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여를 키운 건 팔 할이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 차순녀 여사(데레사·1909∼1998)는 딸만 둘 낳았다. 손이 귀한 전주 이씨 집안에서 차 여사와 딸들(이귀례·85·한국차문화협회이사장과 이길여 회장)은 천덕꾸러기나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미운 오리새끼였다.

둘째 이길여는 더 심한 구박덩어리였다. 온 집안이 잔뜩 아들을 기대했다가 한순간 초상집분위기로 변했다. 어머니는 출산 후 곧바로 밭일을 나가야 했다. 할머니는 “무슨 벼슬을 했다고 미역국이냐”며 미역가닥을 마당으로 내던져버렸다. 이길여는 그렇게 태어났다. 누구 하나 축하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때 이 아이를 이 세상 그 어느 아들보다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고 한다. 나도 커가면서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 되고야 말 것’이라고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뭔가 가슴에 쌓여서 그랬을까. 난 여섯 살 될 때까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말문이 터졌다. 청산유수가 따로 없었다. 대야초등학교에 입학한지 석 달 만에 반장을 하고, 그때부터 이리여고시절까지 줄곧 1등을 달렸다. 여학교는 하마터면 못갈 뻔했다. 아버지(1913∼1948)와 할머니가 결사반대였다. ‘가시내가 글자만 깨우쳤으면 됐지, 많이 배워봐야 팔자만 드세다’는 거였다. 그때 어머니가 나섰다. ‘내가 머리카락을 잘라 팔고, 두부 장사를 해서라도 여학교에 보내겠다’고 결연히 맞섰다. 그리고 밥도 못 먹고 불안에 떨고 있던 나에게 ‘걱정마라. 내가 대학도 보내주고, 유학도 보내주고 다 해줄 테니. 넌 맘 푹 놓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다독였다. 그렇다. 날 여자로 낳아주신 어머님께 한없이 감사하다. 여자로 태어난 게 무슨 죄인가. 아니다. 여자로 태어난 건 행운이다. 엄청난 특권이고 행복이다. 난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날 것이다.”


뒤진다진짜

죽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