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물질적 힘은 실재한다. 그리고 그 힘의 기원에는 선민의식이라는 운영체제가 깔려있고, 그게 작동해왔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그 선민의식의 운용 방식이다.
미국 건국 자체가 유럽의 오답노트에서 출발한 실험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200년이 지나면서 오답노트가 신화로 변환됐고, "실수를 피하려고 짠 시스템"이 "신이 설계한 완벽한 시스템"으로 둔갑했다. 여기서 사고가 멈춘다. "아무튼 신의 뜻이다"로 모든 것이 환원되면서, 자기 힘이 왜 작동하는지, 어디서 소모되고 있는지를 묻는 능력 자체가 사라졌다.
미국 예외주의의 실체는 "우리는 특별하다"는 믿음이 아니다. 모순과 위선을 물질적 힘으로 뭉갤 수 있는 능력, 그 자체가 예외주의의 본질이다. 노예제를 하면서 자유를 외치고, 독재자를 지원하면서 민주주의를 수출하는 위선이 통한 건, 그 위선을 문제 삼을 수 있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은 이 물질적 능력을 맹신과 혼동하고 있다.
그 와중에 유럽에서 건너온 노예도덕이 미국의 힘을 갉아먹었다. 하버마스로 대표되는 비판이론이 한 일은, 죽어가던 이성이라는 신을 인공호흡으로 살려놓은 것이다. 보편이성의 실체를 더 이상 정초할 수 없게 되자 "담론 과정"이라는 절차적 정당성으로 후퇴했고, 이것을 새로운 원리인 양 포장했다. "소통하라" "합의하라" "보편적 규범을 따르라" — 이 전부가 강자의 손을 묶는 장치다. 그리고 여기서 핵심을 짚어야 한다. "정당성의 재생산"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정당성을 구걸해야 하는 자의 언어다. 진짜 힘이 있으면 정당성을 재생산할 필요가 없다. 정당성을 논증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힘이 빠졌다는 증거다. 하버마스가 한 일은 그 쇠퇴를 직시하는 대신 "절차"라는 새 포장지를 씌워 이성의 임종을 늦춘 것에 불과하다.
인권, 다자주의, 국제법, 규칙 기반 질서 — 세계 최강의 물질적 힘을 가진 나라가 이 프레임에 자발적으로 묶여서, 이길 수 있는 걸 안 이기고, 뽑아낼 수 있는 걸 안 뽑아내고, 자기 힘을 스스로 소진시켜왔다. 그리고 이 제도들은 신성한 원리가 아니다. 제도는 힘의 퇴적물이다. UN 체제, 브레턴우즈, NATO — 전부 미국 패권이 특정 시기에 자기 힘을 운영하던 형태의 스냅샷일 뿐이다. 그 스냅샷을 보고 "이것이 헤게모니의 본질"이라고 우기는 것은,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미국이 강해서 이 체제가 굴러간 거지, 이 체제가 있어서 미국이 강했던 게 아니다. 리버럴이 "제도를 존중하라"고 할 때, 그건 제도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현행 시스템의 옹호다. 힘의 배치가 바뀌어 새 제도가 깔리면, 그때도 똑같이 그 제도를 보편 원리라고 부를 것이다.
미국의 패턴은 이렇다. 이길 때까지 달러를 꼴아박고, 그래도 안 이기면 빠지고, 빠진 뒤에는 할리우드가 패배를 영웅서사로 가공한다. 베트남 다음에 람보, 이라크 다음에 아메리칸 스나이퍼, 아프간 다음에 론 서바이버. 패배가 성찰로 가는 게 아니라 포르노로 소비되면서, 처맞을수록 오히려 "우리는 위대하다"가 재확인되는 순환이 돌아간다. 이건 선민이라서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길 때까지 소모하면서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구조다.
트럼프는 이 구조를 끊으려는 시도로 해석한다. 중동에서 빠지고, NATO 비용을 떠넘기고, 양자 딜로 실익을 챙기는 것 — 노예도덕의 프레임을 걷어내고 힘을 힘답게 쓰겠다는 방향이다. 트럼프 재집권 자체가 미국인들이 비언어적 차원에서 "지금까지 하던 게 안 된다"를 인지했다는 증거다. 다만 레이건을 우상으로 파는 건 웃기다 — 레이건이야말로 달러 꼴아박기 구조를 본격적으로 연 장본인이니까. 처맞은 건 느끼는데 왜 처맞았는지는 모른다는 증거다. 낡은 제도를 뜯어내는 것과 새 제도가 깔리는 것 사이에는 공백이 있고, 그 전환기의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 자체가 힘의 자각적 운용이다. 이란이 리트머스다. 거기서 1년 이상 기존 패턴 — 달러를 꼴아박고 소모전에 빠지는 — 을 반복하면 평가를 바꾼다.
한국 보수우파는 이 전체 구조의 가장 열화된 복사본이다. 미국 세계관의 결론만 수입했지 그 세계관이 어떤 역사적 맥락과 내부 모순 위에 서있는지 모르고, 서구철학의 언어로 자기 상황을 진단할 능력도 없다. 양쪽 다 모르니까 자기가 왜 무너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비판이 들어오면 내용으로 받아칠 언어가 없어서 전부 정체성 공격으로만 수신한다. "윤어게인"이든 "장동혁"이든 자꾸 인물이라는 프록시에 매달리는 건, 본질 — 선거의 정당성, 게임의 규칙 — 에 본인들부터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껍데기만 남은 정체성으로 내용 있는 비판을 막으려 하니까 매번 뚫리고, 뚫릴 때마다 더 격렬하게 정체성에 매달리는 악순환이다.
이 모든 비판의 기준은 도덕이 아니라 자기보존이다. 양키 세계관이든 유럽 철학이든 빨갱이든 아랍이든, 그것이 현실에서 힘으로 작동하면 인정하고 자기를 약화시키면 걷어낸다. 이것이 가장 니체적인 태도다. 니체의 해체는 진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보존을 위한 것이었다. 니체 자신이 기존 도덕과 형이상학을 파괴한 것은 보편적 진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자기 생존의 조건, 자기 고양의 조건을 갉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가치 판단의 기저에는 "이것이 나의 힘을 강화하는가 약화하는가"라는 물음만 있다.
AI 딸깍이라 비문이 좀 있긴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