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이 의지 작용은 본시 자명한 것으로서, 그때 그때 그 개개의 행위에 있어서만,

즉 동기에 의한 세세한 규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실제로 아무 목표와 한계가 없다는 것이 무한의 노력인 의지 자체의 본질인 것이다.

(...) 목표가 달성되면 모두들 또다시 새로운 진로의 기초가 되고, 이렇게 한없이 계속된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의지는 영원한 생성이며 끝없는 흐름일 뿐이다. 의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

치 않다. 원한다는 사태 자체만이 중요하다. 그러나 의지의 삶을 더 깊이 살펴보면 의

지는 영원히 결정적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의지는 끊임없이 원하도록

선고 받았지만 의지 행위의 무용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간혹 삶 자체에 근본

적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의지와 표상의 두 얼굴이 완전

히 다른 방식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서서히 자신의 존재, 즉 자신의 의지 자

체에 의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숙명을 자각하기 전까지

현 상황에서 느끼는 위기감은 고통의 서막에 불과할지 모른다.


간단히 말하면 고통은 삶의 본질 자체로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고통은 단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개인들의 문제다. 살려는 의지의 긍정은 이기심과 직결되

며, 이기심은 모든 전쟁의 원리다. 왜냐하면 살려는 의지는 자신을 긍정하기 타인의 의

지를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부정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의지로서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이기적 의지는 불의와 폭력을 생겨나게 한다. 따라서 전쟁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

다.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이용하며, 모든 것을 소유하려고 하며, 적

어도 지배하려고 하며, 자기에게 반항하는 것을 절멸시키려 한다.”(의지와 표상으로서

의 세계, 407쪽)


앞에서 우리는 개인들의 상호 침해를 막기 위해 국가가 필요함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악으로부터의 도피는 새로운 악을 가져올 뿐이라는 점을 또한 밝혔다. 악의 억압은 다른 악을 불러올 뿐이다.

이제 우리는 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되었다. 무한정한 보편의지가 유한한 개체들 속에 구현된 모순의 장(場)이 바로 우리의 세계다. 인간의 최대의 죄는 인간이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불행하게 태어난 것이다.

결국 모든 불행은 의지가 육체 속에 구체적으로 대상화되었다는 데 있다.

잘못은 삶에 있지 않고 살려는 의지에 있다. 삶이 줄 수 없는 것을 삶에 요구해서는 안 된다. 

쇼펜하우어에게 목적의 달성은 없다. 투쟁하고 싸우고 계속되다가 어느날 죽음의 그림자가 나에게 드리워지는것이다.

그리하여 인생은 고통이며 세상은 비관적이고 인간은 잘못 태어난 것이다.

고뇌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살려는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다.

즉 종족보존을 위한 사랑과 성교를 멈추고 동정을 유지하며 고행하고 금욕하는 것이다.

의지의 부정이야말로 삶의 지혜라는 것이 비관론의 윤리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