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살다살다 볼 일이구만…."
그는 갈라진 등딱지를 풀밭에 기댔다. 쭉 늘어진 잔디밭과 그 틈사이를 바둑판처럼 메꾸고 있는 비석에는 인간도 괴물도 아닌 그 두 종족의 연합기가 꽂혀 펄럭였다. 그늘 한 점 없는 넓은 추모공원에 고개를 숙여 등짝 아래에 몸을 가렸다. 검은 봉투에 투박하게 싸온 소주병이 일렁이며 작은 잔에 반 쯤 찼다.
"그래, 어떻게 지내고 있나? …나야 뭐 이냥저냥 지내다가 어느 꼬마 천사가 결계를 풀어주는 바람에 다시 나왔지. 그냥 세상구경 하며 여유롭게 살고있네."
다른 잔에 소주를 한 가득 따라내어 목구멍으로 걸걸하게 넘겼다. 쌉살하게 감도는 술맛에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이런 술은 역시 몸에 잘 안맞는다니까. 그때 그… 무슨 술이었지? 밤 몰래 같이 마셨던 술 말야."
아무런 대답이 없는 바람에 고개를 저었다.
"때 되면 알려주겠지."
갈색 낡은 모자를 매만졌다. 쭈그려 앉은 모습에는 과거의 휘황찬란한 전사의 모습은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걷어올린 왼쪽 소매에 남은 흉터를 손으로 쓱 쓸어올렸다. 그 날을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그 때 솔직히 놀랐다네. 부상당해서 도망치고 있었지. 하필이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껄껄, 구석에서 몰래 술이랑 고기를 먹다가 나를 본 자네의 얼굴이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구만. 우리 둘 다 놀랐었지. 당황하면서 말야. 그런 상황에 술을 권하다니. 자네 전우들이 왔으면 어쩌려고 그랬나? 심지어 귀한 구급약품을 적에게 사용하지 않았는가."
쓴 술맛에 취기가 올라 홍조를 띄웠다. 옆구리를 벅벅 긁으며 게걸스럽게 트름질을 했다. 거슨은 챙겨온 가방에서 닳아빠진 갈색 수첩을 꺼내 읊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 낮에선 전장에서 서로에게 칼을 맞대고, 밤에는 몰래 만나 밤하늘을 보며 술을 마시다가 헤어지고. 음… 칙칙한 이야기는 그만 하고, 자네는 분명… 어디보자…."
오랜 세월에 흐려진 두 눈을 비비고 안경을 고쳐썼다. 뭉뚝했던 글자가 제 모습을 찾아 또박또박 정성들인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따라 흐른 듯 어느 곳은 진하고, 어느 곳은 흐트러진 채 남아있었다. 급하게 그린 그림과 휘갈겨 적은 철자는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는 다시 펜으로 모자 사이를 벅벅 긁으며 회상하기에 바빴다.
"맞아. 영국에 가보고 싶다 했지! 거기 어땠는지 알아? 정말 요리가 최악이었어! 우리가 그 때 먹었던 야전식량 빵 덩어리 만큼 소름돋았다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어. 커다란 시계 앞에서 넋놓고 야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자네 생각이 나더군. …자네가 어느날 부터 안 오니 설마 했지. 그 설마가 진짜 였을줄이야…."
찡해지는 코끝을 훔치며 공원 풍경을 훑었다. 누구는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 사람들이 뭣때문에 죽었는지도 모르고 밝은 미소로 뛰어다니며 행복을 사방에 흩뿌렸다. 이것저것 주절거리다보니 시간이 금방 지났다. 곧 의장대원 한 명이 차렷자세로 영령나팔을 불며 전사자들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슬피 울리는 나팔소리에 거슨도 찌뿌둥한 관절을 일으켰다.
"다음 번에도 이야기 주머니에 이것저것 잔뜩 담아 올테니 기다리고 있게나. 나 없다고 지루해 하지 말고."
뒷짐을 지며 공원길을 나섰다. 슬슬 고개를 들추는 풀벌레들의 저녁 노랫소리에 여운이 남아 고개를 다시 돌려보았다. 검은 정장을 입은 어느 중년이 비석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중년은 그를 향해 짤막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거슨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노을진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다.
"그렇게 심심하지는 않겠구만… 친구님."
이런 적당한 분량의 문학 진짜 좋음
아... 이런느낌의 아련한 문학 너무좋다... - 아스리엘 애껴
좋은 문체다 퍄...
ㅗㅜㅑ
엥 뭐지 빼박 알라인데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