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 안, 침묵이 무겁게 깔렸다. 고요한 가운데 펜을 똑딱거리는 소리만 흘렀다. 알피스는 방 한가운데 놓인 책상위에 노트를 펼쳐놓고 분주하게 무언가 정리하고 있었다. 한쪽 팔은 다쳤는지 붕대를 칭칭 감고서. 그 바로 뒤에는 언다인이 팔짱을 낀 채 잔뜩 불만인 표정을 하곤 벽에 기대 있었으며, 한쪽 구석 소파엔 보라법사가 피곤한 듯 앉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른 이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는 칼리가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일까, 칼리의 표정이 가장 어두웠다.
알피스가 필기를 멈추고 노트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 그러니까 아무튼... 다시 정리해 보자면..."
언다인이 삐딱한 자세로 말했다.
"망했지 뭐. 얻은 건 없고, 잃은 건 많고."
"얻은 게 왜 없어..."
알피스가 소심한 눈빛으로 칼리 쪽을 쳐다봤다.
"하! 뭐? 쟤? 전쟁이 일어날 뻔했는데? 게다가 니 팔 다친 것도...!"
보라법사가 진정하라는 듯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며 말했다.
"언다인, 목소리 좀 낮추자. 전쟁 그렇게 쉽게 안 나."
"너도 문제야! 지금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때야? 딴 데도 아니고, 알피스 연구소가 털렸다고! 거기 온갖 자료들 다 있는 거 알긴 해? 니네 집 털린 거 아니라고 너무 대놓고 무심하잖아! 지금쯤이면 위치추적이니 뭐니 해서...!"
언다인은 알피스와 관련된 문제라면 항상 목소리가 커졌다. 하긴, 자기 애인이 다쳤는데 누가 진정하겠는가. 언다인이 팔을 다친 알피스를 봤을 땐 문장 하나 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거기...! 야! 붕대...! 빨리! 아무거나...!'
지금이야 많이 진정 된 거였다. 알피스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방금 언다인의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보라법사가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로챘다.
"알피스 걱정이라면 안 해도 돼. 빠져나오기 전에 다 처리하고 나왔으니까. 게다가 지금 샌즈가 순찰하고 있잖아. 걔 일 허투루 안 하는 거 알지? 아직까진 안전해."
언다인은 보라법사의 말은 들은 둥 마는 둥 하다, 갑자기 칼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푸른색 비늘을 번쩍이며 칼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칼리의 코앞까지 다가간 언다인은 면전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그래서, 너 정체가 뭐야?"
"언다인... 아직 너무 그렇게..."
알피스가 멀리서 말리려 했으나...
"가만 있어 봐! 쉴 시간 충분히 줬잖아!"
언다인이 턱을 치켜들고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을 듯 쏘아붙였다.
"너 때문에 뭔 일이 일어난 건지 알긴 하냐?"
"언다인...!"
알피스가 곤란하다는 듯 안절부절 댔다. 보라법사는 손가락으로 자기 이마를 두어 번 문지르더니 말했다.
"그만해. 칼리 잘못 아니야."
언다인이 칼리의 다음 마디를 기다렸다. 세로로 찢어진 노란 눈이 칼리를 뚫어버릴 것처럼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칼리는 아무 표정 없이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힘없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을 내놨다.
"미안해."
다들 놀란 얼굴이다. 칼리를 며칠 겪어 보아 어떤 성격인지 아는 괴물들은 물론이고, 특히 보라법사가 그랬다. 자존심 강하던 칼리의 입에서 미안하단 말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 말이었다.
"다 내 잘못 맞아. 정말... 미안해."
"너...!"
언다인은 뭐라고 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순순히 사과하는 칼리 때문에 갈 곳 잃은 분노를 애꿎은 벽에다 풀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조각이 공중으로 튀었다.
"에이씨! 뭐 일이 이따위로 됐냐!"
칼리의 몸에 식은땀이 잔뜩 흘렀다. 그녀가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가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내가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그냥... 애초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칼리가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눈이 뒤집히더니, 정신을 잃고 크게 휘청였다. 순간, 언다인이 몸을 날려 칼리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직전에 가까스로 받아냈다.
"뭐... 뭐야...! 얘 왜 이래? 야! 정신 차려!"
"걱정하지 말거라. 단순한 과로인 것 같구나."
토리엘이 침대에 누워있는 칼리 옆에 앉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아... 아니거든요! 누가 걱정했다고 그래요?!"
칼리 머리맡에 서 있던 언다인이 빽 소리를 질렀지만, 토리엘은 그녀가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칼리를 안고 허겁지겁 달려오고 나서부터 쭈욱 근심 가득한 얼굴을 짓고 있었으니까. 언다인은 아까보다 부드러워진 눈매로 칼리를 한 번 쳐다보곤, 홱 돌아 방문을 닫고 나갔다.
한 쪽에 있던 보라법사가 긴장이 풀렸는지 벽에 기대 털썩 주저앉았다.
"고마워요. 아주머니."
그제야 방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차분하고 조용한 방이었다. 키 큰 스탠드 조명이 조용히 빛을 내며 서 있었다. 그 옆 앙증맞은 창문 너머로 별빛이 반짝이며 들어왔다. 살짝 열린 조그마한 옷장엔 줄무늬 옷들이 걸려 있고, 귀여운 양말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조용하고, 포근했다. 깨끗하게 정리된 이 방은 프리스크가 쓰던 방이다. 아마 토리엘이 매일같이 청소했겠지.
"너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니? 좀 지쳐 보이는구나."
토리엘이 수건을 물에 담갔다가 빼고는 꽉 쥐어짰다. 보라법사가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냥... 좀 일이 의도치 않게 흘러가네요. 칼리며, 프리스크며..."
토리엘은 프리스크라는 이름을 듣자 잠깐 움찔했다. 아차. 보라법사는 괜한 말을 꺼냈다 싶어 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해요."
"괜찮단다. 계속 얘기해주렴. 나도 알아야 하지 않겠니?"
보라법사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라 말했다.
"절 쫓아온 마법사들의 기억을 살펴봤어요. 죄송하지만 거기에 프리스크에 대한 건 하나도 없었어요. 근데, 걱정 마세요! 프리스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가 직접..."
토리엘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그녀가 숨죽여 울고 있었다. 보라법사는 그녀가 진정할 수 있도록 하던 말을 멈췄다. 토리엘은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작게 속삭였다.
"미안하구나."
토리엘이 하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프리스크가 갑자기 사라진 뒤로 하루도 편히 자본 날이 없어. 그 어린애가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보라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토리엘의 옆에 섰다. 토리엘이 그런 보라법사의 손을 꼭 잡았다. 하얀 털에 묻어있던 눈물이 매끈한 손에 번졌다.
"제발... 우리 아이를 구해 주렴."
토리엘이 슬픈 눈을 아래로 떨구며 빌었다. 보라법사는 입술을 꽉 깨물곤 대답 대신 토리엘의 손을 꼭 붙잡아 주었다.
'프리스크... 대체 어디 있는 거니.'
비는 여전히 내렸다. 보라법사가 거친 발걸음으로 빗속을 뚫으며 정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새벽 공기는 날카로울 정도로 차가웠다. 여러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칼리는 어쩌지? 당분간은 쉬게 두어야 했다. 며칠 동안이나 갇혀 있었는데, 곧바로 교전을 벌였으니. 게다가 그녀의 정신 상태는... 말도 못 하게 충격이 크겠지. 토리엘이라면 그녀를 잘 돌봐줄 거였다. 가장 안전한 곳이기도 하고.
알피스는? 그녀는 조심성이 많았다. 거의 모든 상황을 대비해 놓았으니까. 비록 연구소가 박살 난 건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계산 안일 거다. 금방 복구할 수 있겠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프리스크...
그때, 보라법사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인간."
보라법사의 눈이 잠깐 보라색으로 물들었다가, 익숙한 목소리인 걸 깨닫곤 도로 사그라들었다. 샌즈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보라법사에게 다가왔다.
"복잡해 보이는 얼굴인데?"
보라법사는 샌즈의 얼굴을 보자 무언가 안심이 되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샌즈와 보라법사는 서로를 상당히 신뢰하고 있었다.
"잠깐 앉아."
샌즈가 정자 안에 있는 긴 벤치로 다가가 앉더니 옆자리를 뼈만 남은 손으로 툭툭 쳤다.
"오늘 나 인기 폭발이네."
"아까 보니 좀 놀아 '본' 솜씨던데?"
보라법사가 소리 내어 피식 웃곤 샌즈의 옆으로 가 털썩 앉았다. 샌즈가 헤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보라법사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조금 긴 한숨을 쉬고 나서, 땅바닥을 쳐다보았다.
"도저히 모르겠다. 프리스크 납치한 새끼들, 정부 쪽이 맞긴 한 건지..."
보라법사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칼리 선임들 기억을 읽었어. 근데, 프리스크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더라고. 이렇게까지 막막했던 적은 처음이야."
샌즈가 조용히 물었다.
"펠 박사 쪽은 어떤데?"
펠 박사. 생명과학부 연구소장이었다. 허나 그 또한 추측일 뿐이며,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연구한 내용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주민등록증부터가 그와는 아무 상관 없는 한 노숙자의 것이었다.
심지어 '펠'이란 이름도 본명이 아니었다. 보라법사가 마지막으로 습격한 연구실에서 나온 정보가 오직 '펠'이라 써 있는 연구 제목뿐이었기에 붙은 이름이었다. 생김새에 관한 것도 사진 한 장 없었다.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얗다는 떠도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와 비슷한 소문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웃기게도, 정보가 없다는 게 정보였다.
이것들은 정부가 모든 일이 펠 박사의 단독 소행이라고 발표했을 때쯤에 알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도 정부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직접 정보를 얻으러 다니고 나서야, 이 펠 박사란 자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후론, 수사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펠 박사 쪽은 더 막막하지. 왜, 뭐 아는 거라도 생겼어?"
샌즈가 조용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에봇 산 지하에서 우리가 나올 때 말야. 모든 괴물이 빠져나온 건 아니야. 지하에 남기로 마음먹은 괴물이 딱 하나 있었어. 플라위라는 노랗게 생긴 꽃이었지."
샌즈는 꽤 진지해 보였다.
"어제, 오랜만에 지하에 다시 내려가 봤어. 깜빡 두고 온 물건이 생각나서 말이야. 근데, 지하엔 아무도 없더라고. 뭐, 처음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 나랑 못 마주친 걸 수도 있으니까. 근데, 너 메아리 꽃이라고 알아?"
"알아. 전에 머펫한테 들은 적 있어. 마지막으로 들었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샌즈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맞아. 오는 길에 혹시나 해서 그 꽃을 보러 들렸는데... 모든 메아리 꽃들이,"
샌즈가 말을 살짝 멈췄다가, 이내 무표정한 얼굴로.
"비명을 지르고 있더라고."
의지를 가져라 글쟁이... 너의글을 기다리는 갤럼이 있으니...
너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ㅠㅠ
너무 좋다. 계속 써줬우면 좋겠다.
미친 플라위 안돼
개추를 퍼붓고 싶다
고마워 니들 덕에 의지가 차올라
수태이 디터미네이션
*당신은 작가가 힘내서 다음편을 쓸거라는 사실에 의지가 충만해진다
내 의지도 받아라... 플라위 얘기 나오니까 기분이 복잡해지네
매아리꽃비명지르는거 소름ㄷㄷ 뭔일있었냐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