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대도시, 테헤란을 걷다 보면 수많은 공동 묘지가 있습니다.

 뭐, 공동묘지 정도야 별거 있겠나 싶지만, 이 묘지는 조금 특이합니다. 뜬금없게도, 폴란드인들이 이 묘지를 많이 찾고 있기 때문이죠.

 거기다가, 사망날짜가 월/일 표시도 없이, 모두가 똑같이 '1942'라는 년도로만 통일되어 있습니다.


 이쯤되면 어느정도 추측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낳은 수많은 비극 중 하나의 유산이죠.


 폴란드는 마치 지난날과도 같이 찢겨버렸고, 독일은 독일 나름으로, 소련은 소련 나름으로 학살과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독일의 만행이야 워낙 유명하고 잔혹하니 넘어가고, 저 묘지와 관련이 있는 동시에 나치보다야 아주 아주 약간 나은 수준인 소련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 일단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사람 - 대체로 소련식 공산주의가 븅신이라는것을 인지하는 사람이라는걸 뜻합니다. - 들은 죽여서 숲속에 파묻거나 아니면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로 쳐박았고, 그외에 그냥 폴란드인이기만 했던 민간인 수백만도 집에서 끌려나와 집단 수용소에 분산 수용되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과정에서 수천명이 죽어나갔습니다. 학대, 질병, 영양실조, 또는 고의적인 살해 등. 원인이야 차고 넘쳤죠.


 소련은 머리가 조금 있는 폴란드인은 여어어어엉원히 그들의 가족과 함께 시베리아에 쳐박아두고자 하였습니다.
 

 





 하나, 상황은 그리 녹록치 못했죠. 소련에게나 폴란드인들에게나요. 

 아돌프 '씨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습니다.

 소련군은 거의 자동문이었고, 독일군은 나폴레옹 모스크바로 달려오듯 러시아 영토 곳곳으로 신나게 달려왔지요.


 일이 이렇게 되자, 스탈린과 그 똘마니들은 잔머리를 굴립니다. '저 처치 곤란 폴란드'인들을 어떻게 해결해야할지요.

 그러다가 어떤 개자식이 묘안을 내놓았습니다.


 '연합군에 의해 조직될 중동 연합군에 합류하라! 그러면 자유를 주겠다!" 라고 선전하는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런건 없었습니다만 어쨌건 시베리아에 있는것보단 낫다고 보았던 폴란드인들은 굶주린채 머나먼 우즈베키스탄으로 걸어갔죠.


  



 솔직히 말해서 유대인들의 죽음의 행진과 별 다를것도 없었습니다. 식량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고, 옷이나 담요같은것도 마찬가지로 없었습니다.

 수천의 사람들이 이 행군동안 동사하거나 아사하거나 병사했습니다.


 어떤 경우엔, 자신의 아이를 판매하여 하루 먹을 빵을 얻었다고도 합니다.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도처에 널려있던 여정이었죠.


 그러나, 마침내 폴란드인들은 우즈베키스탄의 임시 육군 캠프에 도착해, 어쩌면 중동으로 밀려올 나치와 싸우기 위해 폴란드 군에 입대하려고 기지 밖에 진을 치고 기다리기 시작했지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제서야, 폴란드인들은 자기네가 속았다는걸 알아차렸지요.


 소련은 열악한 난민 캠프에 이들을 수용했습니다. 연령? 성별? 가리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개의치 않고 마구잡이로 배치하였습니다. 콜레라 환자? 장티푸스 환자? 그래서 격리해야한다구요? 허, 소련은 이마저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기껏 힘든 여정끝에 도착하였음에도 의미없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1942년이 되어서야 스탈린이 이들을 이란으로 보내기로 합의를 봄에 따라, 폴란드인들에게는 겨우 살길이 열렸습니다.

 1942년 3월 24일부터 4월 5일까지, 그리고 8월 10일부터 8월 30일사이의 두 차례의 피난에서 11만 5천명이 이란으로 대피하였습니다.


 


(소련 유조선에 욱여넣어진 폴란드 난민)


 배는 초만원. 갑판부터 선실까지 온통 비쩍 마른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죠.

 도착 직전까진 이 사실을 전혀 몰랐던 영국 군인과 이란 관료들은 배에서 우르르 쏟아져 내리는 폴란드인들을 보고 나서야 소련인들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지요.


 


(막 이란에 도착한 폴란드 어린이들)


 어쨌건, 폴란드인들은 마침내 자유를 찾이하였습니다.


 십수만의 폴란드인들을 거주케 하기 위해, 이란은 수천개의 텐트를 설치했고, 이로도 부족하자 도시의 모든 빈집을 제공하고 영화관의 의자까지 뜯어서 지원했습니다.


 



(반다르에팔레비 항에 설치된 폴란드 난민캠프)


 그러나, 부족했습니다. 아무리 이란인들이 노력하여도, 나치와 소련이 이 난민들에게 남긴 악몽과도 같은 낙인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던겁니다. 

 39년 이래로 제대로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던 이들의 몸은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었고, 작게는 독감부터 크게는 피부 괴사나 실명까지 온갖 병으로 얽어져 있었고, 거기에 이질이나 장티푸스 따위의 전염병은 못이라도 박아대듯 폴란드인들을 픽픽 쓰려뜨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난민들을 관리하기 위해 임명된 에스파디아리 장군은 장티푸스를 해결하기 위해 수용소 분할부터 전염병을 가진듯한 모든 난민들은 병원으로 보내는 등으로 상황을 진정해보자 하였으나, 당시 난민캠프 주변에서 끌어 모을 수 있는 자원은 매우 빈약했고 - 난민이 10만인데, 의사는 단 10명이었습니다. 간호사도 25명. - 수용자들의 몸 자체도 전염병에 버티기엔 너무 약해져있었습니다.


 결국, 3000여명에 가까운 난민들이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고,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너무나도 상황이 혼란스러웠고 열악했기에 이들은 대부분이 이름과 사인, 그리고 사망 일시도 모른채 묻혀졌고, 어쩔 수 없이 '1942년'에 사망한것으로 동일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전염병이라는 재난이 끝났으니, 고난은 어느정도 끝난것 같았지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수용소의 식단이라고 해봐야 아주 빈약했고, 자연히 폴란드인들의 위장도 매우 약해진 상태였습니다.

 영국인들은 선의로 쇠고기 조림과 기름진 수프를 제공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또 적지않은 수가 과식이나 소화불량으로 죽어나갔습니다.


 


(이란의 고아원의 폴란드 어린이들)


 

 그리고 이 와중에서 조금은 뜬금없지만, 폴란드인들은 이란에 호감을 가졌습니다. 사실 그럴만도 했습니다. 자신들도 소련과 영국에 분할 점령된 상태로 조국의 독립을 위협받고 물자는 징발당하던 상황임에도, 최선을 다해 폴란드인들을 도와주었거든요.

 당장에, 테헤란을 방문한 런던의 망명 정부 소속의 사령관 요세프 자야크는 '이란인들이 영국인들이나 러시아인들보다 훨씬 친절했다.'고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심신에 상처를 입은 폴란드 고아들을 위해 쾌적한 자연환경을 가진 이스파한에서 고아들의 치료를 해주어야 한다.'라는 결정이 나자, 일만명에 가까운 고아들을 위해, 이스파한의 수많은 이란인들은 아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부지를 비워주었고, 고아들을 지원하기 위해 학교와 병원을 지어주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젊은 왕이었던 모하마드는 자신들의 궁전으로 폴란드 아이들을 초대해 수영장을 이용하게 해주거나 식사를 함께 해주는 친절을 선사하여주었며, 이스파한을 '폴란드 어린이들의 도시'로 키웠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개인 정원조차 난민들을 위해 내어주었지요.




(난민캠프의 내부. 아주 좋지는 않지만, 최소한 이곳에서는 폴란드 인들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건강하고 젊은 남녀는 자유 폴란드군에 합류하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이란에 살았습니다.




(폴란드인들의 이란 망명 생활을 기록한 책 Invited. 이란인들의 따뜻함이 잘 묘사된 책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전이 끝나고, 폴란드 난민들이 마침내 자신의 고향 - 또는 다른 공산화 되지 않은 곳으로요 - 돌아가게 되었을때, 이들은 이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아직도, 페르시아식 이름인 '다리우스'가 폴란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남자 아이의 이름으로 선정될 정도지요.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어려운 시대, 비슷한 환경에서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두 나라 사람들이 부둥켜 안아준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습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ak497924/221127446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