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내에 딸린 북카페에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두 잔이 놓인 창가 테이블.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른 지 정확히 20분째다.
그 이유는 서로 있어보이려는 첫 문장을, 첫 운을 찾기위해 아직 대화를 시작조차 안했기 때문이다.
좌로로 : (네팔산 직물의 에스닉한 튜닉-젤다 링크가 입을법한 옷임, 테무에서 산 은빛 깃털 귀걸이.
허공을 응시하며 난해한 가사를 속으로 읊조리는 듯 입술만 달싹인다.) 좌로로롭.. (커피 쳐마시는 소리)
홍어경 : (최대한 무해하고 동시에 지적인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자세를 유지한다.
결심한 듯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벽면에 꽂힌 양장본들을 지그시 응시한다. )
홍어경 : 침묵이라는 텍스트를 읽어내는 데 무려 20분이나 걸렸군요.
우리는 지금 이 서점이라는 공간이 허락한 가장 아름다운 여백을 공유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좌 : (거대한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여백… 그래요.
제 3집 앨범의 4번 트랙 브릿지 부분에 들어간 12초간의 쉼표와 정확히 같은 주파수네요.
(여자가 테이블 위로 상체를 살짝 기울인다.
귓가의 깃털 귀걸이가 짤랑거린다.)
좌 :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무의미 속에서 유기농처럼 피어나는 감정의 발아랄까요.
배우님도 그 결을 느끼셨군요.
홍 : (턱을 매만지며 단어를 음미하듯) 유기농.
참으로 말끔하고 정돈된 단어입니다.
저는 최근 베란다에서 바질을 키우며 대지의 서사를 읽고 있습니다.
(홍어경의 시선이 창밖의 가로수를 향한다.)
홍 : 흙을 만질 때마다 평소 즐겨듣는 인디 밴드의 베이스라인이 시각화되는 듯한 공감각적 체험을 하곤 하죠.
배우라는 직업이 주는 상업적 굴레에서 벗어나
가장 무해한 자아를 마주하는 시간입니다.
좌 : (깊은 영적 교감을 나누는 눈빛으로) 대지의 서사라니 너무 훌륭해요. (병신 ㅋㅋ)
사실 제 가사들도 그런 플라스틱 사회의 원초적인 반동을 노래하고 있거든요.
현대인의 고독은 결국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추출되는 크레마의 얕은 두께와 다를 바 없으니까요.
그 덧없음을 어쿠스틱 기타의 6번 줄에 담아내는 게 제 소명이죠. (ㅇㅈㄹ)
홍 : 정확합니다. 우리는 크레마처럼 부유하고 있죠.
서로의 말에서 아무런 실질적 의미도 찾지 못하지만 표정만큼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대담처럼 비장하다.
정작 서로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지적 허영을 채우기 위한 무의미한 잡담이 병신같이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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