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저녁이다. 구름이 많이 끼어 흐릿하다. 때문에 따스한 붉은 색으로 져야 할 태양은, 빛을 잃고 차가운 회색빛이었다. 창가에 작은 빗방울들이 튄다. 그것들은 방울방울 맺혀있다가 흘러내렸다. 그런 저녁이다.

시원하게 샤워하고 방에 들어서자 칙칙한 공기가 바늘처럼 코를 찔렀다. 대충 바지를 챙겨입고 환기를 좀 하려 창문을 열었다. 방금 막 내린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잠시 앉았다. 마른 땅에 온 비는 그 특유의 향기를 냈다. 밖은 꽤 추웠다. 공기에서 나는 비 냄새와, 추운 겨울날 밖에서 막 들어온 사람에게서 나는 그런 겨울 냄새가 서로 섞여 숲 속에 온 듯 상쾌했다. 거기에 커피 향까지 은은하게 풍기자, 살짝 졸음이 내렸다. 밖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고요했다. 비가 귀찮았는지 길가엔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 덕에 반 나체로 밖을 쳐다보는 일탈을 잠시 즐겼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정말 개 같은 날이었다. 설이라고 뵌 친척들은 내가 정말로 반가웠는지 보자마자 수많은 질문을 내리쏟았다. 그 질문들은 겉으로는 날 '걱정'한다는 것들이었지만 하나같이 무신경했고, 일부는 무례하기까지 했으며, 사실은 자기자랑이었다. 빨간 날 꿈속에서 소중하게 보내야 할 아침을 무익함보다 더 가치 없는 시간으로 보냈다.

점심에는 직장 상사께서 개념을 설날 떡국과 함께 말아먹으셨는지 자기 대신 문서작성 하나만 해달라는 전화가 왔다. 복 많이 받으시길 빈다. 그런 엿 같은 기분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서 뭘 해야 할지 알았을 때, '별거 아니야.'라고 한 그 상사의 말을 잠깐이라도 믿은 내가 병신이란 걸 깨달았다. 뭐, '존나 복잡하고 힘들고 번거로운 일이야.'라고 말했어도 꼼짝없이 했어야겠지만. 그렇게 날이 져갈 때쯤 사무실에서 나왔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우산도 없는데.

뭐, 인생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늘 일은 별거 아니었다. 지금까지 겪었던 많은 일들과 앞으로 있을 그 어두컴컴한 것에 비하면 말이다. 미래를 생각하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난 내 나이에 비해 아직 이런 일들을 감당할만한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다. 마치 깜깜한 동굴 속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문득 예전에 하던 언더테일이라는 게임이 떠올랐다. 벌써 몇 년 전이지... 언더테일은 게임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내가 마지막으로 했던 게임이었다. 삶에 치여 취미를 갖는다는 게 불가능했으니까. 오랜만에 노트북을 꺼내 전원을 켰다. 대학교 과제용으로나 쓰던 아주 구형 모델이었다.

나도 모르게 검색창에 언더테일 갤러리라고 검색을 했다. 습관이란 정말 무서웠다. 그랬다. 언더테일을 플레이한 시간보다 언더테일 갤러리에 있던 시간이 한 80배쯤 많았다. 그렇게 '언더테일 관련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라고 써있는 아주 익숙한 곳에 들어왔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거기에는 아직도 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비록 하루에 대여섯 개 정도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아예 죽은 갤은 아니었다. 왠지 정말 반가웠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래도 언텔갤 이대로만 가면' 이라는 글이었다. 작성 날짜는 오늘. 본능적으로 글을 클릭했다.



'라이더'



가면 라이더 사진과 함께 올라온 글은 짧고도 강렬하게 그의 뇌리를 스쳤다. 무심코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갑자기 여기서 있었던 지난 추억들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매번 어그로에 당하고도 또 어글 끌리는 멍청하고 착한 갤럼들. 게임 캐릭터들을 박기 시작해 '모든 것에는 포르노가 있다'라는 모 사이트처럼 '모든 것은 박을 수 있다'라는 철칙을 만든 뭐뭐박이들. 실제로는 18K 금손이지만 항상 [흙손주의]라 써놓는 겸손이 철철 넘치는 창작러들 등등... 수많은 추억들에 몇십 페이지나 뒤로 넘겨가며 갤질을 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연재하던 글이 떠올랐다. 차라에 관한 창작물이었다. 

옛 기억을 떠올려 로그인한 후에 1화를 찬찬히 봤다. 언갤럼들은 개추에 후했다. 후해도 너무 후했다. 이런 병신같은 글에도 개추와 함께 눈물 콧물 쏟으며 '감동'이라 외치는 블루키 디시콘을 달아 주다니. 댓글을 하나하나 읽으며 웃었다. 재미없다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착한 병신들. 존나 재미없는데...

그렇게 내가 연재했던 글들을 모두 읽어 내렸다. 다음 편을 찾았지만, 그 글 끝이었다. 그래. 나 이거 완결 못 내고 그만뒀었지. 16년 3월쯤이었나.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인생이 엿 같아지기 시작했던 시기니까. 모든 일이 갑자기 터졌다. 갑자기 빚더미에 앉게 된 집안, 갑자기 임신한 여동생, 갑자기 입원한 엄마...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런 쓰린 기억에 노트북을 덮으려 했지만,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그 글의 댓글 수였다.

눈을 찡그리고 다시 쳐다봐도 그대로였다. 그 글에만 댓글이 200개가 넘게 달려있었다. 이상하다 싶어 댓글 창을 들여다보았다.



'이새끼 어디감?'

'졸 재밌게 읽고 있었는데'

'이거 완결 어디서봄? 이거 완결 어디서봄? 이거 완결 어디서봄? 이거 완결 어디서봄?'

'(두 눈을 하트모양으로 번뜩이며 양손으로 덮치려 하는 차라 디시콘)'

'돌아와!'

'새끼 찍 쌌네 ㅉㅉ 일단 추천은 했다'

'다시 돌아와 완성해 줄 걸 알기에 당신의 의지가 가득 찼다.'



200개 넘는 댓글이 그렇게 달려있었다. 갑자기 볼을 타고 물방울 하나가 흘렀다. 에이 씨. 비가 안까지 들이치나 보다. 댓글들을 혹시나 하나라도 놓칠세라 꼼꼼히 읽어내려갔다. 모든 응원을 읽고 나자, 왠지 마음이 후련해졌다.

기지개를 거하게 한 번 폈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자기 창작물을 좋아해 준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갤럼들 덕에 난 내가 포기했던 꿈이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그 꿈은, 작가였다. 비록 아마추어 수준도 못 되었지만 누구보다 노력했다고 자부했다. 언더테일 갤러리를 좋아했던 이유도, 내 글을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렁찬 고함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어딘가 있었을 텐데. 구석에서 오래된 노트를 찾았다. 아이디어가 가득 들어있는 낡은 공책이었다. 잠깐 그 전에.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글을 하나 쓸 작정이었다. 페이지 아래에 있는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창이 떴다. 나도 몰래 터져나오는 웃음과 함께 제목을 써 내려 갔다.

'차라 박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