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처음으로 대외정책에 관한 의견을 공식적인 형태로 피력한 것은 1918년 12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후 발표된 「영미 본위의 평화주의를 배격한다(英美本位の平和主義を非す)」는 글을 통해서였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인 영국의 요청에 부응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가한 일본은 전후 승전국의 일원으로 위상이 격상되었다. 수상 하라 다카시(原敬)를 포함해 정계 원로였던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해군 대신 가토 토모사부로(加藤友三郞), 동경대 교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등은 향후 일본이 영국과 미국 등 국제사회 주도국가들과의 협력을 공고히 하면서 해군 군축에 임하고, 국내적으로는 민주주의 체제 정립 등을 추진해야 한다고 하였다. 소위 국제협조주의와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 고노에 후미마로는 1918년 발표한 글에서 이러한 일본 국내의 주류 의견을 반박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최근 논단은 영미정치가들의 화려한 선언에 매료되어,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인도주의의 배후에 숨어있는 많은 자각되지 않은, 또는 자각된 이기주의를 통찰하지 않고, 일본인으로서의 입장도 잊고, 무조건적 무비판적으로 영미 본위의 국제연맹을 구가하고, 그것으로 정의 인도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는 것이 매우 현격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일본 주류 정치가들이 협력하려고 하는 영국과 프랑스 등이 실은 “그 식민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미 세계의 열*등 문명 지방을 점령하여 이를 식민지로 하고 그 이익을 독점”해온 국가들에 다름아니라고 비판하였다. 그러한 입장에서 그는 유럽 전쟁이 “(영국, 프랑스와 같은) 기성의 강국들과 (독일과 같은) 미성(未成)의 강국 간의 전쟁”, 혹은 “현상유지를 편리하다고 하는 국가들과 현상타파를 편리하다고 하는 국가 간의 전쟁”이었다고 평가한다.영국과 미국같은 기성의 강국들이 토지와 식민지를 다 차지한 상태에서 “독일이 이 상태를 타파하려고 했던 것은 실로 정당한 요구”였다고까지 평가했다. 전쟁 종료 이후 영국과 미국이 평화주의를 표방하고, 국제연맹을 만들고, 군비제한을 하려는 정책들도 실은 “현상유지를 편의로 하는 것이고, 하등 정의 및 인도와 관계없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하였다. 오히려 국제연맹과 같은 기구들은 “대국들이 경제적으로 소국을 병탄하고, 후진국으로 영원히 선진국을 숭배하게 하는 사태를 노정할 위험이 있는 것”이라고 경계하였다. 그는 일본으로서는 자신을 본위로 생각하면서, 기성의 강국들에 대해 “정당한 생존권을 확인하고, 이 권리에 대해 부당 부정한 압박을 가하는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이와 싸우는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정의 인도에 입각하여 세계 각국의 국민평등 생존권 확립을 위해, 경제적 제국주의를 배격하고”, 황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도 철폐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 고노에는 1차 대전 전후의 국제질서가 본질적으로는 기성의 강국과 미성의 강국, 현실유지세력과 현상타파 세력 간의 대립 구도라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는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을 현상유지세력이라고 간주하면서, 이에 도전한 독일은 물론 일본도 미성(未成)의 강국, 현상타파세력에 속한다는 인식을 보인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현상유지세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구축한 국제연맹이나 군비축소 등의 움직임에 무비판적으로 따라가서는 안되고, 국민평등 생존권의 관념에 따라 경제적 제국주의나 인종차별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는 대외정책론을 제시한다. 이 글을 발표한 직후 고노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정계원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의 추천으로 일본측 전권대표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클레망소, 영국의 로이드 조지, 미국의 윌슨 대통령, 그리고 일본측 사이온지 대표 등이 참석한 파리강화회의 제5차 총회의 현장을 직접 참관하였는데, 이 경험이 그의 국제질서인식을 더욱 굳히게 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 같다. 파리 강화회의를 참관한 이후에 작성한 글에서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여러 나라들이 참가하고 있지만 주요 문제는 5대국 회의에서 결정되었고, 클레망소 등이 강자의 권리를 주장하였고, 1국 1표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6개의 표결권을 행사하는 양상 등을 소개하면서 국제질서에는 힘의 지배에 의한 철칙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관찰한다.
이 글을 발표한 직후 고노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정계원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의 추천으로 일본측 전권대표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클레망소, 영국의 로이드 조지, 미국의 윌슨 대통령, 그리고 일본측 사이온지 대표 등이 참석한 파리강화회의 제5차 총회의 현장을 직접 참관하였는데, 이 경험이 그의 국제질서인식을 더욱 굳히게 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 같다. 파리 강화회의를 참관한 이후에 작성한 글에서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여러 나라들이 참가하고 있지만 주요 문제는 5대국 회의에서 결정되었고, 클레망소 등이 강자의 권리를 주장하였고, 1국 1표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6개의 표결권을 행사하는 양상 등을 소개하면서 국제질서에는 힘의 지배에 의한 철칙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관찰한다.
이러한 글에서 나타나는 고노에 후미마로의 세계질서관은 국제협조주의를 표방하던 당대 일본 주류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의 그것과는 사뭇 대척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오히려 같은 시기 『일본개조대강』을 집필하면서 영국 및소련과의 대립을 주장한 기타 잇키(北一輝)의 주장이나, 미국과의 최종전쟁 준비를 주장한 육군 소장파의 리더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박영준,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의 국제질서관과 제국 일본의 전쟁원인」, 『일본연구논총』제48호 (2019년 3월), pp.46-48.
평범한 일본 대학 졸업생이 저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싶은데, 문제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최고위 화족인 공작 가문의 후계자로 귀족원 입성이 내정되었으며 사이온지 긴모치의 주목과 기대를 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되겠읍니다. 그리고 결국 총리까지 오르게 되며 자신의 국제정치관을 대외정책에 실현하며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군부보다 더 강경한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데.....
이 양반 태평양 전쟁 개전에는 근데 반대하지 않았던가
저런 국제정치관을 가진 사람이면 자국의 실력도 냉정히 볼 줄 알아야 바람직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