뚫린 천장으로 옥상이 보였다. 비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까 전만 해도 살살 내리던 비가, 이제는 쏟아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빗방울 아래로 각기 다른 네 가지 색의 눈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색깔 있는 눈을 뜨고 쳐다본다는 것은 마법사에게 엄청난 도발이었다. 그건 총구를 겨누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빛나는 눈은 마법을 시전했거나, 적어도 장전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게 넷은 전투태세를 갖춘 채 서로의 눈을 살피고 있었다.

저스티가 부릅뜬 노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옆에 있는 하늘색 마법사에게 소리쳤다.

"야, 란티아! 뭘 그렇게 재?"

란티아가 하늘색 눈으로 칼리를 쳐다봤다. 그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칼리. 임무 끝났으니 부대로 복귀해."

이들은 칼리의 선임이 분명했다. 그녀에게 귀띔을 해 여기로 오게 한 장본인들이겠지. 그녀가 주황색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개소리하지 마. 니들은 오늘 다 뒤졌으니까. 아까 내 말 못 들었어?"

저스티가 씩 웃었다.

"선임한테 말하는 꼬라지봐. 거 봐. 내 말 맞지? 저년 배신할 거라고 했잖아. 개 같은 고문관 새끼."

란티아가 칼리를 살벌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지막 경고다. 눈깔 깔고 복귀해."

칼리는 그 말을 깔끔히 씹곤 란티아에게 모욕적인 손가락 모양을 취했다. 그들 사이에 불꽃이라도 튀는 것만 같았다.

예전부터 주황색과 하늘색 마법사들은 이상하리만큼 마찰이 잦았다. 마법색깔별성격론자들은 주황과 하늘색은 성격이 정반대기 때문에 싸움이 잘 일어나는 거라고 설명했다. 물론 이 이론은 근거 없는 유사과학이었지만, 지금 둘을 보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칼리가 부릅뜬 눈을 란티아에게 고정해놓고 보라법사에게 말했다.

"선배. 이 강화유리 좀 내려줘."

반면, 보라법사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노란 마법사와 하늘색 마법사. 상당히 거슬리는 조합이었다. 폭발하는 투사체 류의 노란 마법과 움직임을 봉쇄하는 제어 류의 하늘색 마법. 이 둘의 듀오는 교과서에도 가장 먼저 다룰 정도로 좋은 조합이었다. 만약 주황인 칼리까지 합세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트리오가 완성됐겠지. 조합 시너지만 보자면 보라법사 쪽이 조금 약세였다. 보라색은 후방교란 용이지 전면전 용이 아니니까.

이제 어쩔까. 차라리 혼자였다면 훨씬 쉬웠을 텐데.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칼리를 두고 갈 순 없었다. 방금 상황만 보더라도 칼리는 지시불이행에 반역불보고죄로 해고는 물론이고 최소 철창행 몇십 년이었다. 그녀와 보라법사는 이미 한 배를 탔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돼.'

문제는 시간이었다. 자기를 잡으러 온 놈들은 눈앞에 있는 둘 뿐이 아닐 거다. 분명 지원이 있을 테니, 남은 시간은 많아 봤자 십 분 남짓이다. 게다가 진영도 불리했다. 그들은 위고, 우리는 아래였다.

이기려면 우선 머리를 쳐야 한다. 분명 저 노란색 꼬맹이는 란티아라는 여자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를 무력화하는 게 먼저다. 우선 란티아의 주문 시전을 혼란계 마법으로 교란하고, 칼리를 노란 놈에게 붙여 놓자. 노란 마법들은 시전 시간이 긴 편이기에 근접 공격에 취약하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 아저씨 또 저러고 있네. 그냥 나부터 간다?"

"칼리 잠깐...!"

순간, 보라법사가 말릴 틈도 없이 주황색 빛이 번쩍였다.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튀며 주황 스펙트럼을 뿜어냈다. 한 줄기 섬광이 천장 위 두 마법사 쪽으로 향했다. 빛이 충돌하자, 마치 포탄이라도 떨어진 듯 건물 한쪽 벽이 터져나갔다. 빗방울이 공중으로 튀었다. 순수한 힘 그 자체였다. 그 한 번의 섬광에 건물 전체가 크게 뒤틀리며 흔들렸다. 

보라법사는 칼리가 이 정도로 강할 줄 몰랐다. 그녀가 또래 중에서 뛰어나긴 했었지만, 이 만큼일 줄이야. 주황색 마법사들은 실력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다른 색의 마법사들에 비해 쉽게 알 수 있었다. 순수한 힘을 다루는 마법이었으니까. 지금 칼리는 그들 중에서도 상당했다. 하지만 무모한 짓이다.

먼지가 잔뜩 일어 시야를 가렸다가, 곧 쏟아지는 비에 씻겨갔다. 보라법사는 빠르게 두 적과 하나의 아군의 상태를 살폈다. 칼리의 주먹은 란티아의 앞에서 멈춰있었다. 란티아는 칼리가 날아오는 그 찰나에 움직임을 봉쇄하는 막을 우산처럼 폈다. 하지만 급하게 전개한 주문이었는지 상당히 힘겨워 보였다. 두 여자가 살벌한 눈빛 교환을 했다. 곧 칼리는 바닥으로 착지했고, 두 번째 공격을 꽂았다. 그렇게 몇 번의 파괴적인 공방이 오갔다.

"이 정도로 미친년일 줄이야."

저스티가 중얼거리며 손에 노란 구체를 모았다. 이제 그는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칼리에게 주문을 쏘려 했다. 하지만 보라법사가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보라법사는 미리 장전해 둔 마법을 저스티에게 던졌다. 기본적인 혼란 마법이었다. 저스티는 마법을 맞자 현기증이 나는지,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저스티가 끙끙대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이런 보라색 새끼가...!"

저스티는 보라법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불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방 안은 옥상에 비해 훨씬 어두웠다. 이상했다. 이 정도로 어둡진 않았는데..? 저스티가 귀 뒤에 있는 보라색 반점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미리 새겨 둔 정신보호 마법이었다. 

어디선가 보라법사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거. 아까도 쓰고 있지 않았냐?"

저스티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는 말소리가 들린 쪽으로 마법을 난사했다. 노란빛이 번쩍거렸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니가 잘 모르나 본데."

이번엔 그의 바로 뒤에서 들렸다. 저스티는 소리를 질렀다.

"나와!"

그러자, 사방에서 보라법사들이 저스티를 향해 걸어나왔다. 저스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지금 이거..."

"그 보호 주문 말이야."

갑자기, 저스티의 귀 옆에서 보라법사의 웃는 얼굴이 튀어나와 말했다.

"내가 개발했거든."




몇십 번째 합이 오갔다. 칼리는 지칠 줄도 모르고 달려서, 아니 '날아'서 주먹을 날렸다. 양손을 땅에 짚고 몸을 낮게 한 채, 한쪽 무릎을 가슴팍까지 올리고 다른 한쪽 다리는 뒤로 쭉 뺀 뒤, 있는 힘껏 도약해 주먹을 내지른다. 정말 단순하고도 단순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 하나하나의 일격들은 수만 번의 연습 끝에 나온, 철저하게 절제된 동작이었다. 또한 그녀가 육체에 두른 마법은 아름다울 정도로 정교하고 깔끔했다.

주황색 마법과 하늘색 마법이 그림을 그리듯 사방으로 튀었다. 때로는 너무 빨리 움직여 잔상만 남겼다. 끝없는 창과 방패의 대결을 보는 듯했다. 란티아는 지쳤는지,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게 아니라 공격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칼리는 그 반동을 이용해 공격에 가속도를 붙였다. 튕기는 각도를 계산한 것이었다. 오로지 본능에서 나오는 움직임이었다.

하나가 막히면 곧 다른 하나를 더 강하게 찌른다. 그것이 막히면 전보다 더 강하게 찌른다. 칼리의 머릿속엔 오로지 한 대만 맞추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이 싸움은 단 한 대면 끝났다. 칼리 주먹의 파괴력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란티아는 미소를 띄웠다. 그녀가 작게 말했다.

"이제 끝낼 때도 됐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란티아의 주변으로 하늘색 광선 네 개가 칼리의 몸을 조준했다. 

찰나의 순간, 칼리는 주먹을 뻗은 채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털끝 하나 움직이면 죽는다. 실전 경험이 적었던 칼리에겐 교과서 속에서만 봤던, 고등 마법이었다. 란티아는 지친 게 아니었다. 마법을 시전하고 있던 거였다.

광선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화했다. 일정 속도 이상 움직이는 것들을 모두 태우는 마법이었다. 빨리 움직일수록 더 강해졌다. 네 개의 광선은 정확히 칼리의 양팔과 다리를 조준하고 있었다.

칼리는 학창시절 배운 강의를 떠올렸다. 이 광선은 두 종류의 하늘색 마법 중 하나였다. 하나는 강제로 멈추게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움직이면 발동하는 것이다. 그제야 칼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문구가 있었다.

'하늘색 마법은 상성상 주황색 마법을 압도한다.'

칼리는 이제서야 아까 전 선배가 자기에게 하려던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너 같은 꼴통도 이게 뭔지 아나보네?"

란티아가 꼼짝하지 못하는 칼리의 뒤로 다가갔다.

"니가 안 움직이려고만 하면 안전 할 거 같지?"

란티아가 칼리가 서 있는 땅의 발밑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칼리가 딛고 있던 옥상 바닥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칼리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도 칼리는 순간적으로 다른 쪽 발에 힘을 주어 균형을 잃지 않았다. 넘어졌더라면 팔다리가 잘렸을 테지.

"흠. 역시, 넌 참 훌륭한 인재야."

란티아가 대단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녀가 뚜벅뚜벅 걸어와, 칼리의 코앞에 멈춰 섰다. 그리곤 고개만 살짝 숙여 칼리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건 안다. 그걸 다 감수하더라도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이제라도 투항해라. 그러면 몇 가지 처벌은 받겠지만..."

칼리가 란티아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광선은 그 작은 움직임에도 반응했다.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칼리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참으며 란티아를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란티아는 얼굴을 찡그린 뒤, 침을 닦아냈다.

"아무리 내가 널 싫어한다 하더라도 널 체포해 가야 한다. 근데..."

란티아가 눈을 치켜뜨곤 칼리를 쳐다봤다.

"니년이 하는 꼬라지를 보니까 도저히 살려둘 수가 없잖아?"

란티아가 모든 광선들을 칼리의 심장을 향해 겨눴다. 칼리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가빠진 숨을 가까스로 참았다.

란티아가 칼리의 옆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칼리의 심장이 더욱 빨리 뛰었다. 그녀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며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란티아가 바닥을 내리치려 발을 높이 들자, 칼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마법사관학교 시절에 추억, 졸업 후 생전 처음 해본 아르바이트, 국립 마법사가 되기 위해 맹렬히 공부했던 것들... 그리고 선배가 떠올랐다. 그녀의 눈물이 빗방울과 뒤섞여 볼을 타고 흘렀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칼리는 작게 실눈을 떴다.

"야. 괜찮아?"

광선이 사라졌다. 그 대신 그녀의 앞에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 긴장이 풀린 칼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보라법사는 칼리가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그녀를 받아 안았다.

"정신 차려. 이동해야 돼."

"선배..."

"왜?"

"우리 잠깐만 이러고 있자."

비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칼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선배는 우는 얼굴만 보면 어쩔 줄 몰라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