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명의 군인으로서 장성을 지키는 이가 사직과 조정에 대해 충성심을 유지한다면 오히려 그게 신기한 일이었다.
성벽 위에서의 경계근무는 6천km 길이의 장성 곳곳에 흩어져 있는 수천 곳의 망루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이 맡아야 했다.
이런 망루 가운데 가장 편안한 곳 -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 래봤자,
몽골과 만주의 가혹한 비바람과 눈보라를 대충이나마 막아주고, 기본적인 보급품 창고 역할을 해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이 정도의 망루에 배치되는 행운도 갖지 못한 대다수의 병사들은, 흙을 다져 쌓아 속에 최소한의 공간조차 없는 망루 꼭대기에서
비바람을 고스란히 뒤집어쓰며 경계근무를 서야 했다.
15세기 이후 명군이 날이 갈수록 협잡꾼과 불량배들의 소굴로 전락해가면서, 장성 수비대원들은 장교들의 제물이 되었다.
장교들은 병졸들의 봉급을 착복하거나, 개인적인 노비로 취급했다.
겨울이면 영하쯤은 우습게 곤두박질치는 요동의 추위와 동상은 심지어 만주족보다도 두려운 위협이었다.
조정의 공문서는 병사들에게 털옷과 솜옷, 솜바지, 장화를 지급했노라고 거창하게 자랑하고 있지만,
현지의 감사 보고서는 "불충분할 뿐더러, 곰팡내 나고 맞지도 않는 옷과 신발이 3년에 한 번 겨우 지급되는" 냉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1542년 변경에서의 한 보고서는 특히 남중국에서 끌려온 병사들의 끔찍한 고난에 대해 통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북방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꿈에도 모르고 살아온 이들이 장성 수비대로 파견된 결과
망루에 근무인원으로 배치된 남병들의 8~9할이 보초를 서다가 죽어버릴 지경이라는 것이었다.
식량 배급도 가장 많이 받는 이조차 간신히 배를 곯지 않을 지경이라, 영양실조로 서서히 죽어가는 상황이 일반적이었다고 보고서는 기록한다.
그렇다고 장성의 성벽이 튼튼한 것도 아니어서, 국경에서는 조정에 긴급 보수 지원 요청을 매일같이 올리곤 했는데
그 내용들은 바람과 비, 공격, 자재 약탈로 성벽이 얼마나 빨리 무너져갔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6세기 말 요동성의 한 장교는 성벽이 이미 사람 어깨 높이까지 허물어졌다고 보고했다.
주민들이 집을 짓는 데 쓰려고 벽돌과 나무를 뜯어 훔쳐가는 통에
"길어봤자 4년만 지나면 오랑캐가 아니라 변경 백성들이 성벽을 완전히 허물어뜨리고 말 것입니다."
사르후 전투를 불과 10년 앞둔 1609년, 한 지휘관은 요동성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해자는 모래가 계속 쌓여 이미 땅바닥과 높이가 같아져버렸고, 성곽은 더 심하게 허물어진 상태다.
문이 없는 곳도 많고, 아예 성벽 위를 걸어다닐 수조차 없다.
그 위에서 걸어다니려 들다간 총안구를 붙들고 매달려야 하며, 다리가 허공에서 대롱거리게 된다."
몽골과의 국경에서는 몽골 부족들이 마음내키는 대로 성벽을 부수거나 기어올라 자기 게르처럼 드나들었으며
수비대는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체하다가 위험이 지나간 한참 뒤에야 봉화를 피워 경보했고
심지어 병사들이 봉급을 모아 몽골 약탈자들에게 뇌물로 바치며 우리를 공격하지는 말아달라고 애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더, 가장 절망적인 현실은
기록상 장성 수비대원들이 예상할 수 있는 공식적인 근무 연한이란 게 없었던 것 같다는 점이다.
근무 연한은 자료에 따라 저마다 1개월, 3개월, 4개월, 무려 19개월 등 그야말로 중구난방이다.
간단하게 말해, 명군은 지휘관이건 운나쁜 변방 졸병이건 간에 자신이 언제 휴가를 받을 수 있을지,
언제 장성 경계근무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 줄리아 로벨 저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 에서
그보다 저 장성을 1000년 넘게 유지한다는게 신기
친구 환상을 버려요 만리장성 저거 작살나고 복구하고를 몇번이나 반복햇는데
근현대 이후로 더 늘려서 지은 부분도 있음
개끔직하네
저 시대에 GP GOP식 경계를 섰으니
풀어주긴하네 ㅋㅋ
그런 의미에서 중국사 최고 위인은 시황제가 맞는듯 하다. 만리장성을 쌓아 중국인을 중국에 격리했으니.
비록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시도는 했다는게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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