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꾸는 꿈처럼 남아있는 기억이 있다. 아주 추운 곳이었고 시야는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소복한 눈 위를 지르밟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당신은 천천히 눈을 뜰 수 있었다. 바닥에 코를 처박고 방금 굶어죽은 토끼처럼 널브러져 있던 당신을 누군가가 들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몸이 잘 단련된 사람인지 그 사람의 팔은 매우 딱딱했다. 당신의 키는 아주 작았을 텐데, 당신을 들쳐 업은 그 사람의 키는 당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컸을 뿐이다. 힘센 난쟁이였을까. 당신이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바닥에 스러지자 이번엔 그 난쟁이가 당신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귀에 속삭였다.
오늘처럼 기억에 그치지 않고 정말로 그 꿈을 꾸게 되는 날이면 당신은 늘 그 속삭임을 듣지 못하고 꿈에서 깨어났다.
*
점심시간이 끝나갈 즈음 당신은 학교 뒤뜰에 앉아 친구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친구는 당신에게 전해들은 꿈 얘기에 관심을 보이며 당신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다.
“안겼을 땐 어땠어? 불안 하거나 무섭지 않았어?”
친구는 다 먹은 곽 음료의 빨대를 잘근거리고 있었다.
“차가웠어. 추운 곳이었는데 그것보다 더.”
“꿈에서 그게 느껴져?”
“그게..”
종이 울린다. 이제 5분 이내로 교실에 돌아가야 했다. 당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친구가 소리를 지른다.
“세상에... 음악실 문을 열어놨어야 했는데 잊어버렸어! 미안해 프리스크! 먼저 갈게!”
당신은 뛰어가 버린 친구의 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다시 자리에 앉아버렸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것만 하면 되는 규칙적이고 편이한 학교생활. 오늘 따라 교실이 갑갑하게 느껴져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이 딱딱한 곳에 발을 들여놓기 전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더러워진 줄무늬 옷, 팔다리는 상처투성이, 손에는 나뭇가지 하나. 5년 전 어느 날 갑자기 길 한복판에 나타난 당신을 발견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당신의 모습이 마치 버려진 강아지 같았다고 얘기한다.
‘부모님은?’
‘신원이 분명하지가 않아요.’
‘실종신고 뒤져봤어?’
‘근래에 한 건도 없었어요.’
낯선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어떤 집에서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류를 뒤적이며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러고 나서 얼마안가 당신과 전혀 닮지 않았지만 따뜻한 미소를 가진 낯선 이를 ‘엄마’라고 부르게 되었다.
“내 삶은 그 후로 평범했어. 남들처럼 살았지. 잃어버린 게 많은 거 같은데도, 아무도 찾아주려고 하지 않아,”
당신이 과거의 당신에 대한 유일한 단서라고 여기는 그 꿈에 대해서 아무도 물어보지도,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당신의 그 헛소리만 빼면 당신의 삶은 아주 평범했고, 사회는 그렇지 않은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니까.
“그런데 넌 누구야?”
고개를 끄덕이던 당신은 옆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친구가 앉아있던 자리에 파란 후드를 뒤집어 쓴 꼬마가 당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당신이 생각한 것을 그대로 입 밖에 내어 말하고 있었다.
“헤, 이게 꼬마 목소리로 들려?”
기분 나빠. 목소리만 들으면 분명 당신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많았다. 하지만 체구는 그렇지 않았다. 후드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실외인데도 분홍색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있는 녀석은 당신이 말을 잇지 못하고 의아해 하자 특이한 소리로 낮게 웃었다.
“아까부터 자꾸...”
“많이 컸잖아? 이젠 업어주지도 못하겠는걸.”
뭐라고? 당신은 당장이라도 저 후드를 제쳐버리고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돌아오지 않는 당신을 찾으러 나온 담임이 당신의 어깨를 세게 쥐어짜기 전까지는. 고통을 호소하며 뒤를 돌아본 당신은 잔뜩 화가 나있는 중년 여성의 표정을 마주해야했고, 다시 앞을 봤을 때 그 파란 후드는 온데 간데 없었다.
*
“다녀왔습니다.”
집엔 아무도 없었지만 인사하는 것은 습관이 되어 있었다. 신발을 벗자마자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냉장고 앞으로 달려간 당신은 작은 포스트잇 한 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8시 귀가. 핫도그.’
당신의 엄마, 그리고 아빠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의 귀가 시간과 당신의 저녁메뉴가 내용의 전부였다. 당신은 냉장고를 열었고 핫도그를 꺼내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케챱과 머스타드 중에서 고민하던 당신은 둘 다 챙겨 따끈하게 데워진 핫도그를 들고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핫도그가 담긴 접시를 방바닥에 내려놓은 당신은 문을 잠그고 불을 킨 뒤, 침대 밑에서 낡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상자 뚜껑을 열자 안에는 곱게 게진 낡은 줄무늬 옷과 반바지, 나뭇가지가 담겨있었다. 당신은 나뭇가지를 조심스럽게 들어 옆에 내려두고 낡은 줄무늬 옷을 두 손으로 집어 들었다. 지금의 당신이 입기엔 너무 작은 옷이었다. 줄무늬 옷을 유심히 바라보던 당신은 손을 뻗어 옷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떼어내었다. 푸른 비늘이었다.
“난 바닷가에 살았던 걸까?”
딸깍, 형광등 스위치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렇게 이야기한 건 당신이 아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당신은 뒤를 바라보았다. 방문 창가에 파란 후드가 걸터앉아 있었다. 밖에서 들어온 가로등 불빛을 등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에는 당신이 데워 온 핫도그가 들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위에는 케첩이 소시지가 보이지 않을 만큼 잔뜩 뿌려져 있었다.
“방금 그렇게 생각했지?”
파란 후드는 소스를 흘리지 않으려는 건지 고개를 쳐들고는 제 손바닥 만 한 핫도그를 입으로 추정 되는 곳에 한꺼번에 밀어 넣기 시작했다. 씹는 기색도 없이 핫도그는 상자에 물건을 집어넣듯이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이런 생각은 어때. 온 몸에 파란 비늘로 뒤덮인 붉은 머리칼을 가진 ‘영웅’이 너와 접전을 벌이다가...”
녀석은 소매로 입 주변을 슥 닦더니 창가에서 당신의 책상위로 자리를 옮겼다.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이 허공에서 동동 거렸다.
“친구가 되었지.”
파란 후드가 바닥에 풀썩 내려와 섰다. 힘차게 뛰어내렸음에도 가벼운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을 뿐이다.
“난 바닷가보다 신빙성 있는 얘기라고 생각해.”
“나에 대해서 알고 있지?”
당신이 냅다 묻자 녀석은 어깨를 들썩였고 덜그럭거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허?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이런 헛소리를 잘도 믿는 듯 한 표정이군 그래.”
“알려줘.”
당신은 단호하게 외쳤고, 뼈다귀는 후드 주머니에 손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너도 그런 ‘괴물’인거지? 기억해.”
“괴물? 아주 끝내주는 꿈이었나 보군. 오늘 아침에 꿨나?”
“꿈이 아니야... 자세한 건 몰라. 넘어지고 아파하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어.”
당신은 옆에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들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생각나.”
녀석이 몸을 움찔였다.
“알려줘.”
당신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눈을 마주쳤다고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를 지그시 관통하는 느낌으로.
“가장 중요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파란 후드의 목소리는 좀 전보다 격앙되어 있었다.
“넌 날 봤을 때부터 당장 꺼지라고 했어야 해.”
“내가 이러는 건 가장 중요한 걸 기억하기 때문이야.”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파란후드는 두어 걸음 정도 물러났다. 일어서서 보니 당신보다 한참이나 아래에 있는 그의 모습이 궁지에 몰린 새끼 짐승과도 같았다.
“이건 내가 아니야.”
당신은 악수를 청하는 모양새로 손을 내밀었다.
“알려줘.”
어느새 파란 후드는 책상 옆 벽에 등을 찰싹 붙이고 서있었다.
“난... 그저 한 번 보고 오려고 했을 뿐이야.”
당신의 방 문이 벌컥 열렸다. 당신의 부모님이었다. 그들은 잠자리에 들라며 ‘혼자서’ 시끄럽게 떠들던 당신을 부드럽게 타일렀고 창가 쪽에 있어야 할 그 녀석은 없었다.
그날 밤 당신은 꿈을 꾸었다. 매우 추운 곳이었고 멀리서부터 눈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점차 가까워졌다.
“샌...”
당신은 감각이 사라져가는 입술을 필사적으로 달싹였지만 제대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널 찾고 있어, 꼬맹아. 인간들이 말이야. 지금 지상에서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
코앞까지 다가온 누군가가 당신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딱딱한 몸에 당신은 묘한 편안함을 느끼며 시선을 똑바로 하려 애썼다. 파란 후드가 보였다.
“꼬맹아, 여길 넘어서면 이 곳의 괴물들, 지상의 인간들...모두와 영원히 안녕인거야.”
“얼마나 걸릴까? 평범한 인간 꼬마가 괴물의 이야기는 누군가가 지어낸 헛소리라고 믿게 되는 건.”
“샌즈...”
몇 걸음 걷던 당신은 바닥에 스러져 버렸고 파란 후드는 당신을 품에 안았다.
“정말 만약에, 못된 해골이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간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파란 후드가 벗겨지자 사방에 소복히 쌓이고 또 내리고 있는 눈만큼이나 하얀 두개골이 드러났다.
"자비를 베풀지 마.“
당신이 무어라 말하려고 하자 뼈다귀는 손으로 당신의 입가를 부드럽게 감쌌다.
“이건 잊어버리면 안 돼.”
굉장히 추운 곳이었지만 해골의 품 안은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태양만큼 따뜻했고 당신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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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으로 올라온 프리스크가 평범하게 살 수 없을거란 걸 알고 평범한 인간 사회의 시간선으로 프리스크를 보내버린 샌즈. 그리고 다시 찾아온 샌즈를 기억하는 프리스크.
오 내용 신선하고좋았다ㅎㅎ
뭔가 아득한 이야기였다. 꿈처럼. 일종의 평행세계 같은 거네. 잘봤어.
오오 신기한 이야기네 잘보고간딘
거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아득한이야기를 하는듯 몽롱한 분위기다
아 정말 좋다. 조만간 자각몽 관련 글 쌀 예정이라 제목 보고 으아니시발 망했다 했는데 읽다 보니 방향이 좀 다른듯. 아무튼 좋은 글이었다 다른 시간선으로 보내진 프리스크에게 에봇산의 이야기는 이제 꿈 속의 일이나 마찬가지이겠지. 하지만 그 시간선에서조차 프리스크가 정상적이고 행복한 어린 아이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 듯 해서 많이 안타깝다. 이상적인 부모라면 아이에게 '8시 귀가, 핫도그'라는 메모를 남기지 않겠지... 그렇기에 프리스크가 여전히 에봇산의 꿈을 꾸는, 그리고 샌즈를 보게 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네. 좋은 글 잘 봤다 다음 글도 츄라이츄라이
아 쓰는거 까먹었는데 마지막에 과거 샌즈가 과거 프리스크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듯 감싸주는 묘사가 어째 꽤나 몽환적이라 좋았다 단순 묘사가 아니라 꿈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못된 해골이 아이를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가'도 절대 자비를 베풀지 말라는 말 자체도 슬프고, 그걸 잊어버리고 만 프리스크도 슬프다. 그 모든 것들이 글 말미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아리게 만들고 있는 듯 하다. 글 마무리의 여운이 깊어서 참 좋았다. 아릿한 이야기.
퍄.. 묘한게 좋다.. 잘봤음
아따야 샌즈 능력도 좋아
장면 하나하나가 그려지는듯한 글이다. 실제 샌즈랑 얘기 나누는 부분마저도 꿈처럼 느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