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형발사체 이름 정해진 기념으로 써본다. 가능하면 시리즈물로 써보고 싶은데 가능하련지 모르겠다야.


1. 국방부과학연구소


한국의 무기 개발 역사는 정부 수립 직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고 육군이 9월 5일 창설되었으나, 국군의 장비는 끽해봐야 일제 보병장비 일부와 주한미군이 공여한 장비였죠. 이 때문에 대한민국의 독자적인 병기 생산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초대 창장에 김창규 육군 대령을 임명하여 12월 15일에 육군병기공창을 창설, 무기의 생산과 정비, 재생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1949년 1월 15일 용산의 유항상공주식회사 공장을 접수하여 제 1공장으로 삼고, 조선유지주식회사 인천공장[1]을 제 2공장으로 삼아 1공장에 권총의 생산을 시도하였으나, 시제품 제작에는 성공했지만 양산에 실패하여 수류탄과 99식 소총 부속품의 제작을 하였고, 2공장은 해방 후 방치되었다 1947년경 발생한 폭발 사고로 파괴된 공장을 재건하는 정도의 일만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병기공창 창설 1년 뒤인 1949년 12월 15일, 국방부에 채병덕 소장을 부장으로 하여 병기행정본부가 창설되었고, 육군병기공창이 병기행정본부 산하의 국방부병기공창로 들어갔습니다.  이 병기행정본부는 1950년 들어 영등포의 삼화정공주식회사 공장을 접수하여 제3공장으로 증설하며  인천의 조선알미늄공업주시회사와 인천 기아산업주식회사를 생산감독공장으로 지정 운영하였으나, 한국전쟁 직전 정비 및 점검을 한 바로는 생산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어 국방부병기행정본부는 2공장 본부장이었던 정낙은 육군중령[2]을 초대 소장으로 하여 1950년 6월 15일 과학기술연구소를 창설하였습니다. 불과 열흘 뒤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리승기 박사 등 저명한 기술자들이 월북/납북당하는 등 문제가 있었지만, 과학기술연구소는 한국전쟁 도중에도 부산으로 이전하여 국내의 과학기술자들을 긴급 수용하였고, 영도의 부산수산시험장 등의 시설을 할당받아 1951년 2월에 연구결과 보고서인 <과연휘보> 제1편을 발간하였고, 8월에 제2편을 발간하는 등 병기, 탄약, 군용 식량과 재료 연구 등등을 수행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과학기술연구소는 1953년 서울로 돌아와 신당동의 식촌 제약사 건물에 자리를 잡았고, 1954년 7월 14일 대통령령으로 국방부과학연구소로 격상되었습니다. 



2. 로켓 연구와 시험 발사.


1957년 10월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발사하자, 한국도 로켓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58년 10월 국방부과학연구소는 로켓 연구개발을 목적으로 한 연구과를 극비리에 신설, 1. 유도장치 2. 추진장치 3. 비행성능 4. 추진체 5. 내열재료 5개 부문으로 나누고 추진체를 담당하는 13실 화약실을 신설하여 로켓 개발을 추진하였습니다.


연구소는 일본의 이토카와 교수가 1955년 개발한 펜슬 로켓을 벤치마킹하여 개발에 나섰고, 국방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전쟁 후 남은 5인치 로켓포탄 재고 약 2,000발을 활용하여 로켓 제작에 나섰습니다. 


로켓은 1단뿐만 아니라 2단 로켓과 3단 로켓까지 개발하였으며, 5인치 로켓포탄의 고체연료를 융융결합시키거나 선반으로 깎아서 폭을 맞췄다고 합니다. 이어서 로켓에 부착하여 궤적을 보여줄 연막탄을 완성하였으며, 로켓의 단 분리는 금속분말의 혼합을 활용한 연소지연을 활용해서 이루었다고 합니다.


개발 과정에서 유도장치의 이상과 강한 바람으로 로켓이 발사대 쪽으로 되돌아와 200m 후방에 추락하거나, 연막탄 제작 중 폭발하여 민가에 화재를 일으킬 뻔 하고, 로켓 분말들이 폭발하여 고압선에 화재를 일으킬 뻔 하는 등 갖가지 위험이 있었으나 다행히 그렇게까지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최초의 국산 로켓 시험 발사는 다음 해인 1958년 10월 10일 오후 3시 인천 고잔동 해안에서 실시되었습니다. 길이 170㎝, 무게 48㎏, 사거리 8㎞ 등 아주 초보적인 7개의 로켓이 시험 발사되었고, 이 중 한 개는 실패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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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7월 27일, 2단 로켓 67호(ROK-SRI 067)의 발사 사진.[4]


다음 해인 1959년 7월 27일에는 이승만 대통령 등의 고위인사들이 보는 앞에서 2단, 3단 로켓의 시험발사가 이루어졌고, 총 5개의 발사가 모두 성공했습니다.



명칭

단수

길이(m)

폭(cm)

사거리(km)

최고고도(km)

005

1

0.76

5.6

4.7

2.2

006

1

1.75

6.7

7.5

3.3

007

1

3.01

16.7

8.2

3.6

067[4]

2

4.65

22.9

26.0

9.5

566[4]

3

3.17

16.7

81.0

4.2

1959년 7월 27일 발사된 로켓들의 제원.






당시 로켓 발사를 관람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를 팔아서라도 지원해주겠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런 로켓 개발 및 우주개발의 열의는 쭈욱 이어졌고, 1959년 전문가를 주축의 대한우주항행협회가 발족하고 당년 10월 학회지 [우주과학]이 출간되었으며,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한국학생우주과학연구회도 설립되게 됩니다.


이렇게 로켓 개발은 쭉 이어져왔으나, 4.19 혁명이 일어나고 이승만이 하야하며 로켓 개발에 먹구름이 꼈고, 이어서 5.16 군사정변이 터지고 새로 임명된 송요찬 국방부장관이 1961년 8월 6일 국방부과학연구소를 해체, 대부분의 연구가 폐기되고 국방부과학연구소의 인력 정도만 육군기술연구소로 흡수되게 되고, 한국의 로켓 개발은 인하공대의 민간 인력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출처:

정낙은 회고록, 책미래, 2017

국방기록원 기록정보콘텐츠 군수공장의 창설,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6364&pageFlag=

국사편찬위원회 "이승만 정권 시기 과학정책과 국방부 과학연구소 중견관리의 행정경험"


-각주-

[1] 이후 1956년 한국화약에서 인수, 한국화약 인천공장이 되었다가 2006년 신도시 건설을 위해 철거, 현재는 일부 건물이 한화기념관으로 남아있습니다.

[2] 이후 한국전력주식회사 부사장, 건설부 장관, 인하대학교 산업공학과 교수를 지내다 2016년 별세.

[3] http://www.ehistory.go.kr/page/view/movie.jsp?srcgbn=KV&mediaid=179&mediadtl=1279&gbn=DH

[4] 몇몇 미디어에서 3단 로켓을 지칭하여 "ROK-SRI 067"로 지칭하고 있으나, 해당 로켓을 개발한 개발진 중 한 사람인 한만섭의 증언 및 상대적 크기 비교에 따라 2단 로켓으로 판단했습니다. 덧붙여 556호 로켓의 이름은 세계에서 556번째 로켓 발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국방부과학연구소처럼 이승만 정부 시절 군 연구소 관련 이야기도 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