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론 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46284




2. 적군 기병의 형성


가. 1918년-적군 기병의 기원


내전 초기 적군은 P.N. 크라스노프(Petr Nikolaevich Krasnov)와 A.I. 데니킨(Anton Ivanovic Denikin)이 이끄는 백군 기병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다. 이는 적군이 내전 초기 백군에게 군사적 주도권을 내주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특히 내전의 주요 전장이었던 남부 러시아에서 백군의 기병으로 인해 연이은 패배를 겪었음에도,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적군 지휘부는 기병육성에 미온적이었다. 적군 기병 형성을 막은 현실적 요인도 물론 존재하고 있었다. 


군 지휘관들은 기병 부대를 조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기병과 군마를 확보할 수 없었다. 전통적으로 과거의 제국군에게 기병과 군마를 공급하던 주요 지역인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와 동남부 지역은 내전 초기에 백군에게 점령된 상태였고, 돈(Don) 강 인근 지역과 우크라이나 그리고 남부 우랄 지역의 코사크 기병 대부분은이미 백군에 가담하고 있었다. 따라서 적군 기병 형성의 성패는 백군 점령 지역이었던 러시아 남부와 동남부 지역을 탈환하는 데에달려있었다.


 자연스럽게 1918년 4월 말과 5월 초 내전의 주요 격전지는 남부 러시아 지역이 되었다.모스크바의 지휘부의 기병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직접 백군에

맞서 작전을 펼쳐야 했던 일선 지휘관들에게 백군 기병은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실제로 적군이 전체 병력에서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전황을 주도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병의 부족 때문이었다. 당시 적군 정치국(Politicheskaia upravlenie RKKA:PU RKKA)의 보고에 따르면, 남부전선 예하 적군 제8군, 제9군 그리고 제10군이 도합 보병 9만 3,580명, 기병 1만 5,908명, 야포 240문, 기관총 992정을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이에 대항하던 백군은 보병 4만 5,000명, 기병 4만 명, 야포 130문, 기관총100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병력과 화력의 우세를 보이고 있는적군에게 부족했던 것은 기병이었는데, 백군의 기병은 적군의 두배가 넘는 병력이었다. 기병의 수적 우위를 이용하여 백군은 더 신속하게 기동할 수 있었고, 대규모 기병을 적시에 자신들이 원하는전술-전략적 지점에 배치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적군이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훗날 대규모 적군 기병부대로 발전하게 될 터인 몇몇 기병파르티잔 부대가 남부 러시아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기병을 둘러싼 의구심 때문에 당시의 파르티잔 형태로 활동하던기병과 그 지휘관들은 다른 ‘정규’ 병과와 달리 중앙의 계획 하에부대와 지휘관을 양성하는 과정이나 이에 따른 행정적 그리고 보급상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 


결국 이 당시의 적군 기병은 주로 남부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에 산재해 있던 파르티잔 조직과 그 파르티잔 지휘관들에 의해 자체적으로 조직될 수밖에 없었다. 백군에맞서 자신의 고향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빈곤한 코사크나 농민으로 구성된 파르티잔 부대가 훗날 적군 기병의 중추가 될터였다.


 예컨대, 전(前) 제국군 부사관이었으며 이후 적군 기병창설에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될 B.M. 두멘코(Boris MokeevichDumenko)는 1918년 2월 말 남부 러시아의 체르카스크(Cherkassk)에서 파르티잔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1918년2월과 3월에 여러 파르티잔 기병대가 전선에서 자체 조직되고 있었다.


1918년에 편성된 적군 파르티잔 부대 중 가장 대규모 부대는 살스크(Salsk) 스텝 지역에서 조직되었다. 적군 남부전선군의보고에 따르면, 1918년 봄 동안 이 지역에서만 두멘코의 기병 파르티잔을 포함한 총 45개 파르티잔 부대가 활동 중이었고, 병력규모는 기병 1,800명을 포함한 총 6만 명이었다.


이들 파르티잔 부대가 각 지역에서 백군에 맞서 그 나름의 군사적 역할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단일한 명령체계의 부재로 인해 소규모 기병부대들 간의 공조를 통한 효과적인 작전이 불가능하였다.


각 파르티잔 부대는 개별적으로 그리고 자체적으로 전투를 수행할뿐이었다. 하지만 점차 단일한 명령체계를 통해 전투를 수행할 필요가 파르티잔 지휘관들 사이에서 주장되기 시작하면서, 1918년 7월 10일에 파르티잔 지휘관들의 협의를 거쳐 수십 개의 소규모 파르티잔 기병대를 통합하여, 두멘코와 S.M. 부됸니(SemenMikhailovich Budennyi)를 각각 지휘관과 부지휘관으로 하는약 700명 규모의 기병대가 조직되었다. 이 부대의 규모는 8월경 약 1,800명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로스토프 지역의 다양한 파르티잔 부대들이 병합하여 I.R. 아파나센코(Iosif RodionovichApanasenko) 등의 파르티잔 지휘관들을 중심으로 또 다른 연대규모의 부대를 조직하였다.


이후 스탈린그라드로 명명될, 남부 러시아의 차리친(Tsaritsyn)은 적군 기병의 형성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1918년 6월적군 패잔 병력은 이후 남부전선 제10군 사령관이 될 K.E. 보로실로프(Kliment Efremovich Voroshilov)와 군량 확보를 위해 남부전선으로 파견된 스탈린이 머물고 있던 차리친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차리친에서 적군은 보로실로프와 남부전선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이었던 스탈린의 지휘 하에 백군과 일련의 포위전)을 치르게되는데, 이러한 전투를 거치면서 제1기병군(Pervaia konnaiaarmiia)의 중핵이 될 제4 그리고 제6기병사단이 조직될 터였다.


사실, 백군이 차리친을 포위하기 이전인 1918년 1월에도 이 지역에 이미 100여 명으로 구성된 1개 파르티잔 기병대가 조직된 적이 있었지만, 1918년 4월부터 5월까지 수많은 파르티잔 부대가 차리친을 중심으로 대규모 기병대로 통합 재편되기 시작하였다.1918년 말을 기준으로, 적군은 도합 22만 6,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중 오직 2만 5,000명만 기병이었다.


이 2만5,000명 중 4분의 1이상이 보로실로프의 남부전선 제10군 예하에있었다.24) 게다가 이후 제1기병군 제4기병사단 지휘관이 될 S.K.티모셴코(Semen Konstantinovich Timoshenko)와 D.F. 세르디치(Danilo Fedorovich Serdich)가 각각 750명과 730명의 기병 병력과 함께 차리친에 합류하였다. 1918년 8월 I.F. 비카도로프(Issak Fedorovich Bykadorov)의 백군 기병의 포위공격에맞서 차리친의 적군 기병은 백군 후위에 대해 약 120km에 달하는습격을 감행하였다.


 이는 적군에 의해 수행된 최초의 기병습격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적군 지휘부가 기병의 효용성을 불신한 탓에 대규모 기병대의 창설은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몇몇 지휘관들, 특히 두멘코와 부됸니 등이 사단 규모의 강력한 기병대를 창설할 필요가 있다고 모스크바의 최고사령부에 거듭 제안했으나 이들의 청1원은 묵살되었다.




나. 남부전선에서의 적군 기병의 발전


1918년 11월 제10군 예하 몇몇 지휘관들, 특히 두멘코와 부됸니의 계속된 요청으로 제10군 예하에 2개 기병사단의 창설을 요구하는 보고서가 제10군 혁명군사위원회에 제출되었다.


 한편, 차리친으로부터 더 멀리 남쪽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 제11군이 데니킨의백군과 쿠반 코사크들에게 공격받았고, 이 공격에서 살아남은 제11군 병력 중 일부, 특히 아파나센코가 지휘하고 있던 연대규모의 기병대가 보로실로프의 제10군에 합류하였다. 제10군은 이러한 인적-물적 자원을 갖고 1918년 말부터 1919년 봄까지 대규모 기병대를 조직해나갔다. 


그 일환으로 1919년 1월 30일 제10군 혁명군사위원회는 명령 제49호로 제1 돈 기병여단과 1개 보병사단을 통합해 별동기병사단(Otdel’naia kavaleriiskaia diviziia)을 창설하고 이를 두멘코와 부됸니에게 지휘토록 하였다. 별동기병사단의 창설은 이후 등장할 제1기병군과 같은 전략기병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였다.


1918년 12월 이후 보로실로프를 이어 제10군을 지휘했던 A.I.예고로프(Aleksandr Il’ich Egorov)는 강력한 기병을 보유하는것이 백군의 강력한 기병에 맞서는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 예고로프는 제10군예하 전체 기병병력을 이끌 지휘관으로 두멘코를 임명하였다.이에 따라 두멘코의 부지휘관이었던 부됸니가 두멘코의 뒤를 이어제4기병사단의 지휘관이 되었다. 예하 기병병력을 백군에 대한총공세를 위해 전략적으로 이용하고자 생각했던 예고로프는 두멘코에게 즉시 “북쪽에 있는 적의 작전 지역으로 침투하고, [볼가강 인근의] 카미신스크(Kamyshinsk)의 아군 보병부대들과 공조하여, 적 후방 깊숙이 습격을 하여 적의 보급 및 통신 기지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제10군 기병병력들은 백군후위로 침투하여 약 400km에 달하는 지역을 습격하고, 야포 48문과 기관총 100정 이상 그리고 장갑열차 1 대를 포함한 수많은군수물자와 장비를 노획하였다. 이 기병습격 덕분에 데니킨의 주력기병 중 하나였던 크라스노프의 백군 코사크 기병이 격퇴되었고,남부전선의 주도권이 잠시 동안이나마 적군으로 넘어갔다.


 이로써 대규모 기병부대와 이들의 기동성이 큰 장점을 가진다는 사실이확실하게 증명되었고, 지금까지의 소규모 전술적 임무에만 머물렀던 적군 기병의 역할이 기병사단과 보병까지 동원된 전략적 목표에대한 공격으로 변화하였다.제10군과 마찬가지로 남부전선 제9군도 예하 제14기병사단 제3기병연대를 1919년 8월 13일부로 기병여단으로 재편하면서,1919년 중반 적군은 총병력 3만 명으로 추산되는 5개 기병사단(제1, 제4, 제6, 제7, 제3 투르케스탄 기병사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다. ‘마몬토프 습격(Reid Mamontova)’과 적군의 전략기병 형성


1919년 5월 데니킨의 백군은 주력을 캅카스로 부터 차리친 인근으로 이동시켜, 남부전선에서 기병의 수적 우위를 이용한 새로운공세를 시작하였다. 당시 백군은 9개의 기병사단과 3-4개의 기병여단을 이곳에 배치하였다.


공세 초반부터 백군 기병은 적군 제9군을 사분오열시켰고, S.G. 울라가이(Sergei Georgievich Ulagai)의 백군 기병군단은 그라베브스크(Grabbebsk) 지역으로 깊숙이침투해 제10군 좌익을 교란하면서, 적군 남부전선의 주요 통신기지와 보급기지를 파괴하였다. 결국 1919년 6월 9일에 데니킨의 백군은 제10군 좌익을 돌파하여, 이틀 후 남부전선의 중심지인 차리친을 다시 포위하게 되었다.


적군 최고사령부는 남부전선의 상황이 매우 긴박하다고 판단했다. “이제 남부전선은 분해되었다. 적은승리에 도취되었고, 엄청날 정도로 용감하고 대담해졌다. [백군]기

병은 아군 후위 깊숙이 침투해 엄청난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남부전선의 상황은 총체적 재앙과도 같다.”


1919년 5월까지 적군 남부전선이 보유하고 있던 기병 연대와 사단은 3-4개에 불과하였다. 기병을 이용한 백군의 공세에 대응하기위해서는 대규모 기병대가 시급하였다. 결국, 새롭게 제10군의 지휘관이 된 L.L. 클류예프(Leonid Lavrovich Kliuev)는 부됸니의 제4기병사단과 아파나센코의 제6기병사단을 통합하여 1919년6월 26일 제1기병군단을 창설하였다.


부상으로 인해 두멘코가지휘관의 책무를 수행할 수 없자, 부됸니가 기병군단의 지휘관으로임명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사건 하나가 발생하였다. 백군 지휘부가적군 제10군 후위에 K.K. 마몬토프(Konstantin KonstantinovichMamontov)의 기병군단을 투입한 것이었다. 


이는 내전의 전황에큰 영향을 주었던 소위 ‘마몬토프 습격’으로 불리는 작전이었다. 마몬토프가 이끄는 제4 돈 코사크 기병군단은 기병 6,000명, 보병3,000명, 야포 12문, 장갑열차 7대 그리고 장갑차량 3대를 이용하여, 총 거리 2,200km에 달하는 엄청난 기병습격을 수행하여 적군의 통신망과 보급선을 파괴하였다. 마몬토프의 습격에는 분명한전략적 목표가 있었는데, 그것은 적군의 후위를 교란하고 백군의공세에 맞서 적군이 준비하고 있던 새로운 방어계획을 저지하는 것

이었다.


‘마몬토프 습격’으로 인해, 돈 강 우안(右岸)에 주둔하고있던 적군 제9군은 북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고, 1919년 8월 18일에 마몬토프가 탐보프를 점령하게 되면서 남부전선에서의 적군방어선 전체가 200km나 밀려났다.


 ‘마몬토프 습격’은 대규모 기병 운용과 기병습격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919년 9월 17일 돈 강을 도하한 후 9월 19일 A.G. 쉬쿠로(Andrei Grigor’evich Shkuro)의 본대로 귀환할 때까지 이어졌던 ‘마몬토프 습격’으로 인해 지금까지 기병에 회의적이었던 모스크바의 적군 지휘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레닌이 남부전선 혁명군사위원회의 위원 M.M. 라셰비치(Mikhail Mikhailovich Lashevich)에게 보낸 전문에서 ‘마몬토프 습격’ 당시의 불안감이 잘 드러난다. “[우리는] 마몬토프의 성공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마몬토프는 도로와 보급기지를 파괴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매우 치명적인 것이다.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는가? [‘마몬토프 습격’에 대해] 계속 보고하라!”이러한 문제에 직면한 공화국혁명군사위원회(Revoliutsionnyi voennyi sovet respubliki:RVSR)는 이때부터 새로운 형태의 기병, 즉 전략적 임무를 수행할수 있는 대규모 기병 창설을 결정하였다.


약 18개월의 전쟁 수행과특히 이 시기 백군의 전략 기병운용에 충격을 받은 트로츠키를 비롯한 적군 지휘부는 기병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게 된다. 


1919년 9월 15일에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는 기병 확충에 관한 명령을 내렸고,49) 약 2주 뒤인 10월 1일 국방위원회(Sovet rabochei ikrest'ianskoi oborony: SRKO)는 기병 창설과 관련된 비용으로 20억 루블을 승인하였다. 적군 기병을 육성하는 일은 이제 남부전선의 문제에서 적군 전체의 사안이 되었다.


1919년 9월 초 부상에서 회복되어 복귀한 두멘코를 지휘관으로,남부전선 예하 제37, 제38 기병여단과 D.P. 즐로바(DmitriiPetrovich Zhloba)가 지휘하던 별동기병여단이 통합되어 1개 기병군단이 편성되었다. 같은 시기에 적군 제9군 사령부도 9개 기병연대로 구성된 1개 기병단(kavaleriiskaia gruppa)을 편성하여 M.F. 블리노프(Mikhail Fedoseevich Blinov)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1919년 9월경 적군도 두멘코와 부됸니가 각각 이끄는 2개의 기병군단과 블리노프의 1개 기병단으로 구성된전략기병을 보유하게 되었다.적군은 백군의 또 다른 대규모 기병습격에 대비하고 데니킨의 백군에 맞서 남부전선의 전황을 타개하기 위한 계획에 돌입하였다.


적군 최고사령부는 남부전선과 동남부전선의 모든 적군 병력을 동원하여 백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가하고자 하였다. 그 일환으로 1919년 11월 중순 보병 7만 9,500명과 기병 1만 6,000명이남부전선에 집결하였다. 이 때 집결한 병력 중에서 부됸니의 기병군단이 가장 강력하고 기동성이 높은 부대였다. 


한편, 동남부전선에 있던 병력은 보병 3만 8,735명과 기병 9,750명이었다. 동남부전선에서 기동력과 타격력을 자랑하던 부대는 두멘코의 기병군단과제9군 예하 블리노프의 기병단이었다.바로 이 시기에 남부전선에서 제1기병군이 창설되었다.


 남부전선의 상황을 논하기 위해 1919년 9월 26일에 개최된 중앙위원회총회에서 남부전선 강화를 위해 보다 대규모의 전략기병 창설이 논의 되었고, 같은 날 공화국 혁명군사위원회는 당시 제4, 제6 그리고 제11 기병사단으로 구성되어 있던 부됸니의 제1기병군단을 기병군(konnaia armiia)으로 확대 재편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명령으로 제4, 제6, 제11 기병사단 외에도, 제9, 제12 보병 사단과소규모 장갑차량과 항공기 그리고 장갑열차도 제1기병군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부대 구성은 기병군이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군사조직이며, 보병과 긴밀하게 공조하는 강력한 제병협동에 기반하고있음을 보여준다.


1920년 초 즈음 제1기병군의 병력은 기병1만 5,000명, 야포 19문, 기관총 238정, 장갑열차 8대였다. 제1기병군의 창설로 인해, 1919년 가을 이후 내전의 전황은 백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남부전선에서 적군의 공격이 성공하자 백군 병력은 아조프해를 두고 양쪽으로 분열되었다.


 부됸니의제1기병군은 먼저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그리고 11월과 12월에는돈 지역 중부에서 백군을 몰아냈고, 이후 돈 강 유역을 탈환한 뒤남쪽으로 이동하였다.58) 결국, 1919년 12월 말 백군 제4 돈 기병군단 지휘관 울라가이는 남부전선의 전황에 대한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전체적인 전황으로 판단할 때,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의 기병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러시아 영토 내에 서 전투는 1920년 11월경에 종결될 터이지만, 제1기병군과 같은전략기병의 등장은 기병의 기동과 습격이 그 전투의 특징이었던 남부전선, 더 나아가 러시아 내전이 결국은 적군의 승리로 귀결될 수있었음을 보여주었다. 1920년 봄 즈음에 러시아 내전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꼐속)



여담:왜 청1원이 금지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