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서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이것도 번역된지는 꽤나 되었는데 막상 독소전 관련 서적으로 유명했으면서 인터넷에서 대숙청과 소련군 관련해서 별 영향을 끼치지를 못해쓰요. 과도한 소련 사료 인용 빼고는 괜찮은 책인데 말예요. 글 보고 가겠읍니다.
'군 숙청은 예조프나 스탈린 같은 부류의 사람들 마음속에서는 그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소련의 군 발전과 국제 안전보장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치에 맞지 않는 행위였다. 1938년과 1940년 사이에 2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 장군은 "이것은 아군 포화에 당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평했다. 숙청은 해외의 소련 군사력 인식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대다수의 독일 사령관들이 붉은 군대를 쳐부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만드는데 이바지했다. 개혁가 투하체프스키 주위의 젊은 장교 집단의 핵심이 파괴된 것이 보통 군 효율과 전쟁 대비 수준에서 소련이 크게 뒷걸음질했다는 증거로 체택된다. 이는 피상적인 결론이다. 비록 그럴듯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1930년대 말 소련의 군사적 위치가 지닌 강점과 약점은 단순히 숙쳥의 결과가 아니었다.
숙청으로 소련 육해군이 약해졌다고 시사하는 어떠한 논거도 숙청 이전의 군이 더 효율적인 기구였음이 틀림없다는 선험적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같은 가정에는 명백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대량의 탱크와 항공기에 대한 투하체프스키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이론과 실제 사이에는 넓은 불일치가 존재했다. 고속으로 움직이는 항공전과 탱크전의 결정적인 측면인 "지휘와 통제"에서 소련군의 진보가 신통치 못했다. 통신체계가 초보적이거나 전무했던 것이다. 탱크와 항공기에 무선 통신기가 장착되어 있지 않아서 상호 간에 통신을 쉽사리 할 수가 없었다. 지휘관에게는 공중과 지상의 전투를 조정할 방법도 탱크과 장갑 차량의 대집단을 통솔할 방법도 없었다. 이 결함은 "종심 작전" 개념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하급 지휘 단계에서 유연성과 전술 인식이 부족했다. 소련군의 연습과 기동 훈련을 지켜본 독일 군인들은 자기들이 본 것에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1933년에 한 독일군 행정 장교는 "소련군의 약점은 소대급에서 연대급까지 모든 지휘관들이 아직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 대다수는 단지 부사관 수준에서만 문제를 다룰 능력을 갖추었다"고 썼다. 같은 해에 모스크바의 독일 육군 무관은 소련군 전체에 "책임에 대한 공포"가 있음을 간파했다. 1937년 이후에 숙청된 자들 중 다수가 군사 교육을 거의 받지 않고 내전기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직위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1930년대 말 무렵에 수많은 젊은 장교들이 있었고 이들 중 일부는 사관학교에서 양성되어 직위를 맡을 준비를 갖춘 자들이었다. 1941년까지 해마다 100000명이 넘는 장교들이 소련군에 들어오고 있었다. 숙청으로 분명히 군 고위 기구에서 재능 있는 사람 일부가 제거되었겠지만 전체 결과가 장교단의 평균 성과 계수를 예전보다 훨씬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이었거나 탱크전 및 항공전 구사 능력을 어떻게든 줄이는 것이었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군은 숙청 이전이나 이후나 심각한 약점들을 안고 있었다. 1938년 이후에 군 당국의 상황을 어렵게 만든 것은 1939년 1월 과 1941년 5월 사이에 161개 신설 사단이 배치에 들어간 붉은 군대의 엄청난 팽창이었다. 양성 계획이 크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팽창으로 양성소에서 배출할 수 있는 장교의 정원보다 더 많은 장교가 요구되었다. 1941년에 장교 전체의 직위에 있는 기간이 1년이 채 안되었던 것은 숙청 때문이 아니라 신설 부대가 많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1938년에 숙청된 장교의 80%가 복직되었다.
소련의 군사력 강화 노력의 다른 요소들은 숙청의 영향을 덜 받았다. 훈련 학교는 장교 훈련 생도 수를 늘렸다. 1936년에 사관학교와 군사학교에서 10500명이 배출되어 임관했지만 1938년에는 23000명, 1939에는 39500명이 임관했다. 비록 느리기는 했어도 기술 문턱이 여전히 앞으로 움직였다. 1920년대에 서부 국경 전체에서 시작된 요새 시설 체계, 즉 스탈린 선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확장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소련 중공업 토대의 현대화와 팽창이 가속화되고 이에 따라 큰 몫이 군수 생산에 할당되었다는 점이다. 경제가 탈바꿈하지 않았더라면 1941년에 붉은 군대는 광대한 농민 인력에 의존하는 허약한 군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에 공업에서 일어난 변화로 1941년의 독일의 침입 후에 이루어진 총동원이라는 요구에 대처하는 데 필요한 계획 입안자, 과학자, 공학 기술자, 숙련 노동자들이 배출되었다. 현대화 강행으로 인해 드러난 약점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 정책이 없었더라면 소련이 독일의 공격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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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해야할 물갈이를 스탈린이 했다는건가
한국판하고 표지가 다르네요
옛날에도 대숙청에 관한 수정주의적 시각을 이야기한 적이 있을텐데 대숙청이 단순히 스탈린이 독재하려고 한 것만은 아니에요. 신생 국가인 소련의 관료제를 엄정히 하고 테크노크라트적 체제를 갖추는 기반이 되었죠. 그 이전까지는 죄다 주먹구구식이었습니다. 군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한번 갈아내야했던 거죠. 물론 그게 시베리아행 열차와 9mm 총탄이라는 방법이란 게 문제고요.
근데 고위 장교들 갈리는 와중에 부됸늬는 왜 냅뒀나요 정치적 위협이 안돼고 상징적 존재라?
의도는 좋았는데 그게 2머전이 터지기 전에 해서 문제가 된거구만요
부됸늬는 지 체포하러온 엔카베데를 완력으로 제압하고 직접 스탈린한테 전화를 걸어서요.
단순 지방에 있는 퇴폐적인 문화 인줄 알았는뎅 ㄷ - dc App
그건 아는데 인간백정이 도축할 생각 있었으면 씹고 끌고가게 하지 않았겠으요?
를 탄압한인줄 알았는데 ㄷ - dc App
리즈의 구분을 보자면 당시 소련군 내 군인은 세 가지 집단으로 나뉠수 있습니다. 첫째, 순수 전문적 군인 집단, 둘째, 정치적이고 전문적인 군인 집단, 셋째, 정치적인 비전문적 군인 집단으로요. 첫째는 샤포시니코프 같이 정치랑 당에는 관심도 없이 까라면 까는 군인들이었고, 둘째는 투하쳅스키 같이 정치 활동에 개입하려는 전문적 군인들이었으며, 셋째는 군사학에 대해서 그렇게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내전으로 경험을 쌓고 스탈린과 친구 먹어 그 자리 앉은, 보로실로프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중 부됸늬는 맨 마지막에 속한 거죠.
칭먹질만이 남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입니다.
보로실로프에서 이해가 팍 됐다
ㄴ그러면 무슨 집단이 주로 숙청된거여? 셋 다?
쓰딸린이여도 첫번째 케이스는 남겨뒀을거 같은데 이런 사람들도 굴라그행 편도티켓이였나
주로 둘째요.
당장 로코포스키고 투하체프스키고 대부분 부정부패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니 뭐
여윽시 군인이면 정치는 좆까라 해야 한다니까
전 로코솝스키 순수한 피해자고 폴란드 스파이로 몰려서 억울하게 고문 당한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보니까 그 양반도 건설 자재였는지 유류 보급이었는지 그걸 한탕 해먹었더만요. 그거 보고 참 어처구니가 읍서서 말이에요.
게다가 투하체프스키는 마 당지령을 무시하는 행동을 해서 찍힌것도 있다지?
투하쳅스키 같은 경우는 그 자신이 일부에 대한 숙청을 주도하기도 했고 1차 5개년 계획 당시 무리하게 생산계획을 밀어붙이거나 당 내에서 군인집단의 영향력을 계속 늘리려고 한 경우라 스탈린에게 찍혔습니다. 근데 당장 혁명기나 내전기에 군국주의가 어쩌구저쩌구 했던 걸 생각해보면 그건 투하쳅스키 스스로가 처세를 잘못한 거예요.
마 흐루쇼프는 스탈린 앞에서 코사크 춤도 췄는데 안 굽히고 개기기만 하니 죽죠!
그리고 권력 잡자마자 능욕행
잔인해서 그렇지 별 차이는 없었다는 건가요.. 현대화가 오히려 러시아군을 더 발전시켰다니..
수정주의적 시각이 있다는건 알았지만 2000년대 초에 이미 이러한 말이 나온건 몰랐넹 정보글은 개추야
이책 존나재밌음. 챕터별로 소제목도 잘 짓고 술술 읽히게 잘지음. 작가 역량 대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