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살다보면 신앙을 찾게 되는 순간들이 있고, 그럴 때 세속의 굴레에 치이던 우리는 삶을 되돌아보며 성경을 펼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께서 예비 신자 때 받은 교리 공부 이후 강의를 수강한다든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해본 적이 없기에 막막함을 호소하십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경우, 평신도를 위한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강의나 체계적인 과정이 없습니다.


이는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배교가 1960년대에 벌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랍지 않은 일입니다. 일제 시대와 1953년 종전한 6.25 전쟁으로부터 불과 십 년 남짓한 시간 이후 배교가 벌어졌으니, 참된 가톨릭 신앙과 2000년의 유산이 대한민국에 뿌리내릴 시간은 없었다고 봐야합니다.


인터넷과 번역기가 언제든지 사용 가능한 지금도 언어 장벽으로 인해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자료는 해외와 현저한 양적, 질적 차이가 있는데, 과거에는 이보다 더하면 더했을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천주교회는 전반적인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며, 주로 반공적 성격의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1930년대 천주교회는 교회 차원에서 호교론을 정립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이념적 공세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해방 후 전국토가 폐허가 되는 전쟁을 겪으며 교회와 신앙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사회의 전반적인 기조나 분위기, 흐름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톨릭 신앙이 정치와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건축 양식에서도 살아숨쉬던 유럽은 세계대전을 겪으며 세계관의 분절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전쟁의 참상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기에 허무주의와 무신론이 판치게 되는 이유도 있겠지만, 과거 가톨릭 유산을 담고 있던 유럽의 도시와 건축물이 파괴되면서 일종의 쐐기가 됐습니다. 건축학에서 사람과 공간은 서로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을 하며 건축 양식은 문화와 정신을 반영하고, 건축 양식은 담고 있는 가치와 정신을 세월이 흐르더라도 변함없이 이를 표현하고 전승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유럽에서 교회의 쇠퇴는 많은 사상가들이 지적한 대로 벌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고 표현하고 있던 유럽의 건축물과 건축양식, 그리고 “물리적” 유럽이 잿더미가 되며 과거로부터 분명한 분절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본다면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배교는 어디에서부터 뚝 떨어진 재난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한반도도 해방과 전쟁이라는 20세기의 굵직한 사건들을 겪으며 정치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분절이 일어났으며,이는 세계적인 흐름의 일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연이은 집권층의 실정으로 인해 1960년대말 경제공황에 가까운 침체를 겪으며 사회주의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세를 불렸고, 이 때 교회에도 이 세력이 상당수 잠입했습니다. 1960년대의 2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고 1968년 전유럽을 휩쓸었던 68 혁명, 이것들이 바로 오늘날 한국 대립교회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열거된 이 요소들은 가톨릭 신앙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배교자들은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이라며 복음의 단편적이고 편협한 일부분을 차용하나,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배교 이전 교회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사회주의에서 말하는 전복과 반역을 옹립했던 적이 없습니다. 분명 사회주의는 가톨릭 신앙과 상관이 없습니다. 68 혁명 역시 가톨릭 신앙과 상관이 없습니다.


사회주의 사관은 천주님의 주권을 배제합니다. 그러나 천주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나라와 권능과 영광은 천주님께 영원히 있습니다.


68 혁명은 사람을 우주의 중심으로 설정하며, 각자 반역적인 인본주의를 말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사람은 우주의 중심이 될 수 없르며, 항상 창조주를 경외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 한반도 교회가 참된 가톨릭 신앙의 열매를 조금이나마 맺었을지언정, 전화를 겪으며 한반도는 과거와 분명한 분절을 겪었기에 이 정통 신앙의 토양은 영향이 미미하거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오늘날 배교한 한국의 대립교회의 모습은 놀랍지 않은 것입니다.


가장 최근 정의구현사제단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대립교회의 사제들을 보면, 대주교가 4명이고 주교가 4명입니다. 절대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사실 놀라운 숫자입니다. 그러나 이런 한국 교회를 가톨릭을 참칭하는 전세계 대립교회 현황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상황이 안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보편교회이며, 로마를 점거한 배교한 대립교회는 참된 로마의 교계를 모방하기 때문입니다.


독일 주교회의의 경우, 이들이 독자적 교리를 추진하여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분절된 대립교회가 벌써부터 중대한 분열과 내분에 휩싸이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다. 나무로부터 꺾인 가지는 금방 썩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2000년 동안 일치된 신앙을 고백했지만, 배교한 대립교회는 2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백 년도 채 버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참된 가톨릭 신앙을 알고 배울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습니다. 당장 “시국미사”라는 신성모독을 지속적으로 범하는 자칭 성직자들이 넘쳐나는데 신학교라고 별반 다르겠습니까? 아니면 이런 배교에 의욕적으로 앞장서는 가톨릭대학교의 강좌라고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양떼는 참된 목자를 모시고, 참된 목자의 가르침을 더 알고자 합니다. 배교한 로마가 전세계적으로 이를 탄압하고 억압해도, 전세계적으로 젊은 가톨릭 신자와 신부들은 로마의 배교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양떼는 삯꾼 목자, 양의 옷차림을 한 늑대를 알아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논한 어려움 속에서 성경 공부와 묵주기도, 그리고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첫째, 성경 공부는 항상 참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 교부들의 말씀을 경청하며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 성경 공부의 중요성은 개신열교의 영향으로 인해 과대평가됐습니다.


셋째, 성경 공부와 묵주기도 중 우선순위를 지니는 것은 묵주기도입니다. 


첫째, 가톨릭 신자는 항상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성경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나를 이끌어주지 않는다면, 나는 복음서라 해도 믿지 않겠노라.” 


예수님께서는 강생하셔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고,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19-20)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라.


누구든지 성경 해석권을 지니고 있다고 떠들며 성경 말씀을 마음대로 곡해하고, 오독한 내용을 기반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떠드는 추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개신열교에서 말하듯 누구든지 성경 해석권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제자로 삼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과 어떤 상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해석권을 각자 지니고 있는데 누가 누구를 가르칩니까?


개신교의 솔라 스크립투라에 대해 한 가톨릭 호교가(護敎家)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주님께서 오직 성경을 뜻하셨다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문맹이고 책 한 권이 왠만한 연봉에 달하던 시대에 강생하셨겠는가. 개신교에서 말하는 성경 보급이 그토록 신앙의 핵심이 된다면 왜 천주님께서는 사도들로 하여금 금속 활자와 인쇄술을 발명하도록 하지 않으셨겠는가”


즉, 성경은 성전의 일부이며 그 권위는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과 권위를 근간으로 합니다. 애초에 정경 목록을 확립한 것이 가톨릭 교회의 권위이고 교도권입니다. 따라서 성경 공부를 할 때는 사도들과 교부들의 말씀을 경청하며 겸손한 자세로 경건하게 읽어야 합니다. 모든 열교와 사이비 역시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성경 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거짓을 말하는 열교와 사이비가 더 열정적으로 성경을 공부합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교회의 사도들, 성인들, 교부들께서 정죄하는 더러운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성경 말씀을 왜곡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란 힘이 있는 경전이기에, 겸허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읽지 않으면 폐해가 클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성경 공부의 중요성은 개신열교의 영향으로 과대평가된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 공부가 신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열교의 상태와 대체적인 목사의 상태로 답을 갈음하겠습니다. 개신열교는 “오직 성경”을 떠들기 때문에 당연히 엉터리 성경 공부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사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목사가 될 수 있는 개신열교에서는 목사라는 지위가 특별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느슨한 신자 공동체로 해석하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 목사는 성경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더 유창하게 혀를 놀릴 수 있는 능력 하나로 수금을 해야 합니다. 성전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성경 공부 외에는 신앙 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성인들의 통공 역시 부정하며 이를 “교통”이라고 바꿔 부르는 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개신열교는 이런 취약함을 숨기기 위해 가톨릭 교회가 과거 성경을 신자들로부터 감추며 조직적인 우민화 정책을 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정직하지 못한 거짓된 주장입니다.


첫째, 앞서 언급했듯 금속 활자와 인쇄술의 개발 이전 성경 한 권은 매우 비쌌습니다. 많은 이들은 글을 읽을 줄 몰랐습니다.


둘째, 가톨릭 교회만의 악독한 우민화 정책이라면 동시대의 정교회나 그 외 기독교 종파에서는 다른 양상을 보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셋째, 성경을 번역하고 정경 목록을 확립한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입니다.


열교와 언론에 오르내리는 사이비의 특징은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입니다. 궤변과 더러운 비유법, 허접한 도식화를 통해 성경 말씀을 곡해하며 혹세무민합니다. 이것이 바로 엉터리 성경 공부, 유일한 참된 교회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도들, 성인들, 교부들의 가르침에 귀를 닫고 하는 성경 공부의 특징입니다.


열교와 사이비의 우스운 추태를 통해 우리는 성경 공부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필수적 요소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천주님을 경외하고,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성모님께 우리를 이끌어주시길 기도하고, 하늘에 계신 사도들, 성인들, 교부들의 통공을 믿는 신자로서 이분들께도 언제든지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청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지 않던 형제분께서 부름을 받아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대해 더 잘 알고자 한다면, 당장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묵주기도를 해야 합니다.


묵주기도를 하루에 5단이라도 매일, 꾸준히 바치시고 묵주기도의 신비를 묵상하며 예수님과 성모님의 수난을 통해 구원의 신비와 성경에 담긴 지혜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청하십시오.


라살레트의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조금도 두려워 말고 가까이 오너라. 나는 너희에게 중요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만일 나의 백성이 순명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아들의 손을 더는 잡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손은 너무나 강하고 너무나 무거워서 나는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이나 너희를 위해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나의 아들이 너희를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 점에 대해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는구나.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위해 당하는 괴로움의 백 분의 일도 기워 갚지는 못할 것이다.”



루치아 수녀께서는 푸엔테스 신부에게 파티마의 성모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신부님, 그래서 제 임무는 세상이 기도하지 않고 미리 회개하지 않았을 때 도래할 물리적 형벌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 사명은 우리가 죄의 길을 고집한다면 영원히 우리의 영혼을 잃게 되는 임박한 위험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신부님, 우리는 보속하라는 성하의 부르심을 기다리지 않아야 합니다. 교구에 있는 주교들이나 교회의 회중으로부터  참회를 요구할 때까지 기다려서도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천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여러 차례 부르셨고 세상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에 이제 우리는 각자 영적 개혁을 시작해야 합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천주님께서 우리의 길에 놓으신 모든 영혼까지 구원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신부님,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의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직접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세 가지 이유로 마지막 세상에 살고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첫째, 성모님께서는 악마가 천상모후께 대항하며 결정적 전투를 벌이려고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결정적인 전투는 한쪽은 승리하고 다른 한쪽은 패배하는 마지막 전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천주님과 함께 하든지 악마와 함께 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그 외 선택지는 없습니다.


둘째, 성모님께서는 저분만 아니라 제 사촌들에게도 천주님께서 이 세상에 두 가지 구제책을 하사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거룩한 묵주기도와 티없으신 성모성심을 향한 헌신입니다. 이 두 구제책은 마지막 구제책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곧 더 이상의 구제책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천주님께서는 세상을 벌하시기 전 모든 구제책을 쓰십니다. 이것이 천주님의 섭리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듣지 않을 때, 천주님께서는 마지막 구원의 길인 가장 거룩하신 어머니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 길을 따르지 않고 증오하며 거부한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용서를 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모독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 죄는 이성과 자유의지로 천주님께서 하사하시는 구원의 길을 거부했을 때 저지르는 죄입니다. 성자께서는 어머니를 무척 사랑하시는 아들이시며, 그분의 가장 거룩하신 어머니를 모독하고 증오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세기의 교회 역사를 통해 가장 거룩하신 어머니의 영예를 욕보인 자들에게 어떤 끔찍한 형벌이 내려졌는지 기록하고 있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머니의 영예를 변함없이 지키신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1. 가장 거룩한 묵주기도


2. 티없으신 성모성심을 향한 헌신


세상에 남은 마지막 두 구제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묵주기도를 하고, 티없으신 성모성심을 보다 잘 알고 기도하며 묵상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묵주기도를 통해 천주님을 경외하고 성자의 수난과 구원의 신비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어머니께서는 항상 사랑하는 아들의 길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묵주기도는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만을 바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5.04.05.

형제단 복음화부장

김 베네딕토 드림








<참조>


1. http://suwons.net/f-5-42.htm

2. https://www.unipres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967

3. https://fatima.org/silencing-of-the-messengers-father-fuentes-1959-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