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47


그림 48



기시 중위는 계속 구축함 마츠에 있었지만, 1918년(다이쇼 7년) 3월 말 제2전투함대 소속 구축대의 변경이 있었다. 10, 11, 15구축대가 각각 22, 23, 24로 구축함 마츠는 23구축대 소속이 됐다. 기시 중위는 그 뒤에도 기항지에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그림 엽서 등(그림 47알렉산드리아, 그림 48마르세유)를 고향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서부 전선에서 그 해 4월 9일부터 독일군은 대공세를 개시했다. 에누 강변의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5월 말에 마른 강까지 도달했다. 7월에는 랜스 서남 마른 강가와 샹파뉴 방면으로 50개 사단으로 공격하고 파리로 진격을 계속했다. 이들 서부 전선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서에 중동·아프리카 방면에 전개하던 연합군 부대의 서부 전선 투입이 필요했다. 그것에는 알렉산드리아에 집결하는 10만여 명의 병력을, 피스톤 수송으로 마르세유까지 보내야 했다. 제2전투함대에서는 그 대선단의 호위를 맡게 되어, 동년 4월 11일부터 7월 17일까지 집중적으로 알렉산드리아-마르세유 사이에 영국의 대수송선단의 호위(왕복 5회, 총 58척, 병력 수십만 명)를 하여 서부 전선의 병력 증강을 지원했다. 이에 힘을 얻은 영프군은 솜 강 및 오아즈 강 방면에서 독일군을 추격, 8월 들어 점차 형세를 역전시켰다.





그림 49


그림 49는 기시 중위가 대선단 호위 작전 종료 후 7월 25일자로 보낸 군사 우편이다. 요코하마사 23구축대 마츠라고 되어 있고, 인수사들은 요코하마에서 빗형-요코하마/7.9.12./예 3-4가 찍혔다. 문면에는,"이 지중해에서의 생활도 익숙해져서 걱정하지 않으며, 또 곧 임무교대를 해 11월 현지에서 출발해, 12월 하순에는 귀국할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시 중위는 11월 1일호에서 구축함 마츠에서 제2전투함대 사령부에 돌아갔고 귀국 명령을 받아 1년 9개월에 이르는 임무를 마쳤다.



1916-18년 일반 유럽 항로와 우편 노선에 대해서도 조금만 알아보겠다. 전시 하의 일본 우편선의 유럽 항로(체신성 명령 항로·격주·11척+임시선)는 1915년 12월 31일부터 1918년 12월 4일까지 지중해의 위험성을 고려하고 기존 수에즈 경유(요코하마-앤트워프 선)을 중단하고 희망봉 우회 코스(요코하마-런던-리버풀선)를 택했다.(이 시기 영국 PO편, 프랑스 우편선편 등 외국 선박은 부정기적으로 항해하, 편수는 극단적으로 감소함)특히 1916년부터 1917년 전반의 서유럽 우체노선 중 수에즈를 경유했던 것은 극히 한정댔다.(1916년 일본에 보낸 우편에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검열 도장이 있는 사례가 몇가지 알려져 있다)희망봉을 우회하여 영국 경유, 수에즈 경유의 각 서회(서쪽으로 돌아감)경로, 또 미국을 경유한 동회루트 등, 유럽 대륙에서의 체송 방법의 규명은 우편물상의 정보(행선지국 중계·도착 표시, 소요 일수, 검열 도장 등)및 각국 배편의 상황, 각국 육해군의 전개 상황 등을 종합하여 조사하지 않는다면 어려울 것이다.



또 시베리아 횡단 철도 루트는 대부분 시베리아로 지정한 글귀와 러시아의 검열도장 등이 있어 식별은 쉽지만(소요 일수는 제각각이어서 30일부터 때에 따라 1년 이상 걸리는 사례도 본 적이 있음), 행선국가에 따라서는 체송 루트 규명에 고생하는 사례도 많았다. 수에즈 경유편으로는 지중해로 원정한 제2전투함대에의 물자 교체 병력 등 수송의 필요성에 따라, 해군성 명령에 임시로 일본 우편선이 1917년 8월 20일 제1선으로 카나가와 마루를 포트 사이드까지 파견했다.(당연히, 우편물이 많이 쌓였다)그 후 이 임시 포트사이드선은 월 1번의 사설 노선으로 지속되어 수에즈 경유 유럽 항로 재개 후 1918년 12월 5일에 폐지됐다.

(그림 50이 임시 포트사이드선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있는 이집트 앞 인쇄물)




그림 50


전회 소개한 기시 중위의 엽서(그림 46)에는 "매번의 통신 대체로 확실히 낙수,~"라는 것으로 임시 포트사이드선도 포함 지중해에 대한 정기 우편 체송로는 확보됐다. 키 중위도 귀국시 이 포트사이드 선을 이용해서 일본 우편선의 가스가 마루로 귀국했다. 또 제2특무함대 호위 아래 일본 우편선은, 1918년 3월 31일부터 1919년 4월까지 포트사이드-마르세유 사이에 임시 지중해선도 개설했다.



 기시 중위의 귀국과 때마침 1918년(다이쇼 7년)11월 3일 독일 킬 항에서 독일 수병의 반란이 일어나고 이듬해 4일부터 독일 혁명이 시작됐다. 9월 말에 불가리아, 10월 말에 터키, 11월 4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연합국 측에 항복했다. 11월 10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에 망명, 그리고 다음 11일 마침내 독일은 연합국과 파리에서 휴전 협정에 조인했다. 제2전투함대는 그 뒤에도 오랫동안 지중해의 경비를 계속, 베르사유 강화 회의(1919년 1월 18일~6월 28일 조인, 7월 9일 독일 국민 의회 비준)가 시작되자 영국·벨기에·프랑스·이탈리아 등의 연합국의 항구에 개선 방문하고 일본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어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림 51



(그림 51, 일본제 강화 회의 조인 기념 그림 엽서, 오른쪽보다 이탈리아 황제 빅토리오, 엠마뉴엘 3세, 프랑스 대통령 레몽·푸앵카레, 영국 황제 조지 5세, 미국 대통령 윌슨, 벨기에 황제 알베르)


순양함 이즈모가 영국으로 향해자, 사토 사령관은 1918년 11월 26일 제2전투함대에 편입된 순양함 닛진에 임시로 장기를 들고 기함으로 구축함 쿠스노키, 우메, 모모, 카시, 카시와를 거느리고 12월 5일 유럽·아시아의 접점 터키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갔다. 터키가 동맹국 측이 참전한 배경에는 복잡한 역사가 있다. 18세기 이후 항상 세계의 화약고의 하나로 꼽히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러일전쟁 후 러시아의 터키의 이권에 대한 간섭, 리비아 문제에 의해 일어난 이탈리아-투르크 전쟁(1911)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단이 된 발칸전쟁(1912년~13년)에 의한 발칸 국가들 간의 균열 등도 모두 터키 제국의 쇠퇴가 원인이었다. 세계 대전 발발 후에는 프랑스, 러시아, 영국, 이탈리아, 그리스 등의 간섭을 경계한 터키는 독일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1914년 10월 29일 러시아 함대를 포격, 다음 30일 러시아는 터키에 선전포고, 영국도 11월 5일 터키에 선전포고를 해, 키프로스 섬을 병합했다. 터키에서는 불가리아와 함께 동맹국 측에 가담했지만, 발칸 반도, 이란, 이라크 쪽에서도 터키 전선은 민족 문제까지 얽힌 복잡한 일이 됐다.



그림 52


(그림 52)옛 다이쇼 수첩, 1915년 12월 9일(우표 말소에 고베에서 터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앞에 보내진 사용 사례. 이 시기 일본에서는 어느 루트에서도 도달할 수가 없어, 송달이 보류됐다. 메모지상에는 자필"Transmission insuspended"와 함께 말소 스탬프와 같은 구문 빗형 KOBE/9.12.15./JAPAN이 찍혔다.


1918년 12월 6일 터키로 향했던 순양함 닛신, 다른 구축함 5척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무사히 통과하고, 당신부의 궁전으로 불린 술탄 궁전 앞에 정박, 연합국 해군 선임 사령관의 지휘하에 들어가고 휴전 감시 작업을 벌였다. 지중해에 원정갔던 제2전투함대의 입항, 병사의 상륙을 터키 육해군과 일반 시민은 매우 환영한 것 같았다.


복잡한 발칸의 역사에 관계 없는 일본은 마침 적이 됐을 뿐 일찍이 대국 러시아를 깬 아시아인인 일본에 어떤 존경심에 가까운 호의를 갖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반면, 영국 해군에 노골적으로 적의를 나타내는 젊은이도 많았다고 한다.그 후 제2전투함대는 각국 순방을 마치고 전리품과 함께 다음 해 1919년 4월 귀국까지 순차적으로 몰타를 떠낫다.



제2특무함대에 대한 여담 3개


1. 기타큐슈시 와카마쓰 구, 동해만 와카마츠 항구에 속칭"군함 방파제"이라는 이름의 방파제가 있다. 이는 3척의 옛 제국 해군 구축함(야나기, 후유츠키, 스즈츠키)를 묻고 방파제로 삼은 것이고 그 중의 한척은 15구축대(후의 제24구축대)에 속했으며, 지중해에 원정을 간 구축함 야나기다. 구축함 야나기(초대)는 쇼와 15년 5월 1월 제적되어 사세보 구제 중학의 군사 교련 등에 사용됐다. 태평양 전쟁 종결 후는 무장 철거 후 방치되었다가, 쇼와 23년 와카마츠항 방파제 공사에 이용되어 매립되었다. 이들 구축함의 위령비도 쇼와 33년 이곳에 건립되었다. 현재 지상에 보이는 것은 부식되어 도괴되기 직전이었지만, 헤이세이 12년도에 복구어 지금에 이르렀다.


2. 마찬가지로 15구축대(이십사 구축대)소속 구축함 카시는 쇼와 12년 5월 1일 제적, 함명"하이 웨이"(Hai Wei)로서 만주 제국 해상 경찰대로 양도됐다. 태평양 전쟁 개전 후, 쇼와 17년 6월 29일 일본 해군으로 징용(함명"우미"가 좋다) 됐으나 환상의 만주국 해군 최대의 함정으로 기록됐다. 쇼와 19년 10월 10일 오키나와 인근에서 미군 폭격기에 의한 격침되었다.


3. 야스쿠니 신사 배전의 양옆에 세워진 대마등(좌, 육군, 오른쪽·해군)에는 청일 전쟁부터 일본과 중국 사변까지의 전몰 부조가 있다. 해군의 경우 제1차 세계 대전(일독 전쟁)부터 선정된 모티브는 "견구 함대 제2특무함대 지중해 원정"이다, 이 원정의 성공이 일본 해군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원문:

http://www.takahashistamp.com/2note16.htm

http://www.takahashistamp.com/2note17.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