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바지를 없애라고? 헛소리! 붉은 바지는 곧 프랑스다!
Éliminer le pantalon rouge? Jamais! Le pantalon rouge, c'est la France!

- 전쟁장관 외젠 에티엔, 1913년


사실 터크먼의 <8월의 포성>에 실린 위 발언의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1차사료 없는 카더라에 가까움), 프랑스 군부랑 정계 내에 붉은 바지를 온존하고자 한 전통파 정서가 20세기 초까지 존재했음은 알려진 사실임. 근데 왜 하필 붉은 바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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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네 나폴레옹 때는 흰 바지였잖아?

그러면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들어서며 군복을 갈아치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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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ㄴ 1820년에도 전열보병 바지는 흰색이었고, 청색 상의 - 적색 파이핑 - 백색 바지의 삼색 조합은 유지되었음

그러면 언제 바꾼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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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의 이 군복 그림을 보면 드디어 붉은 바지가 보임

정확히 말하자면 프랑스군이 붉은 바지를 제복에 도입한 건 1829년이고, 딱히 이념적인 이유가 아니라 대단히 실리적인 이유였음. 마치 코치닐 싸다고 레드코트 된 영국군이나, 열대 제복 재고품 입혀서 갈색 셔츠단이 된 나치 돌격대처럼

얘네가 붉은 바지가 된 건 이 식물 때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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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꼭두서니라는 작물인데, 프랑스어로는 garance des teinturiers, 영어로는 dyer's madder라고 부르고 학명은 rubia tinctorum임. 학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식물의 뿌리를 빻거나 산에 녹여서 염료를 추출하면 진한 붉은색(rubia)을 얻을 수 있었음. 프랑스에서는 남부 보클뤼즈 지방에서 주로 재배한 작물인데,

1820년 후반에 붉은 염료 국내소요량이 줄어들면서 꼭두서니 경기가 침체되었음. 그래서 당시 국왕 샤를 10세는 경제 살려보겠다면서 전군에 이 염료 소비량을 대폭 늘리란 명령을 하달함. 어떻게? 흰색이던 바지들 죄다 붉게 물들여서

군머에서 조류독감 돌면 주구장창 닭 나오는 거랑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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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리잡은 붉은 바지는 케피니 주아브 바지니 같은 사소한 변화를 제외하면 1870년 보불전쟁 때까지 알제리, 크림, 이탈리아, 멕시코 등등 프랑스가 손댄 모든 전쟁에서 두루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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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보불전쟁 때도 쓰였고. 1번 보병의 제복을 보면 알겠지만, 이때는 각반이나 장구류 등이 흰색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붉은 바지 - 푸른 상의 - 흰 장구류의 ‘애국적인’ 삼색 조합이 여전히 가능했음. 그리고 전열경보병 끝물이라 이때까지만 해도 별 탈 없이 붉은 바지 썼고

문제는 보불전쟁 끝나고 나서. 보어전쟁-러일전쟁-발칸전쟁 등을 구경한 각국 장교들은 화려한 군복의 시대는 한물 갔다는 사실을 깨달음. 다 깨달은 건 아닌데 깨달을 놈들은 다 깨달음. 프랑스도 예외는 아닌지라, 1911년에 레세다 군복이라는 진녹색 군복을 시험채용해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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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정치인들이랑 일반 대중, 언론에게 여야 상관없이 끔찍한 비난을 받음. 아 시발 똥색 좆같네 이러면서

빠꾸먹은 전쟁성은 좀 덜 까일 만한 색깔을 찾다가, 1912년에 기똥찬 생각을 해냄. 삼색천(drap tricolore)이라고 애국 마케팅을 하면 어떨까? 이래서 제출한 신형 군복안이 뭐냐면, 붉은 실이랑 푸른 실이랑 흰 실이랑 섞어서 ‘삼색’ 천을 만드는 거였는데, 세 개 비율을 대충 맞추니 연청색 비스무리한 색깔이 나왔음. 청색끼가 도는 군복은 샹파뉴나 아르토아 등의 석회질 진흙이랑 꽤 잘 어울리는 편이었음. 프랑스 군부는 이걸 최종 승인까지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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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하고 나서 보니까 문제가 터짐. 1860년대에 프랑스 국내 염료산업이 위축됨에 따라, 알리자린 합성섬유인 붉은 실의 공급처는 다름아닌... 독일이었음

하지만 당장 급했던 프랑스군은 아 시발 모르겠다를 외치고 삼색천 생산에 들어감. 1913년에

근데 전쟁이 1914년 8월에 터져버렸죠? 그때까지 확보한 신형 천 물량은 형편없었음. 결국 프랑스군은 1914년 국경전투에 붉은 바지 차림으로 나서게 되었고, 사실 일차대전이 포병전 위주라 저거 때문에 더 뒤졌으면 얼마 더 뒤졌을까 싶기도 하지만 암튼 나중에 수십 년 동안 조롱거리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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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시작하고 발등에 불 떨어진 프랑스 전쟁성은 군복 공급계약을 맺은 바슬랑 사에 그냥 지금 있는 청회색 군복 상의 천(gris de fer bleuté)에다가 붉은 실 빼고 백색이랑 청색 실로만 짜서 옷감 만들어 오라고 지시함. 그렇게 1914년 8월 중순에 공식적으로 생산이 시작된 천은 35% 백색, 15% 인디고, 50% 청색 실로 짜였고, 1914년 11월 25일 공문에서 옅은 청색(bleu clair)로 지칭됨

호라이즌 블루(bleu horizon)은 1915년 1월자 릴뤼스트라시옹 지에서 새로운 청회색 군복을 수평선 색깔이라고 부르면서 유명해진 표현이고 공식적인 지칭이 아니었음. 그러니까 뭐 참호에서 웅크려서 보면 수평선이랑 같은 색깔로 녹아들어서 호라이즌 블루니 이런 건 낭설에 가까움

한편, 프랑스 국내 생산으로 전군 보급을 충당하긴 어려웠기에 영국, 스페인, 미국에서도 비슷한 색의 청회색 천을 수입하게 되었음. 특히 영국에서 제일 많은 양을 수입했으므로, 프랑스 군수청은 이 천들을 죄다 ‘잉글랜드산 청회색’으로 뭉뚱그려 부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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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렇게 같은 지침대로 제작한 군복이어도 색깔 바리에이션이 오졌음. 가장 왼쪽 M14 튜닉은 기존 청회색, 옆 M15는 짙은 청회색, 그 옆 M14가 영국 수입버전, 가장 오른쪽 M15가 소위 ‘호라이즌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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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5 보병연대의 ‘호라이즌 블루’ 그레이트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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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경보병대대의 영국산 진청 그레이트코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