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의 라자루스 : 카이저라이히 러시아 1918-1936
초창기:1918-1926
백군 동맹의 승리는 러시아의 역사를 크게 뒤바꾸어 놓았다. KR 세계관에서 러시아 내전에 실질적으로 러시아 중부지역에서만 일어났다는 것은 중요하다.
전쟁은 (볼셰비키에 맞서)모스크바와 다른 중부 러시아의 도시들에서 벌어진 사회혁명당 좌파 세력의 혁명과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걸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봉기로 시작되었다. 모스크바 혁명정부는 거의 동시에 시베리아의 통제권을 상실했고, 우파, 중도파, 반혁명파 사회혁명당이 지배권을 가지게 되었다. 돈 강의 코사크들과 백군이 독일군의 지원을 받으며 북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발틱의 러시아인들도 그들의 군대를 조직했다.
적군이 통제하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부분은 서쪽으로는 독일이 점령한 백 루테니아, 우크라이나, 발틱,동쪽으로는 돈-볼가강에 둘러싸여 있었다. 1918년 여름, 모스크바 혁명정부는 더, 더 많은 지역을 잃기 시작했다.
반혁명파 사회혁명당은 제압되었지만, 레닌은 살해당했고 그의 후계자들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적군은 차리친, 페트로그라드를 잃었고, 결국 1920년 여름 모스크바를 빼앗겼다.
1921년의 상황은 힘들었다. 1921년 가을 재선된 러시아 제헌의회는 많은 우파,중도파, 좌파 사회혁명당 세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우파는 내전기간동안 사회주의적인 구상의 상당수를 포기하고, 천천히 민족주의적인 사상과, 중공업에 한정된 부분적 계획경제 정책으로 이동해 갔다.
전후 인구 다수가 사회주의적 개념들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좌파들은 그들의 많은 지지자들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러시아인들에 있어 1918년 소비에트에 맞서 혁명을 일으킨 영웅들이었고, 프랑스에서 벌어진 생디칼리스트들의 승리에 힘입어 여전히 국제혁명이 머지않아 결국 일어날 것이라고 믿어졌다.
케렌스키를 수장으로 하는 중도파는 두 분파들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애썼다. 또한 미텔오이로파와 협상국과의 외교관계도 재개했다.
더욱이 일본은 (직접적으로든 그 동맹을 통해서든) 여전히 트란스아무르를 통제하고 있었다. 비록 모든 극동이 일본군의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1918년 일본의 개입이 시작되었을 때, 일본이 러시아의 극동지방에 중대한 야심을 가지고 있단 점은 분명해졌고, 미합중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그 누구도 거절하지 않을 제안'을 건넸다. 미군이 오호츠크, 페트로파블로프스크-캄차츠키, 니콜라예프-나-아무르로 파병될 것이었다. 공식적인 목적은 '적군과 싸우는 러시아의 경제에 중요한'금광들과 미국 시민의 안전을 보호하려는 거였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극동지역에서의 일본과 독일의 계획을 제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도 골칫거리였다. 러시아의 경제가 실제 역사처럼 전시공산주의와 내전으로 파괴되진 않았지만, 모든 당파들은 이에 활기를 불어넣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그 동시에, 모든 당파에 있어 인구 중 가장 중요한 계층인 소작농들을 달래고 만족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어었다.
1921년 말 신경제정책(NEP)이 시작되었다. NEP는 현실에서 레닌이 실시한 그 정책과 유사했지만, 계획경제적인 요소가 다소 빠져있는 형태였다. 그 동시에 각 당파들은 이 정책에 각자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우파와 중도파들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에 기초한 경제를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지역 당국에 의한 실질적인 농촌 토지 재분배를 받아들였다. 그 반면 좌파들은 현대적이고 강력한 경제가 다시 한번 러시아에게 사회주의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리라 믿었지만, 인구 대부분은 아직 사회주의와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좌파세력은 사회주의적 이상에 기반한 러시아 경제의 재건에 속도를 내고 싶어했다. 그들은 소작되는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천천히 경제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구 대부분은 우파와 중도파를 지지했다. 이렇게 NEP가 시작되었다.
다른 문제는 백군의 귀족세력과, 명망높고 또한 극단적인 수많은 장교들이었다. 귀족(이자 대부분 지주)들은 소작농들과 초기에는 볼셰비키, 이후에는 중부 러시아를 점령한 사회혁명당이 주도한 토지 재분배에서 토지를 잃었다. 사회혁명당은 이들에게 토지를 돌려주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를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정부는 그들에게 보상으로 국유지였던 땅들을 지급했다. 많은 귀족들은 -전쟁 도중 심하게 파괴되지는 않은-이 토지를 다시 국가나 소작농들에게 판매했다.
군대는 또다른 문제였다. 러시아는 내전 때처럼 이런 거대한 군대를 감당할수 없었다. 노동자와 소작농들 대부분은 전쟁 직후에 동원해제되었다. 장교들은 머지않아 군대를 떠날 것을 요청받으리란 사실을 이해했다...
1921-1924년은 꽤나 안정적인 시기였다. 그러나 트란스아무르와 투르케스탄의 분리를 일으킨 콜차크 쿠데타와 투르케스탄 위기 이후, 외교관계의 상황은 완전히 최악이었다.
-프랑스 코뮌과 브리튼 연방은 러시아와 그 경제를 지원하기에 너무 약했다.
-협상국은 쿠데타를 지원하고 실질적으로 일본을 도왔고, 이는 러시아에게 이들의 공격적인 계획을 깨닫게 해주었고, 협상국은 곧 러시아의 -여전히 가장 큰 위협이었던 미텔오이로파 못지않게- 2순위 적이 되었다.
국가는 포위되었지만, 그러나 또다른 한 열강이 마침내 러시아를 돕기로 결심했다.
'동지와 민주주의자들-이반과 엉클 샘'
1926-1929
왕당파 조직들은 잘 통합되지 않았다. 니콜라이 2세의 사촌이었던 키릴 블라디미로비치가 자신이 적법한 짜르임을 주장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그가 1917년 2월 혁명을 지지했던 것을 기억하는 몇몇 친척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로마노프와 같은 다른 로마노프 가 황족들은 공화국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 드미트리 파블로비치는, 심지어, 그와 같은 옛 귀족들과 새로운 자본가들이 NEP를 그들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영향을 주려 하던, 상원에 자리까지도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정교회는 여전히 러시아에서 강력한 신망을 받고 있었지만, 러시아 정부에 충성하는 것 외에 정치판에 끼어들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공화국 또한 불안정화를 막기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정교회에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공화국과 교회 사이의 "냉전"은 19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미국에 있어 유라시아의 상황은 불안하게 다가왔다. 대영제국의 몰락은 (KR 세계관)에서 미국의 경제 대공황의 원인이 되었다. 더욱이 일본제국은 트란스아무르 점령을 통해 미국과 일본이 대립하고 있는 태평양에서 제국의 입지를 강화했다. 온건한 중도우파 정부가 집권한 러시아는 여전히 일본-아마도 독일까지도-의 야망을 막아낼 수 있는 국가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경제와 산업 재조직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케렌스키는 미국 정부와 기업들과 이익이 날 수 있는 많은 계약들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계약이 체결되었다-준 민명 합자회사 "암토르그"와 미국 기업들은 시장에서 러시아의 유일한 구매자라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암토르그는 모든 것을 사들였다. 심지어 공장들까지.
주요 경제 부문들의 안정화와, 금본위제를 채택한 러시아 루블에 꽤나 기대서, 케렌스키는 1927년 초에 -(실제 역사의 격렬한 내전이없었기 때문에 그리 파괴되지는 않은)낡은 제정시절 공장들을 재건축하기 위한-'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 미국인 사업가들은 많은 특권을 얻어냈다.
NEP의 성공과 이 시기의 급격한 경제발전은 훗날 "Золотое Пятилетие"(황금의 5년)으로 불린다.
"마냐와 함께 참호 속에 있는 것보단 사냐와 함께 권좌에 있는 것이 낫다!"
-우파 사회혁명당 비공식 구호
1929-1933
제1차 5개년 계획이 끝날 즈음, 경제상황은 안정적이었고 러시아를 공격하기로 계획한 외세도 없었지만, 국내적 상황은 더욱 안좋아졌다. 1925년 투르케스탄 위기로 한때 취소되었던 1929년 두마(의회) 선거는 우파-중도파-좌파 사회혁명당(이하 SR) 동맹에게 승리를 다시 안겨주었다.
그러나 1929년 이후로 두 파벌 간의 갈등은 이전에 비해 더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사냐의 당"이라 불렸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를 지지하는(사냐는 알렉산드르의 애칭) 우파-중도파 세력은 국내외 정책에서 사회주의적인 이념을 거의 대부분 포기하다시피 했고, 토지 국유화를 위한 그 어떤 과정도 제안하려고 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이 세력의 구호는 "부자 되세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새 공장의 노동자들만큼 많은 수의 소작농들도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와 대조되게, 1918년 혁명의 영웅들이었던, 마리아 스피리도노바가 이끄는 좌파 SR 세력은 프랑스 코뮌과 브리튼 연방의 강화를 지켜보며 많은 생디칼리즘적 구상들을 채택하고 이것을 기존 사회혁명당 이데올로기와 통합하기 시작했다.(1918년 가을 일어났던 움직임과 비슷하지만, KR의 생디칼리즘은 실제 역사상의 그것과는 꽤 다르다) 그러나 토지의 국유화와 같은 몇몇 구상들은 "마냐의 당"(마냐는 마리아의 애칭)을 중대하게 약화시켰다. 서유럽 생디칼리스트 국가들과의 동맹 제안은 많은 시민들과 산업화가 끝날 때까지 러시아가 국제위기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는, 조심스러운 '사냐의 당' 구성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이러한 좌파와 우파 SR 간의 갈등은 결국 1933년 여름 크렘린 인근-좌파 SR 혁명 15주년 기념식-에서의 충돌을 이끌어냈다. 그 충돌 이후, 좌파 SR세력은 다시 한번 극단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1905-1907년 러시아 혁명의 나날에 그리했던 것처럼....
문제는 우파 SR 사이에도 존재했다. 많은 새 멤버들은 이미 자수성가했고, 농민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또한 외교정책을 부활시키고 국제사회에서 러시아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러한 이상은 전직 SR 정치인 보리스 사빈코프에게 주목받았다. 그는 이미 사회혁명주의적 이념에서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이념으로 전환했다. 그의 사상은 포퓰리즘과 소작농들, 동유럽의 러시아 공장을 되찾고 싶어하는 러시아 자본가들, 1925년 쿠데타로 약해진 러시아군을 다시 한 번 강력하게 만들고자 하는 젊은 장교단들에 대한 다양한 약속으로 무장해 있었다.
케렌스키는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고, 군대를 우선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군은 확대되었고, 새 사단들이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를 보호하기 위해' 우랄과 시베리아의 대도시들에 배치되었다. 독일제국이 몽골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강제점령, 투르케스탄과 트란스아무르의 분립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는 중요하고, 이유도 충분한 선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이저는 러시아의 군 확장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비해 케렌스키 정부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른 문제는 경제였다. NEP와 첫 산업화 기간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경제성장이 조만간 멈출 것이란 것은 자명했다. 미합중국은 -NEP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었던-유의미한 채권과 자원을 제공해줄 수 없었고, 새로운 산업계획에 착수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정부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던 러시아 자본가들은 러시아 노동자들을 우크라이나, 백 루테니아, 돈 쿠반의 노등자들로 대체하려고 하였고, 이는 내전 이후 가장 심각한 파업 사태를 야기했다.
1933년 가을 두마 총선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대배반
1932-1933
사회혁명당에 의해 '허용된 자본주의와 자유시장과, 이윤 기반 경영을 허용한 집단화된 국가자산을 국가의 통제에 두는 경제체제'라 묘사된 NEP는, 좌우파 SR 양쪽에게 경제 재건을 위한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시행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두 세력은 공통적으로 사회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우파의 경우에 그것은 100년 혹은 더 먼 미래의 일이라 내다본 반면, 좌파는 사회주의 프랑스와 영국의 방식이 러시아에도 이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1930년 초에 이르면 러시아의 경제는 (KR 국경선 내 기준으로) 1913년의 최고치를 회복했다.이것은 1932년 8월의 불경기가 연간 경제성장을 기록했던 정부에게 굉장히 예상치 못한 일로 다가왔던 이유이다.
1933년 여름에 이르면, 불경기는 NEP의 낡은 방법론이 더 이상 효과가 없고, 러시아는 여전히 위기 속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실제 역사 미국의 1937-38년 불경기와 비교해)실질적으로 러시아 경제에 심각한 무엇인가가 일어난 건 아니었지만, 이 위기와 다가오는 총선은 많은 당파와 정치인들에게 SR 동맹을 비판할 수 있는 완벽한 기회를 제공했다.
가장 활동적인 정치인은 보리스 사빈코프와 그의 민족주의적 포퓰리즘 정당인 NRPR이었다. 사빈코프는 장교단, 농민, 자본가들에게서 동맹을 발견했다. 더욱이 그는 -온건하고 '겁쟁이같은'케렌스키의 중도파와, "생디칼리즘적 이상으로 대미관계를 해치고" "정상적인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을 방해하는" 좌파에 반대하던- 우파 SR세력과의 협력까지 시도했다. 마침내 사빈코프는 우파 SR의 극단적인 그룹들과의 합의에 도달했고, 이들은 사회혁명당 동맹을 이탈하고 NRPR에 입당할 것과, 위기를 잠재울 수 없는 케렌스키의 인기를 떨어뜨리려는 것에 동의했다.
실제로 이 경제 위기는 시장경제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많은 러시아인들에게 불황은 끔찍한 내전 시기의 재판처럼 보여졌다. 그리고 농민들의 보호자와 적백내전의 전쟁영웅을 자처하던 사빈코프는 평범한 러시아인들의 권리를 보호할 경험 많은 정치인처럼 보여졌다.
물론, 케렌스키는 NRPR의 음모를 눈치챘다.그리고 그는 이 "농민들의 바즈디(Вождь;대중을 이끌 영도자)의 다음 목표는 케렌스키에게 연정을 제안하는 것-사빈코프가 주도하고, 케렌스키는 주니어 파트너가 되는-이란 걸 이해했다.. 그리고 그의 당은 사빈코프에게 흡수될 것이었다.이게 바로 케렌스키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급선회를 한 이유이다-그는 상원의 지지를 받기로 결심했다.
1921년 수립된 상원은, 지역 두마가 선출하고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는, 러시아의 각 지방들을 대표해야 하지만 대부분이 그들의 존재조차 모르는 무기력한 기관이었다. 상원에는 귀족과 자본가들도 있었지만, 이들은 러시아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 케렌스키는 상원의 입지를 강화하기로 경정하고 지역 지주, 귀족, 정교회 사제들을-사빈코프나 좌파 SR을 지지하기에는 너무 보수적인 사람들-을 임명했다. 더욱이 케렌스키는 그들에게 거부권까지 부여했다. 이들은 원치않는 법안을 막고, 반대로 케렌스키와 머지않아 두마에서 압도적 열세에 처하게 될 그의 당파를 지지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러시아 정계의 노인네들은 케렌스키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케렌스키에게 짧은 성명 하나를 발표할 것을 요구했다.
상원은 선거 직전에 추가적인 권력을 얻었다. 1933년 11월 1일 케렌스키는 NEP의 시대는 끝났으며, 러시아는 새로운 제를 재건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우리의 경제계획에 의하면 국내정책 못지않게, 경제에서의 사회주의는 러시아 공화국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두는 것은 중요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우파-좌파 SR 연정을 즉각적으로 파괴했다. 1933년 11월 4일 사빈코프의 NRPR은 25%, 좌파 SR-멘셰비키 동맹은 15%를 득표했다. 케렌스키의 중도파들과 우익 잔류파는 35%를 득표했고, 사관생도-장교단과 자유주의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케렌스키는 실질적으로 50% 이상을 얻어냈다.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의 연정들처럼, 새로운 연정 역시 정족수인 2/3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산안을 포함한)중요 법안들을 통과시키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케렌스키의 첫 입법도 상원에게 거부당했고, 두번째, 세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에서 내전과 콜차크 쿠데타 이래 최악의 국내 위기가 시작되었다.
(불)안정
1933-1935년 겨울
비록 사회주의를 러시아의 목표로 삼기를 거부한 것은 케렌스키의 국내정치적 술수였지만, 그러나 이것은 (특히 독일)다른 국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베를린이 내전 기간동안 지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독러관계는 현실의 냉전과 비슷했다. 러시아가 독일에 대항해 싸울수 없다는 것이 자명했음에도, 세계대전 동안 끔찍한 손실을 겪었던 독일 사회에게 러시아가 생디칼리스트 이념으로 전환해 인터내셔널 동맹에 가입하는 것은 악몽과도 같았다.
이것은 4년간의 독-러 불가침 조약을 이끌어냈다(현실의 1934년 독폴 불가침 조약과 유사). 두 국가 간의 무역협정 갱신을 포함한 이 조약은 러시아군의 제한된 재조직으로 복잡했던 두 국가 사이의 관계를 향상시켰다. 새 무역협정과 함께, 케렌스키는 마침내 새로운 5개년 계획-그러나 3년 내에 달성되어야 했다-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것은 러시아가 산업화에 다시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중공업의 급성장을 고작 3년 동안밖에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이를 3개년 계획이 아닌 5개년 계획이라 불렀는데, 이 트릭은 러시아인들에게 경제위기조차도 경제의 재조직을 막을 수 없다는 믿음을 주기 위해 필요했다.
그러나 1920년 중반 미국인들의 투자와 대조되는, 채권과 해외투자의 부족은 계획의 현실화를 복잡하게 만들었고, 케렌스키는 자본가들에게 더 많은 권리를 부여했고, 반대급부로 노동자들의 권리는 축소되었다. 이 조치는 국가 전체에 걸쳐 수많은 파업 투쟁을 불러일으켰고, 가혹하게 진압되었다. 정부는 보수적인 산업가와 자본가들이 장악한 상원의 반대로 어떤 협상도 진행할 수 없었다. 그리고 케렌스키는 상원의 대표자들에게 조종당하는 러시아 은행들로부터 채권을 빌려야만 했다.
경기회복을 위한 다른 방법도 대체로 과거와 비슷했다. 군대를, 특히 시베리아와 트랜스아무르 국경지대 쪽으로 증강하여, 시골에서 가능한 한 많은 젊은 남성을 데려와 철도와 도로를 건설했으며, 시베리아부터 몽골 국경에 걸친 농민들의 재정착(스톨리핀 개혁과 소련 처녀지 개간의 혼합?) 등.
이와 대조되게, 케렌스키와 그의 중도좌파 SR-카데츠 연정의 새 정치적 방법들은 새로운 것이었다. 재정 부족은 지방정부에게 세금 징수의 많은 부분을 위임하던 옛 정책을 폐기시켰다. 연방적인 행정단위 '오블라스찌'는 '구베르니아스'로 대체되었다. 사회혁명당의 또다른 실질적 공통 원칙-러시아는 연방국가이다-이 폐지되었다. 새 중앙정부 세금은 지역 부정부패 문제와 경제상황을 개선시켰지만, 새로운 조세정책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좌파 사회혁명당의 인기 상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케렌스키 자신이었다. 끔찍한 내전의 시기에 우리네들을 부유해지도록 도와주었던 "우리 사냐"는 더이상 러시아의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가 있지 않았다. 그들은 케렌스키의 대외문제에 대한 조심스러운 태도를 정치력의 부족으로 보았고, 겁쟁이처럼 여겼다. 적백내전은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일 뿐만 아니라 배신자들과 -볼셰비키와 다른 좌파 집단과 같은-외국의 지원을 받은 첩자들에 맞서 러시아 조국의 모든 이들이 싸운 전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유는 성장하는 민족주의와 사빈코프와 그 지지자들의 선동, 사회의 전통적 가치를 선전하는 프로파간다에 대량의 자금을 투입해 국가를 강력하게, 좌파를 약하게 만들려 했던 상원의 활동 때문이었다.
학교 체계는 중요한 임무를 받았다. 나이든 왕당파들로 이뤄진 공무원과 교사들은 대부분이 오래된 교육 원칙과 교과서의 변화를 바라지 않았고, 실제로 노동자와 농민의 학생들에게 이것들을 조금 간단하게 바꿔서 가르쳤다.
이전에는 그 어떤 지원을 받지 못하던 왕당파들이 좌파와 우파정당의 극단주의화에 충격받은 보수주의자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시민들 사이에 점차 커져가던 1914년 이전의 삶과 '구체제'에 대한 향수와 함께, 몇몇 젊은층 대표들은 군주정을 러시아의 번영과 가능성을 위한 길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의 인기와 영향력을 왕당파 전체와 함께 상승시켰다.
러시아 정교회도 영향력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실제 역사상의 가혹한 탄압은 없었지만, 무신론자 사회혁명당 관료들은 교회를 상대로 그 어떤 협상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상원에 몇몇 고위 성직자들이 입성했고, 교회는 국가 전체에 걸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게 되었고, 오래된 아젠다인 신성한 러시아와 모든 러시아인의 평등한 삶을 선전했다. 이 아이디어는 경제적인 위기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던 농민들에게 특히 인기를 얻었고, 케렌스키와 행정부가 정교회를 정치적 고려대상에 넣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농민들 대다수가 그것을 반대함에도 정교회를 러시아 땅에서 완전히 숙청해버리고 싶었던 좌파 SR을 제외하면).
모든 정치세력이 고려해야 했던 새로운 요소는 러시아 민족주의였다. 적국들(독일,일본)과 배신자들(발틱 대공국, 중앙아시아, 그리고 노예화된 독일 제국주의의 희생자로도 여겨졌음에도, 루테니아, 우크라이나까지)에 대한 복수의 필요성과, 그리고 대러시아적 정체성과 진정한 러시아인이란 기준에서만 허용되는 문화라는 입장에 기초하여, 러시아 민족주의는 정권을 잡고자 하는 모든 당파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비록 사빈코프와 좌파 SR에게 러시아 민족주의의 의미와 역할이 달랐을지라도)
1935년 여름에 나타나야만 하는 위기의 종식과 경제불황의 끝을 기다리며, 케렌스키는 NRPR, 상원, 좌파 사회혁명당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러시아를 더 중앙집권적이고 자신의 정권에 의존적인 국가로 만들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1935년 봄에 일어난 일본과의 짧은 무력 충돌이 그의 모든 희망을 산산조각냈다.
+ 여기서의 러시아의 정치
대통령은 국민들이 뽑는게 아니라 상원에서 선출하는건데, 그 상원이
1/3은 대통령이 지명
1/3은 지역 의회에서 선택
1/3은 부자나 유명인, 지식인들이 투표를 해서 선출
한마디로 케렌스키의 독-재...
출처 : http://cafe.daum.net/Europa/37jk/22558 / http://cafe.daum.net/Europa/37jk/2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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