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실, 사무라이의 시대는 이미 충분히 저물고 있었습니다. 대정봉환과 무진전쟁을 기점으로, 쇼군과 막부의 시대는 진작에 끝이 나있었고, 천황과 양이파 공경들, 그리고 하급무사들이 신 일본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사농공상의 사민체제는 철폐되었고, 에도 - 아니, 도쿄의 신정부는 이제 전 일본을 직접적으로 공무원들을 보내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파견되어 서구를 돌아보고있었으며, 학제가 개혁되고 국민교육이 실시되었고, 징병제가 실시되고 지조가 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모든것이 끝난건 아니었습니다. 신정부는 여러 파벌로 나뉘어 있었고, 그중엔 분명히 사무라이적인 파벌이 있었죠. 

 꽤 많은 논쟁이 있었고, 꽤 많은 정책 결정이 있었습니다. 폐도령이 시행되었고, 금녹공채증서 발행조례가 반포되어 사족들의 특권이었던, 검을 차고다닐 권리와 녹봉을 받을 권리가 사라져버렸죠. 거기에 친 사족 경향의, 사이고 다카모리로 대표되며 '강병'을 중시하는 온건 개혁파는 '부국'을 중시하는 관료들 중심의 오쿠보 등으로 대표되는 급진 개혁파에 밀리고 있었죠. 거기에, 정한론 논쟁으로 상황은 파국에 치닫았고, 마침내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기에 이릅니다.


 신정부는 당연히도 낙향한 사이고의 의도를 의심했고, 그리하여, 사쓰마의 신식 무기와 탄약들을 반출해가고 사이고 다카모리를 암살해보려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저런일들로, 사쓰마인들은 분노했고, 결국 사이고 다카모리를 지도자삼아, 가고시마의 봉건복귀를 꾀하며 칼을 뽑아들기에 이릅니다. 다카모리는 정부를 직접 문책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사족을 억누르고 아예 해체하려던 신정부에 대항해, 사족 자제들을 양성하고 사족의 특권보호를 주장하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봉기하자, 아주 많은 무사들이 그를 따랐죠.


 그리고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사 최후의 내전이요.


 


 그리고, 봉기군은 장대하고 처참하게 패배했습니다. 신식무기들은 정부가 진작에 반출해갔기에, 사쓰마 사족들은 지난날의 무진전쟁때보다 더 못한 총을 쥐고 있었고, 정부군은 제법 따끔한 맛을 보고 제법 땀을 흘렸지만, 결국 나름의 대책을 세워 퍽 효율적으로 진압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이 '나름의 대책'의 일환으로 지난날 무진전쟁때 사쓰마인들에게 원한을 품고 이를 갈던 아이즈번 출신의 무사들이 정부군측에 참전해, 경찰신분을 가지고 사쓰마인들을 베며 울분을 풀었지요.


 그리하여 사쓰마군은 패배했습니다. Sabaton이 노래를 지었듯, 사이고 다카모리를 위시한 단 500명의 무사들이 30000에 달하는 정부군을 상대로 분투한 시로야마 전투도 있고, 일본에서 가장 날래다는 사쓰마병 13000명을 앞세웠던 구마모토성 전투도 있었지만, 결국은 졌지요.




 결국 이렇게 사족들과 사족들의 반란은 끝장이 났습니다. 그나마 제법 신식무기를 갖췄으며, 전 일본에서 가장 이름이 높던 사쓰마 병들이 패배했다면, 과연 그 누가 신정부군을 이길 수 있단말입니까?

 더이상 신정부에 대한 무력저항은 불가능하다는것이 명확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연유로 아이러니컬하게도 과거의 기득권층이던 사족들은 언론을 앞세워 반정부운동을 이끌고 정부를 장악한 한바츠들을 비판하며 민주화를 논했으며, 심지어 일부는 사회주의로 전향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사무라이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완전히요. 사무라이들로 이루어졌던 일본의 군대는 이제 사무라이의 정신을 잇는다고 표방하며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닐것이었으며, 정한론에 반대하기위해 사이고가 낙향하게 만들었던것이 무의미하게도 조선은 결국 일본에게 먹혔습니다만, 세이난 전쟁이 종결되던 시점으로는, 아직 퍽 먼 미래의 이야기일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