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6년 11월 12일에 작성되었고 프랑스의 식민지사에 대한 인식을 알아 보려 몇 개의 사건과 발언들을 발췌하여 모으고 이에 대한 보론을 실은 글임.

프랑스인 의사의 아프리카인에 대한 모독 이야기가 나오길래 이 글을 떠올렸고 여기에 올려 봄 


나는 와데 대통령이 제발 보르도에만은 가지 않기를 바란다! 이 도시엔 대로는 물론 인적 드문 작은 길, 광장,기념 건축물 할 것 없이 대다수가 17세기와 18세기에 활약한 노예 무역상들, 즉 선주들이나 흑인 노예선 선장들에게 바쳐졌기 때문이다. 피에르 바우르 가, 존슨-기욤 광장, 르텔리에 가, 다비드-그라디 가, 존-루이 브라운 광장, 피에르-데스 가, 프랑수아-보나페 가....

 프랑수아 보나페는 흑인 노예 무역 회사인 롬베르그 앤 바티스트사의 동업자로 1723년에 태어나 1809년에 사망했다. 18세기 후반 내내 그는 이 지역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지닌 노에 무역상으로 군림했다.

 윌리엄 존스턴은 아일랜드 출신의 가난한 젊은이로 ‘무역’ 일을 배우기 위해 보르도에 왔다. 그는 프리메이슨의 일종인 라미티에의 책임자에 오른다. 제르메 형제와 손잡고 1741년부터 1743년 사이의 흑인 노예무역을 통해 많은 이익을 남긴 덕분에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1801년부터 1805년 까지 보르도의 시장으로 일한 자크 르텔리에는 1788년, 1789년, 1791년 이렇게 세 차례에 걸친 원정으로 거대한 부를 쌓은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우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주이기도 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의 활동상을 기술적인 용어로는 ‘무장 무역’이라고 한다. 선박들은 아프리카 땅에 도착하면 노예 사냥꾼들이 될 병사들을 가득 태우고 베냉, 가나 혹은 콩고 강 유역을 향해 출발한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선장들은 ‘원정’을 벌여 배에 인간 수하물을 잔뜩 실은 다음 아바나, 뉴올리언스, 바이아의 살바도르 등지의 시장에서 판다. 인간 수하물을 내려 놓고 돌아오는 길에 설탕과 귀금속 등을 사서 싣는다. 나중에는 커피도 이들이 선호하는 상품이 되었다.

 피에르 바우르는 무역으로 부를 일군 영향력 있는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수십 년 동안 산토 도밍고에서 노예무역을 관리했다.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그의 창고에서는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수천 명의 성인 남녀는 물론 어린아이들까지도 팔려나갔다.

 보르도 시민들이 노예무역이라는 집단 학살과 다름 없는 행위에 가담한 자들을 이토록 기리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오늘날 보르도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자신들이 저지른 대량 살상에 대한 서양인들의 무지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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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코지 대통령은 단도직입적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젊은이 여러분, 나는 참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이곳애 온 것이 아닙니다.”

 이윽고 그는 식민지 지배자들을 복권시키려는 의도가 역력한 장황한 연설을 시작했다. “식민지 지배자들 가운데에는 나쁜 사람들도 있었지만,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 문명을 전파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잘못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진실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반계몽주의와 미신, 예속의 사슬을 끊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저항과 증오의 씨앗을 뿌리는 줄도 모르면서 사랑을 주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식민화 정책은 모든 것을 준다고 믿었으며 그런데도 왜 상대방이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겪은 통한과 고통을 통해 이미 대가를 치른 과오입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은? 사르코지 대통령은 정녕 그것을 모른단 말인가? 아니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이 고통받았음을 인정하지만, 그 고통을 식민지 지배자들의 행위 탓으로 돌리기를 거부한다. “검은 피부의 인간들. 내가 말하는 건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지 않는 총체적인 인간을 가리키며, 따라서 이들의 고통은 모든 인간의 고통입니다.”


 순식간에 강당은 충격에 휩싸였다. 청중들은, 심지어 그 자리에 있던 백인들까지도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노예들에게 쇠사슬을 채운 건? 그들을 굶주림에 시달리게 한 건? 점령당한 마을에서 외인부대원들에게 집단으로 학살당한 아녀자들은?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이 처한 상황적 조건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그걸 가지고 더 왈가왈부할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학살, 약탈, 식민지 정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모든 파괴 행위는? 강제 노역, 십장이 정해준 목표량을 채우지 못한 고무 채집자나 면화 노동자들의 잘린 손목은? 그건 단순한 ‘과오’라고 사르코지는 응수했다.


 노예제도? 식민지 피지배자들의 대량 학살? 그건 물론 고통스럽긴 하지만,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에게 ‘공통된 운명’이다. 가해자와 희생자가 같은 고통을 당하다니! 특히 이 고통스러운 운명이 ‘공통’의 운명이었으므로, 가해자들은 사과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무지의 소치일까?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술수일까?


 니콜라 사르코지는 아프리카인들에 대해서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음이 확실하다. 아프리카인들은,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로지 자연의 법칙만 따르는 사람들로서, 여우언히 새로 시작해야 하는 지친 시시포스, 미래를 빼앗긴 시시포스들이다.

 아프리카인들은 역사 밖에서 산다. 진보라는 개념은 아프리카인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특수한 운명이란 말인가? 아니, 그들은 운명조차 빼앗겼다고 봐야 한다.


 사르코지의 말을 들어보자. “아프리카의 비극은 아프리카인들이 역사 속에 확고하게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프리카 농부들은 수천년 전부터 계절과 더불어 생활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이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며, 똑같은 몸짓과 언어가 끝없이 반복되는 리듬을 따라가는 영원한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것은 항상 다시 시작된다는 세계관 속에는 인간의 모험이나 진보라는 개념이 들어설 자리라고는 없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은 결코 미래 속으로 뛰어드는 법이 없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은 결코 미래 속으로 뛰어드는 법이 없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은 반복으로부터 빠져나와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의 문제는, 아프리카의 친구로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걸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겁니다. 아프리카의 도전은 좀 더 적극적으로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역사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간단하다. 서양이 하라는 대로 따르면 된다.


 서양은 주인이다. 서양의 문명은 지구 전체로 확산되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 특별히 아프리카인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이 식민지가 되었던 건 오히려 행운이었다. 식민화 정책은 ‘과오’였다. 그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득이 되는 과오였다. “이러한 과오(식민지화)가 저질러지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잘했건 못했건 식민지 정책은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아프리카의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은 서양이 아프리카의 심장과 영혼에 가져다준 모든 것의 계승자입니다.”


 식민지 지배자들, 외인부대, 선교사, 도형수 간수, 농장의 십장들이 아프리카의 영혼에 ‘가져다준’ (이 얼마나 교묘한 말인가!) 서양 문명은 오늘날 지구의 문명으로 뿌리내렸다. “아프리카의 젊은이 여러분, 두 눈을 크게 뜨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조상들이 자주 그렇게 했던 것처럼 더 이상 세계 문명을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지 마십시오. 그 문명은 여러분에게도 속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사르코지 대통령이 아프리카 흑인들의 정체성과 관련된 ‘신화’에 대해 언급하자 장내는 순간 소란스러워졌다.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종합해보면, 현재 검은아프리카 대륙이 안고 있는 고질은 모두 그들 탓이었다.


 사르코지가 강연한 곳은 셰이크 안타 디욥 대학이었다. 그런데 이 안타는 셍고르(세네갈의 초대 대통령)와 더불어 아프리카 흑인만의 고유하면서 꺾을 수 없는 정체성을 옹호하고, 독자적인 경제 발전의 중요성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안타는 특히 이집트의 초기 파라오 왕조의 조상이 아프리카 흑인들이었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의 저술은 여러 세대를 이어가면서 아프리카 대학생들에게, 특히 세네갈 출신 학생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현재까지도 통찰력을 인정받고 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청중들 앞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은 안타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아프리카의 젊은이 여러분, 순수성의 유혹에지지 마십시오. 그건 하나의 질병입니다. 지성의 질병이며,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위험한 질병은 없습니다. 순수성에 대한 신화는 아프리카의 현실을 직시하는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성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음에도 자신들이 만들어낸 신화 속에 갇혀 성공하지 못하는 거대한 대륙,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직시해야 할 아프리카의 현실입니다.”


 강도 높은 연설을 마무리 짓는 단계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은 가장 상스러운 궤변을 늘어놓았다. “여러분은 아프리카 땅에 더 이상 기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까? 여러분은 아프리카 땅에 더 이상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이 없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룩하십시오. 식량 재배를 발전시키십시오. 아프리카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식량을 생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원하는 것이라면, 아프리카의 젊은이 여러분, 여르분은 아프리카의 미래를 손 안에 쥐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는 그러한 미래를 건설하는데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 


 오사레스 장군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쟁이었던 ‘알제리 전쟁’ 때에 자신이 자행했거나 또는 자신의 휘하 병사들이 자행한 고문과 전쟁범죄에 대해 언급한 책을 출판한 이후, 프랑스 대통령에 의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그는 <전쟁 범죄를 옹호한> 것에 대해 그의 책을 출한한 두 출판사와 함께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또 두 출판사와 마찬가지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고소조항만을 살펴보더라도 판결결과는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판결문에 들어 있는 다음과 같이 매우 중요한 내용을 보면 판결의 수위가 상당히 낮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 속에 묘사된 그대로의 고문과 약식 처형은> 전쟁 범죄라는 개념이 <분명하게 적용되는> 행위이며, <법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그 행위는 <프랑스 정부의 고위 군 정치 당국자들이 자행하고 묵인한 것으로 보인다.>라는 등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우이 판결이 내려질 당시에는 ‘알제리 전쟁’이 끝나고 제정된 사면법 때문에, 알제리 전쟁 중에 자행된 행위들을 대상으로 한 모든 고소는 어떤 종류의 사법적인 절차로도 이어질 수 없었다. 그것이 오사레스가 자행한 행위를 대항으로 한 고소든, 아니면 1957년에 루이제트 이길라리즈를 고문하거나 당시에 프랑스 군인들에게 체포된 알제리 독립운동의 지도자 라르비 벤 음히디를  살해한 사건 등과 같은 다른 범죄행위를 대상으로 한 고소든 간에 말이다.


드디어 발췌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내가 내 글을 쓰는 시간이 왔음. 뭐 그래봤자 이번에는 평소보다 짧은 내용의 글이 될 테지만. 암튼 간밤에 프랑스의 과거사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세 개의 글들을 발췌해서 올렸음. 일단 굳이 그 글들을 고른 이유를 말하자면, 첫 번째 글은 프랑스 사람들 일상 속에서의 과거사 식민지사 미화의 예시로서, 프랑스 사람들이 상당히 과거 문제에 대해서 둔감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올렸음. 두 번째 글은 사르코지의 연설문이었는데, 대통령이 무조건 그 나라 국민 ‘모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가지는 상징성에 주목해서 사르코지의 시각을 보여줌으로서 상당히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과거에 대한 미화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려고 했음.


 그리고 이 세 번째 글, 여기에 대한 보강 설명으로 본론을 열겠음. 일단 이 사면법이 생겨나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할 필요가 있음. 사실 이 사면법은 알제리-프랑스 간 정전 협정인 에비앙 협정의 결과물 내지는 부산물이었음. 그와 관련된 협정의 조약을 보면 “종전이 선언되기 이전에 알제리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과 함게 저질러진 행위들 때문에 어느 누구도 괴롭힘을 당하거나, 조사를 받거나, 소추를 당하거나, 형을 선고받거나, 어떤 종류의 징계 또는 차별도 받을 수 없다.” 라고 되어 있음. 당장 보기에는 상당히 이상해 보이는데, 그 이유는 알제리 전쟁의 복잡성에 있었음. 보통 알제리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프랑스가 알제리 사람들한테 가한 악행들이 강조되지만, 사실 알제리의 독립세력들도 하르키(쉽게 말해 친불파)와 그 가족들에 대한 재판 없는 무차별적 학살과 같은 여러 악행을 저질렀음. 그렇기 때문에 양쪽 다 불편한 진실들을 감추고 있었기에, 이런 납득하기 힘든 조항이 통과될 수 있었던 것이었음. 그런데 프랑스는 여기서 8차례의 사면조치와 법령 제정을 통해서 사면 조치를 점차 넓혀갔음. 1982년에 제정된 법은 이전에 처벌받았던 비밀군사조직(약칭 OAS, 알제리 무슬림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를 저지른 비밀 조직. 알제리와 프랑스 양 측의 보복 행위들을 가속화한 트롤링의 프로였음)의 장교들이 모두 복권되었고, 2005년에 제정된 법에 의해 이 사람들은 연금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음. 


 법 제정을 통한 프랑스의 과거 미화 사례는 이 이외에도 찾아볼 수 있음. 2005년 2월 23일, 아주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법령이 제정되었음. ‘식민지로부터 모국으로의 송환자들에 대한 국가의 인정과 이들을 위한 국가의 공헌’이라는 제목의 법안 이었는데, 이 법안의 내용 중에는 ‘학교 교과 과정은 프랑스가 해외, 특히 북아프리카에 진출하여 수행한 긍정적인 역할을 특별히 인정하도록’강제하는 조항이 들어가 있었음. 이 법안의 의미는 매우 큰데, 국가 차원에서 식민지를 미화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강제 주입시키려는 시도였기 때문이었음. 물론 프랑스의 역사학자, 교사 그리고 시민들은 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고, 알제리의 부테플리카 대통령 또한 이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비판했음. 그리고 결국 다음 해 이 조항은 삭제되었고, 시도로 그치게 되었음. 이 때 이 조항은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자크 시라크의 소속당인 UMP(-대중운동연합, 현 공화당으로 사르코지의 소속당이기도 함)의 주도로 이뤄졌는데, 이러한 거대 우익 정당에서 이 담론이 힘을 얻을 정도로 프랑스 우익들 사이에서 식민지사에 대한 미화된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음을 볼 수 있음. 


보론. 저기서 안타 디욥 이라는 사람이 중간에 나오는데 이분이 주장한 초기 파라오 흑인설은 현재로서는 다시금 부정된 이론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 본  아프리카의 역사에서 아프리카인들이 본 아프리카의 역사로 관점을 옮겨오는 것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함께 언급되는 인물이 세네갈의 국부로 인정받는 레오폴 상고르인데, 이 사람은 프랑스 한림원 종신 회원직을 가졌을 정도로 뛰어난 문학가였고 심지어 프랑스 본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직까지 역임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게다가 2차 대전기에는 장교로 참전하십니다. 

그럼에도 그런 그마저도 식민지인들에 대한 차별을 느꼈고 아프리카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기초가 되는 네그리튀드라는 개념을 만듭니다. 그와 더불어 독립 이후 경제 개발을 위한 대통령 중심 독재 제도를 만들고 독재를 이어나갔는데, 말년에는 다당제 민주주의가 가능한 환경까지 조성하고 민주 정부에 정권을 이임하였습니다. 그 덕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은크루마와 같은 동료 운동가들과는 달리 만년을 존경 속에서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