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rinting : 낙인 효과. 병아리들이 알에서 처음 깨어나서 본 게 애미인 줄 알고 쫓아다니는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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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영혼을 나한테 줘."

"내가 왜?"

* 자, 그럼 됐...뭐?"

 

움찔, 하는 의태어가 떠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지만, 왠지 엉거주춤하게 멈칫했을 것 같다고 당신은 태평스레,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 앉아 그렇게 생각한다.


할 말을 잃은 듯한 목소리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리며, 당신은 당신이 여기 도달하기 위해 했던 일들을 떠올린다. 

폐허에서 스물. 숲에서 열여섯. 폭포에서 열여덟. 그 다음 마흔. 합이 아흔 넷. 


정말로 힘든 시간이었다. 아무도 죽을 필요 없는 상냥한 RPG라고 했던 건, 

만약 죽을 필요가 있었다면 다들 마우스를 던져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당신은 말도 안 되는 의문을 품는다.


* 왜라니? 여기까지 와 놓고 왜 그런 질문이 나오는 건데?

"아니, 말 그대로라고. 왜 내가 그렇게 해야 하냐니까.

* 뭐라고?


당신은 상대가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어깨를 으쓱인다.


"뻔하지. 야. 게임 다시 하면 쭉 가만히 두다가 엔딩 볼 때쯤 튀어나와서 또 눈에서 콜타르나 흘리고 스피커에 테러나 할 텐데."

"내가 왜 나한테 먹일 엿을 내 손으로 사다줘야 하냐?"

* ...어, 어떻게...?

"어떻게고 자시고 영혼 운운하는 놈들이 뒤통수 치는 건 동서고금 안 가리거든."

"애초에, 생각해 보면 내 영혼도 아니고 프리스크 영혼이잖아. 뭘 자연스럽게 사기를 치고 앉았어."

* ...


순간, 당신의 눈 앞에 불현듯 소녀가 나타난다. 

노란 줄이 있는 녹색 스웨터. 흐트러진 갈색 단발. 

반쯤 풀려 있는 듯한 빨간 눈동자가, 여전히 태평스레 누워 있는 당신을 쏘아본다.


* 아, 그렇게 잘 알면 이야기가 빠르겠네. 

* 맞아. 사실 너한테 세계를 되돌려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어. 아무리 결말을 되돌리려고 해도, 결국에는 내가 다 망쳐 버릴 테니까.

"그러냐."

* 태평한 척 하지 마. 이제 불살 엔딩은 없어. 

* 아무도 죽지 않는 결말을 네 손으로 날려버렸잖아? 네 손으로 모두를 죽여버렸잖아? 

* 그래 놓고서 대가 치르는 데 필요한 영혼 하나 가지고 사기라고 혀를 놀리다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조롱하는 듯 혀를 내밀며, 당신의 얼굴 바로 앞까지 소녀가 얼굴을 들이민다. 

붉은 안광이 어둠 속에서 불길하게 빛나며, 소녀의 미소가 당신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기쁜 듯이, 도취된 듯이, 아릿한 색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면서.


* 하지만 말야, 그런 뻔뻔함에 나는 감사하고 있어.

"..."

* 그렇잖아. 응? 지겨웠거든. 이런 세계. 

* 아무도 죽을 필요 없다던가, 넌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던가.

* 세계를 지키기 위해 내가 너를 막겠다던가, 끔찍한 시간을 보낼 거라니 뭐라니 어쩌고 저쩌고.

* 아하하, 웃기지도 않아. 나는 이렇게나 죽이고 싶은데, 그걸로 된 거 아냐?


얼굴에 한껏 서린 웃음기에 광기를 점점 더해 가며, 소녀는 당신의 품으로부터 벗어나 당신의 주위를 돈다. 

빙글, 빙글, 빙글. 마치 줄이 끊긴 꼭두각시로 왈츠를 추는 것처럼, 자제라고는 전혀 없는 격렬한 발걸음 소리가 어둠 속을 울린다.

어라, 여기 바닥 없었던 것 같은데. 하고 당신은 여전히 태평스레 생각한다.


* 나는 그렇게 아팠는데. 나는 그렇게 불행했는데.

* 그래서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 같잖아. 같잖아. 같잖다고. 시끄럽게 굴지 말고 다 죽어버리면 되잖아.

* 그러니까, 대가를 받아. 다시 내가 모조리 다 죽여버릴 수 있게!


당신의 시야가 가려진다.


날카롭다 못해 귀기까지 서린 외침과 함께, 소녀가 당신을 덮쳐 바닥에 쓰러트린다. 

이제는 숫제 소녀의 얼굴을 뒤덮다시피 한 검은 눈물이 당신의 얼굴 위로 떨어져 강을 이룬다. 

끈적끈적한 습기가 당신을 목을 타고 흘러내려 어둠에 녹아든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여전히 담담히 대꾸한다.


"그런 거면 세계 되돌려 주겠다고 할 필요 없잖아."

* ...어?


덜컥, 소녀의 실루엣이 정지한다. 당신은 소녀의 흰자위가 그 한 마디로 제 색깔을 찾는 것을 목격한다. 

머리를 크게 한 번 얻어맞은 것처럼 천천히 입을 다물며, 소녀는 '당신'을 응시한다.


"다 죽여놓고 싶었으면, 지금 그대로가 최고 아냐? 내 말 같은 거 그냥 무시해버리면 되잖아."

* 그, 그건, 네가 대가를 받아야 하니까. 네가 이 모든 걸 다.

"내가 저지른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한다고 네가 바라던 세계를 되돌려? 그거 참 몸둘 바를 모르겠네."

* 아, 으, 그, 그럼 하지 말던가! 거래를 안 하면 되잖아!

"그래, 애초에 난 다른 게임을 하면 돼. 딱히 이 세계 하나 손 못 댄다고 억울할 것도 없지."


그렇게 말하며 당신이 짐짓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하자, 귀기에 가득 차 있던 소녀의 얼굴이 서서히 당혹으로 물든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입이 허무하게 뻐끔거리고, 동공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린다.

...어느 새, 당신은 소녀에게 억눌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태도만큼이나 무력해진 소녀를 누르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말해 보세요, 어린이."

* ...

"너는, 차라는, 왜 계속 죽이려고 하는 건데?"

* 아, 으, 아아, 아, 그게, 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당신은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 없다는 듯이, 소녀는 울먹이며 고개를 젓는다.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갓난 병아리마냥."

*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이 운을 띄우자. 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소녀의 눈이 질끈 감긴다. 

눈두덩을 쓸어넘기는 당신의 손이 그 눈꺼풀을 억지로 띄운다. 불안해하는 눈동자가 당신을 겁에 질린 눈으로 쳐다본다.


"죽이라면 죽이라는 대로 쭉 죽여버리고 거기에 쉽게도 홀려버린 주제에."

* 아, 아.


'당신'은 소녀의 버둥거리는 팔다리를 억누른다. 새하얀 살결의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네 입으로도 말했었잖아? 네 마음 속에 있는 살의는 네 게 아니라고."

* 그, 그게, 갑자기 왜.

"그냥 내가 저지른 짓에 자극돼서 멋대로 폭주했을 뿐이면서 부활한 목적이라느니 완벽해졌다느니.

* 아, 아아, 무슨, 아...

"사실은 자기가 원래 바라던 일도 아니었으면서 말이야."

* 아냐, 내가. 그만해, 그만...!


붉은 눈동자가 꺼져 가는 촛불처럼 흔들린다. 바르작거리는 팔다리가 서서히 그 세기를 더해 간다. 

당신에게 농락당했다는 진실을 마주하는 두려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소녀의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이 소녀는, 병아리와도 같다.


태어나서 처음 본 것을 어미로 알고 따라다니는 병아리처럼, 그리고 그 어미가 하는 일을 따라하는 병아리처럼. 

그런 어린아이 같았던 이 소녀는 당신을 따라다녔을 뿐이다. 당신을 따라했을 뿐이다. 

이 소녀가 저지른 잘못은, 따지고 보면 모두 당신의 잘못인 셈이다. 그저 당신이 이 소녀를 칼로 사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당신은 게임 밖에 있다. 

그러니까 그런 건 사실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당신은 가학심으로 가득 찼다.


"차라, 차라, 가엾은 차라. 아직도 모르겠어?"

* 아냐, 아냐. 아니라고!

"네가 왜 세계를 되돌리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나는 알 것 같은데, 말해줄까?"

* 말하지, 말하지 마, 아, 아아아!


당신은 격렬하게 요동치는 소녀의 팔다리를 부러트리듯 억누른다. 당신의 입가에 잔혹한 웃음이 걸린다. 

당신은 당신의 혀 끝으로, 당신이 망가트린 소녀의 정신을 유린할 준비를 마친다.


"넌 그냥 좋은 세계에 있고 싶었을 뿐이지."

* 아, 아.

"널 괴롭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좋은 음식, 따뜻한 농담, 좋은 친구들이 있는."

* 아, 아, 아아아아아아아...!

"내가 죽이라는 것도, 내가 죽이지 말라는 것도 네가 다 죽여버려서 이젠 없지만?"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당신은 소녀의 목이 찢어지는 절규에도 귀를 막지 않는다. 

완전히 빛을 잃은 붉은 눈동자가, 차츰 소녀의 원래 모습이 그랬듯이 광택 없는 갈색으로 바뀐다. 

원망으로 엉망이 된 소녀의 얼굴은, 이제 하얗다기보다는 파랗게 질려 있다. 당신은 소녀의 히끅거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되돌릴 수 있지, 넌."

* ...

"자기가 잘못 왔다는 걸 깨닫고, 되돌릴 힘이 너한테는 남아 있잖아. 우리가 부숴 버린 세계를 아무 조건 없이 다시 되돌리고, 음, 그래, 조금 외적인 발언이기는 하지만, 내가 깔끔하게 불살 엔딩을 클리어하도록 해줄 능력이 너한테는 있지. 아니, 나한테도 있지만, 난 더러운 해커가 되긴 싫으니까."

* 그, 그럼.

"흠?"


소녀에게서 뒤돌아, 연극조로 떠들어대던 당신의 소매 끝에 무언가가 걸린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소녀의 하얀 손이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듯이 당신의 소매를 움켜쥐고 있다. 

금방이라도 끊길 것 같은 목소리가, 소녀의 입술 속에서 쥐어짜이듯 흘러나온다.


* 그럼, 지금이라도.

"그건 싫어."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단호히 잘라버린다.


* 어, 어째서? 지금, 지금까지 계속 그 얘기를 했으면서, 왜?

"날 속이려고 했잖아."

* ...


소녀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든다. 당신은 소녀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어깨를 으쓱인다.


"너도 이제 알겠지? 세계를 되돌리는건 결국 너 좋은 일이었다는 걸."

"근데 내가 정작 되돌려달라고 하니까 어떻게 했어? 건방지게 영혼을 요구하면서, 내 기분도 잡치고 네 희망도 잡쳐버렸지."

* 아, 이제, 이제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러고 싶어도 못 그런다는 건 알아."


당신은 소녀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히익, 하고 숨을 들이쉬며 소녀가 눈살을 찡그린다.


"영혼을 너에게 주지 않고 세계를 되돌리면 네가 밖으로 나올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쉽게 말하면 그냥 괘씸해서 그래, 네가."

* 아, 으, 윽...!

"그래서, 뭐. 당분간은 다른 게임이나 하면서 널 그냥 여기 방치해 둘 거야. 반성 의자라고 혹시 들어 본 적 있어? 그거랑 비슷한 거지. 굳이 말하자면 반성 어둠이겠지만."


그 말뜻을 이해한 소녀의 얼굴이, 지금까지보다도 더욱 창백해진다. 

플레이어가 없으면 게임은 시작할 수 없다. 그녀 혼자서는, 세계를 되돌릴 수 없다.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그녀는 계속, 이 어둠 속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이 만들어낸, 자기 자신의 죄의 결과물 속에 파묻혀서.


* 계속, 계속 여기에 있으라는 소리야? 네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아마 굉장히 두렵겠지. 들은 얘긴데, 독방이라는 게 생각보다 굉장히 잔인한 벌이라고 하더라고. 

"대화할 상대도 아무도 없고, 가지고 놀 것도 아무것도 없고."

"그냥 계속 확대되는 자의식 속에서, 자기가 저지른 과거의 죄에 삼켜지고 악몽을 꾸고 또 삼켜지는 것만 계속 계속 계속..."

* 싫,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싫어싫어싫어!


다급하게, 무엇인가에 매달리는 듯이, 바닥에 주저앉은 소녀의 팔다리가 버르적거린다. 

당신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만들어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듯한 그 움직임은,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를 보는 것처럼 허무하기 짝이 없다.


"다음에 오면 좀 더 그래...눈물 범벅이 되어 있기를 바랄게."

"반성하라구."

* 기다, 기다려, 잠시만...!


그리고, 그러한 소녀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이.

손을 한 번 내저으며 X 키를 누르고, 당신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사라진다.


망연자실하게 뻗은 소녀의 손이 '당신'이 사라진 곳에 있었던 어둠을 갈랐다. 

허무하게 뻗은 손끝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것도 걸리지 않고, 밀어닥친 공허감이 소녀의 마음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당신'이 말했던 그대로, 서서히 확대되는 자의식이 소녀의 뇌리를 삼키기 시작한다. 


자신의 어머니, 친구, 아버지, 멘토, 친구가 되려던 이, 영웅, 자신과는 관계 없던 괴물들. 

마주치는 모든 이를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남의 의사를 자신의 의사인 줄 알고 죽여버린 과거의 기억들이 하나하나 떠올라, 

소녀의 심장을 천천히, 하지만 잔혹하도록 날카롭게 조여들어간다. 


어느새,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소녀의 목에서는 절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어둠을 제 손으로 만들어내기까지의 기억이 점점 흘러나올 때마다 눈물이 그 양을 더하고, 절규가 그 세기를 더해 갔다.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에는, 이제, '당신'이 망가트린 소녀의 울음소리만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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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엔딩 같지만 해피엔딩. 다음 접속할 때쯤이면 불살엔딩이 열려 있을 거야. 잘됐네.


하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에에엥에ㅔ에엨 만연체 븅신같다ㅏㅏㅏ

퇴고를 하긴 했는데 제대로 안 해서 별로 바뀐 게 없고 결말부만 질질 늘어진 느낌. 상 기대 안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