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rica's forgotten wartime heroes



영국 다큐멘터리 제작자 Robin Forestier-Walker와 Oliver Owen이 버마 전선에 참전한 나이지리아인 용사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제 2차 세계대전이 완전히 끝난 2009년 8월 15일, BBC가 이 인터뷰를 발표했습니다.




(아프리카 바나나 이병으로 알려진 Mohammed)


Mohammed가 북부 나이지리아에서 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영국군에 입대할 때 그는 16세였습니다.


그리고 거의 70년이 지난 지금, 그 나이든 전쟁 영웅은 그가 영국군 모병관에게 자신의 진짜 신분을 숨겼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Royal West African Frontier Force의 일원으로 나이지리아에서 6300마일(10,100km) 떨어진 버마의 정글로 향할 때

그는 “Private African Banana(아프리칸 바나나 이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아프리칸 바나나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아시아 전선에서 연합군에 대한 서아프리카인들의 헌신은 여태까지 공식적으로 경시되어 왔습니다. 


사실, 버마 전선에 투입된 10명 중 2명만이 백인이었습니다.

(역: 브리튼, 아일랜드,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뉴펀들랜드, 남아프리카 등에서 온 백인 병사의 비율은 20%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아프리카인, 인도인, 마오리, 구르카, 폴리네시안, 화교(중국계), 말레이 등 영연방의 다양한 민족 출신들로 구성됨)


인도인들과 구르카의 활약은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연합군 사령관 William Slim 장군이 그의 14th army에게 감사를 표할 때 그는 아프리카인들을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Jungle Warfare


(행군 중인 아프리카인 병사들, 버마)


나이지리아인들은 1943년 동남 아프리카 지역(역: 케냐-에티오피아 전선과 마다가스카르 해방 작전 등이 있었음)에 파견된

영국군 제 81, 82 서아프리카 연대의 90000명의 병사들 중 절반 이상을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버마 전선이 64년 전에 끝났음에도, 그들의 헌신이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많은 씁쓸함이 남아있습니다. 

 

그들은 영국령 인도를 위협하는 버마의 정글과 산 속의 일본군을 밀어내 섬멸하는 작전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일본군의 섬멸은 정글 행군과 전투와 매복과 같은 힘든 작전들을 통해 이뤄졌으며, 그 동안 보급품들은 공수됐습니다.


Usman Katsina도 그 일들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용해야 하는 모든 게 항공으로 운송됐습니다. – 음식, 의복, 그리고 말 그대로 모든 게요. – 그리고 그렇게 공수된 것들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날라야 했습니다.

몇몇은 너무 무거운 짐을 이고 진 상태에서 긴 거리를 이동해 탈진해 숨지기도 하였습니다.”

라고 그는 회상했습니다. 


빛나는 Burma Star를 수훈한 사람들 중 일부는 이미 동아프리카 전선에서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군대와 맞서 싸운 경험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서아프리카인들은 또한 Orde Wingate 장군의 지휘 아래 special Chindit units(역: 영연방군이 버마 전선에서 운용한 Commando와 비슷한 성격의 특수부대)에 합류했습니다.

 

Chindit 요원들은 일본군 점령지 깊숙이 침투해 커뮤니케이션 라인(역: 통신선+보급선)을 교란했습니다.

 

그들의 적은 극도로 위험한 상대들이었습니다. 일본 병사들은, 제일 규칙은 은폐라는 사실에서 시작하는 정글에서의 전투에 대비해 잘 훈련 받은 상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술들은 나이지리아 군인들도 배워야만 했던 것이죠. 


“정글 속의 일본군은 뱀과 같았습니다. –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보기도 전에 숨어버렸고, 그것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라고 97세의 Hassan Sokoto는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Lack of recognition'


(다양한 출신의 병사들, 버마)


Umaru Yola는 나이지리아 연대 4대대 소속으로 싸웠습니다.

그는 그의 두개골에 구멍을 남긴 파편 조각에 머리를 맞은 걸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신께서 저에게 장수의 축복을 내리신 게 틀림 없습니다."라고 말이죠.


아프리카 출신 모집병들은 보병과 짐꾼으로 활약한 것과 마찬가지로, 운전병이나 포병, 공병, 의무병 그리고 행정병으로도 활약했습니다. 


장교의 경우, 영국 본토 출신이나 제국의 다른 지역(역: 호주, 뉴질랜드 등)에서 온 백인들 만이 될 수 있었지만,

한가지 특이한 예외가 있습니다: Gold Coast(역: 지금의 가나 공화국. 샘 오취리의 모국.) 출신의 Seth Anthony 중위가 영연방 육군의 첫번째 아프리카인 장교가 된 것이었습니다.


계급 체계와는 별개로, 버마에서의 전쟁은 당대의 인종 간 장벽 붕괴에 기여했습니다.


“처음에 나는 백인이 나보다 더 우월하다고 봤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는 백인들이 나와 같은 존재라고 여겼다.”

라고 전직 보병이었던 Dauda Kafanchan는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전후 나이지리아에서는, 식민 정부는 참전 용사들에게 땅을 지급하여 농부로서 새 삶을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그 프로젝트는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서 그들의 잠재적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정책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일자리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식민 통치 아래 있었고, 우리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전쟁 영웅 Dangombe는 전쟁이 끝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상실한 자신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들의 군생활을 지속하기로 결정한 나이지리아 군인들은 독립한 나이지리아군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나이지리아군 81연대와 82연대로 계승되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위에 나온 아프리칸 바나나 이병은 훗날 콩고와 차드에서 평화유지군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그의 오랜 전우들과 함께 1967년부터 1970년까지 이어진 피비린내 나는 나이지리아 내전의 일선에 서기 위해 고국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오랜 전우들 중 많은 수는 영국이 그들의 참전 용사들을 위한 의무를 져버렸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복무 기간 동안 봉급을 받기는 하였지만, 몇몇은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그들의 공헌에도 불구하고 약속되었던 추가 수당이 지급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단지 금전적 문제에 한정된 게 아닙니다. 몇몇 참전 용사들은 인식의 부재(Lack of recognition)에 씁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기 복무 훈장과 대영제국 훈장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라고 말한 Dangombe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참전 용사들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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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및 원문 : http://news.bbc.co.uk/1/hi/world/africa/8201717.stm




광복절 기념으로 버마 전선 관련 글을 올립니다.


참고로 버마 전선에 투입된 병력들 중 영국 출신은 극소수였고, 대다수는 식민지와 자치령 등 영연방 출신들이었습니다.


덧붙여, 버마 전선에서 나이지리아군이 상대한 일본군은 일본군 내에서도 최정예 병력들이었는데,


대본영에서 관동군이나 중국 쪽 베테랑들을 말 그대로 버마에 꼬라 박았었습니다.


때문에 버마 전선의 영연방군들은 힘든 시간을 보냈고요.


뭐, 영연방군과 중화민국군 장병들, 소수의 한국 광복군 요원들의 헌신과,

무다구치 렌야 장군님을 대표로 한, 일본군에 침투한 영연방군과 대한 광복군 요원들의 신묘한 술법으로

결국은 연합군이 버마전선에서 이겼지만요.


뭐, 이것 때문에 나중에 소련이 만주로 들어오자 관동군이 규모는 그대로였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베테랑들은 죄다 버마에서 갈려나간 후였고,

만주에는 햇병아리들만 득시글 거리게 남아서 저항도 제대로 못하고 개박살이 났다는 슬픈 전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도 영국과 호주, 뉴질랜드 등에선 여전히 커먼웰스 데이나 종전 기념일, ANZAC 데이 등의 국경일에 영연방 출신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근데 저 인터뷰가 2009년 발표된 거니까, 저기에 있는 분들 중 많은 수가 지금은 영면에 드셨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