웅을 흉내내는, 반쪽짜리도 아닌 껍데기 영웅.
"내가…. 지키고 싶은 이들이 있거든."
인간이 다가오자 냅스타톤은 스위치를 내렸다. 무대가 순식간에 빛으로 가득찼고, 그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나타난 그는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때 그가 동경했던 인간과 흡사한, 대인 병기의 모습.
"준비됐어? 그럼 공연을 시작한다!"
조명이 요란하다.
챙, 소란스러운 금속음이 퍼진다. 인간의 손에 들린 골동품 리볼버와 냅스타톤의 오른팔에 달린 커터칼날이 부딪혀 끔찍한 소음을 퍼트린다. 벌써 몇 번째일까, 냅스타톤은 남은 에너지 잔량을 확인했다. EX의 모습도 소모하는 에너지 양이 상당한데, NEO의 모습은 어느 정도일까. 그는 자신의 몸이 버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노란 탄환에 날개 동력이 파괴되었고, 다리의 손상도도 높아졌다. 아마 이대로라면 팔도 부서지겠지. DJ 일도 할 수 없는 흉기 꼴이 되어버렸지만, 이런 팔도 나름 멋진 것 같았는데.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나 하는 게 얼핏 보면 여유로운 상황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허세였겠지만.
인간은 냅스타톤의 공격을 피해 몸을 굴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쾅, 요란한 폭발음이 들리며 그의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인간의 얼굴에서는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볼 수 없었다. 기괴하게 비틀려 올라간 입꼬리에 남은 건 광기뿐이었다. 순간 냅스타톤의 눈에 당혹감이 차올랐고, 인간은 그의 자세가 무너지는 그 틈을 기다렸다는 듯 놓치지 않았다. 정면에서 퍼진 일발의 총성. 은빛 꽁지머리가 허공에 흔들리고 파편이 튀어 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냅스타톤은 꿈을 꾸고 있다 생각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로봇은 잠을 자는 일도, 꿈을 꾸는 일도 없는데. 어쩌면 과거에는, 육체를 얻기 전의 유령이었던 그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의 사촌과 함께 있었던 시간에는.
"햅스-"
방심했다. 오판이었다. 그 이름을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 냅스타블룩의 영혼을 숨긴 냅스타톤이 무너진다. 무언가 치밀어 오르고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그는 이제 냅스타블룩도 냅스타톤도 아니니까, 여기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니까, 최후를 맞이하며 감회를 느끼는 것이니까.
그걸로 납득한다. 만족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째서지. 이렇게 될 것을 전부 알면서 지금의 자기 자신을 저버렸는데도, 나는, 아직. 지금의 자기 자신은 그 누구의 곁으로도 돌아갈 수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해버렸다. 그래봤자 소용없다. 냅스타톤이 언다인 박사가 사랑한 영웅처럼 되지 못한 건 이 때문이었을까.
남아있는 에너지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0%의 잔량을 무시하며 냅스타톤은 마지막 순간 팔을 뻗었다. 코어를 부숴 최후의 일격을 안길 생각으로 다가간 인간을 붙잡는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발버둥치는 아이를 꼭 붙잡고, 대인병기의 마지막 기능. 자폭을 택한다.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욕망을 스스로의 손으로 버린다.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고 폭주하는 와중에도 놀랄 만큼 평온한 기분을 맛보고 있다.
이 선택을 되돌리고 싶어 하는 주제에 납득하고 만족한다.
모순 덩어리. 감정이 만들어낸 업.
기쁘지만 슬프다. 편안하지만 괴롭다.
납득하지만 만족하지 못한다. 만족하지만 납득하지 못한다.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그렇게 바래도 이뤄지지 않는다.
아아, 이제, 정말로.
"미안해, 햅스타."
너무나 사랑스러워 무심코 내뱉어 버렸더니, 정말 지금의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구제불능인 녀석이었다.
히야 자폭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