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의 방어체계는 전력의 핵심을 국경에 두는 ‘국경중심의 방어체계’였다. 침입 해 들어오는 외적을 국경에서 막아낸다는 것이 당대인들의 기본 시각이었다. 이러한 방어체계는 200년 간 큰 변화없이 유지되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그 문제점이 드러났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도성이 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중심의 방어체계는 기본 전략으로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도성 주변 특히 경기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성곽 을 축조하여 도성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623년 3월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과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을 왕 으로 옹립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인조반정은 일부 서인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모면하기 어려웠다. 이는 반정 자체가 지니는 약점에 내재된 것이었다. 재위 중인 군주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군주를 세운 행위는 항시 역 쿠데타를 야기시킬 가능성과 빌미를 제공하였다. 이에 권력을 장악한 서인은 역쿠데타를 대비하기 위하여 군사력 강화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인정권은 친명배금정책 강화에 따라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할 필요성을 절감하 였다. 후금의 세력 확장에 따라 조선의 국경방어 중심은 함경도에서 평안도로 전환되었다. 인조는 장만을 도원수로 임명 하고, 이괄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평안도 지역 병력을 집중적으로 보강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서로(西路) 지역의 병력 3만 명을 중심으로 방어체계를 갖추도록 하고, 하삼도(下三 道)의 번상 병력 5,000명을 부원수 이괄 휘하에 둠으로써 15,000명을 전략 예비병으로 확 보하였다(盧永九 2010, 214). 그리고 호위청(扈衛廳) ·어영청(御營廳) 등 새로운 군영을 창설하여 중앙상비군을 강화하고, 경기지역의 지방군을 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이에 인조 초년에는 수도권 방어를 위한 중앙상비군으로 훈련도감(訓練都監)군 2,700명, 호위청군 500 명, 어영청군 260명, 수원(水原)·장단(長湍)·양주(楊州)군 3,000명 도합 약 6,500명 선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서북 지역에 배치된 군사가 약 45,000 명이고, 중앙상비군이 약 6,500명이었던 점에서 여전히 국경중심의 방어체계가 유지되었다 고 할 수 있다. 이괄의 난 이후 수도권 방어에 큰 변화가 감지된다. 중앙상비군인 호위청, 어영청, 총융 청(摠戎廳) 의 군사가 대폭 증강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어영청의 변화가 특징적이다. .......이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방어체계는 국경중심에서 수도권중심으로 뚜렷이 전환되었다. 수도권의 방어가 강화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서북지역의 방어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괄의 난 이후 서북지역의 방어력이 급속히 위축되었다. ....
이상훈, 인조대 이괄의 난과 안현 전투,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한국군사학논집 69
군사정책을 수도권 중심으로 바꿔버림. 사실 이괄의 난때 한성이 너무 맥없이 날라가 버린 영향이 크긴한데 병자호란 뒤에서 이 정책이 그대로인걸 보면 아마 조정에서 중앙군에 좀 더 집중테크 타는게 더 나았다고 판단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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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조선이 경험빨인 북방군이냐 전문집단인 중앙군이냐 에서 후자쪽을 선택한거로 보임. 여차 하면 나선정벌 처럼 중앙군이 정벌뛰로 가도 되고. 원래 북방지역 정벌은 중앙군 보다 북방군쪽이 훨씬 많이 뛰었거든.
공감 한다 ㅋㅋㅋ 원래 조선군 봉화체계 같은게 노답이긴 했는데 전쟁 대비한다고 너무 수도권 경비시스템만 집중관리했음. 관리가 어렵긴하지만 고걸로 쉴드가 안되지
알못 뇌피셜이지반, 이괄의 난으로 국경지 병력들 잃은게 너무 컸지싶음. 기존 국경 중심책을 유지한들 그 지역 병력들이 갈려버렸는데, 다른 병력들을 무턱대고 올릴 수도 없고 도성 방어를 강화하긴 해야하니
조선이 재수 없던거긴 한데 정예병 1만 2천이면 정상적인 상황에서 10년이면 충분히 복구가 가능함. 심지어 저기 어영청만 해도 거의 두배 가까이 증원되는데. 하지만 난 직후에 우창이나 기근때문에 조선 재정상 국경에 대한 집중 관리가 어려웠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