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간기의 아프리카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80


안녕 갤럼들갤이 혼란한 와중에 지난번에 올리기 시작한 2대전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대한 글을 가져왔음.

참고로 지금 글을 시작하는 김에 밝힐 것이 있는데난 롬멜 장군 나오는 북아프리카 해안 이야기는 안 할 예정임.

지금 하고 있는 것들 만으로도 상당히 벅찬 지라내 역량이 닫지 않을 것 같으면 이렇게 선을 긋는 게 좋다고 생각했음.

그리고 덧붙여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나잘못된 점을 발견한 사람이 있으면 나에게 말해 줬으면 함나도 배우는 입장이니까그럼 글 내용으로 들어가겠음.


프랑스 항복하다!


1939년 9월 1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고빠르게 진격하여 10월 6일에 폴란드 전역을 완전히 제압했음.

그리고 1940년 5월 10일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유럽을 침공, 6월 22일 프랑스의 휴전을 받아내었고이로 인해서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프랑스가 성립되었음

한편 영국과의 회담을 위해 국방 차관 자격으로 런던에 가 있던 드골은 6 16일 짧은 귀국 후 다음날 런던으로 10만 프랑의 비자금과 함께 피신했고

26일 자유 프랑스의 정식 지도자로서 영국 정부에게 인정받게 되었음.

하지만 드골에게는 부족한 것들이 많았음기존 관료들이 자유 프랑스를 회피하여 지지기반은 턱없이 연약했으며

이 상황을 이용하기 위한 영국의 간섭과 무시를 끊임없이 받았고실제로 메르스 엘 케비르 전투로 이는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음

또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영토가 없다는 점에서 드골과 자유 프랑스의 약점은 여실히 드러났음

이는 국가를 구성하는 행정력이 전무하단 뜻이었으며사용 가능한 자원과 병력의 양이 극도로 한정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는 드골의 자유 프랑스가 제대로 된 활동을 펼치는 데에 있어서 크나큰 제한으로 다가왔음그리고 이 상황에서프랑스의 해외 식민지들이 가지는 의미는 남달랐음.


 그리고 이 상황에서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 제도가 빛을 발했음프랑스의 식민지 통치 체제는 직접 통치 제도로

왕이나 추장의 고문을 세워 간접적 통치를 수행하던 영국과는 다르게 직접 대통령의 명령을 받는 총독의 통치를 받는 방식이었음

근데 이 식민지의 군제에 있어서 특이점이 있는데각 식민지의 군대는 대통령을 직속 상관으로 두지 않고 총독을 수장으로 두었음

그렇기에 식민지의 군대들은 총독의 권한에 따라서 비시 프랑스로 가느냐 자유 프랑스로 가느냐가 갈리게 되었음.

 드골과 그의 참모들은 이 점을 놓치지 않았고식민지 총독들의 설득에 들어갔음그리고 실제로 그 성과 또한 볼 수 있었음

우선 6월 말 뉴 헤브리디스 제도가 자유 프랑스에 가세하였고, 8 26일 르클레르의 설득으로 인해 최초의 흑인 식민지 총독 기아나인 펠릭스 에부에의 차드가 자유 프랑스의 편이 되었음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카메룬이 또 다음 날에는 콩고가 가담하게 되었음

그리고 드골이 이렇게 지지기반과 지배력을 갖추려 노력하는 동안 다른 한 편에서는 자유 프랑스 최초의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음그것은 바로 다카르 상륙 작전이었음.


대전기의 다카르

 다카르는 현 세네갈의 수도로아프리카의 최서단을 차지하고 있으며대부분의 갤럼들은 다카르 랠리로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임

하지만 다카르는 다른 아프리카 식민지 도시들보다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

우선 서아프리카 최서단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유럽 카리브 아프리카 삼각 무역의 한 거점으로 꼽히던 곳으로

제국주의 시기에 접어들고 나서도 그 위상을 잃지 않고 있었음우선 장거리 항해 후 유럽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도시로 보급항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프랑스 해군의 주요 군항으로서 기능하였음실제로 리슐리외를 포함한 다수의 프랑스 해군 전력이 다카르로 도주한 상태였음

두번째는 철도를 통해 운송한 자원을 항구를 통해 수출하는 식민지 경제 특성상

발달한 항구를 가지고 있던 다카르에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식민지의 부가 모두 모이는 곳 중 하나였음

그렇기에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수도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이에 더해 프랑스 정부와 폴란드 정부가 소유한 금의 상당 지분이 다카르의 프랑스 은행에 저장되어 있었음

세번째로는 영국의 주요 항구 중 하나이며대전기 유보트의 주요 활동 구역이던 프리타운 가까이에 있어유보트 항구로서 사용가능하다는 점이었음

실제로 비시 프랑스와 나치 독일은 유보트에 대한 보급 작전들의 실패 횟수가 늘어 작전에 차질이 생기자 다카르를 유보트 기지로서 사용하고자 협정을 맺는 등 여러 시도들을 했음.


다카르의 리슐리외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다카르를 영국은 먼저 치기를 원했고주변부를 먼저 공략하려 했던 드골은 이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영국과 함께 다카르를 치기로 결정했음

당시 다카르에는 프랑스의 최신 전함 리슐리외를 비롯하여서 두 척의 순양함과 4척의 구축함, 3척의 잠수함이 주둔해 있었음

하지만 주 전력인 리슐리외는 7 8일 영국 항모 Hermes가 보낸 뇌격기의 공격으로 인해 바다 바닥에 착저해 있는 상태였음

드골과 영국군은 항모 아크 로열(Ark royal), 전함 레졸루션(Resolution)과 바함(Barham)을 비롯해 프랑스인 2400명을 포함한 9000명의 상륙 전력을 데리고 다카르를 침공했음.

 하지만 여기서 첫번째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음드골은 내심 레지스탕스 활동에도 관심을 보이던 서아프리카 총독 피에르 부아송이 순순히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음

하지만 부아송은 단호하게 거절했고다카르 안의 자유 프랑스 동조자들은 모두 체포당한 상태였으며

협상단에게는 기관총 사격 세례가 퍼부어져 부상을 당하게 되었음당혹한 드골과 영국군은 9 23일 작전을 수행하였음.

 그러나 여기서 두번째 변수가 나타났으니 바로 자욱한 안개였음본디 영국군은 항모 Ark royal을 이용해 해안 시설물들을 폭격하려 했지만

안개로 인해 이는 완전히 무산되고 말았음결국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해안포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다카르로 함대를 들여보내야 했고곧이어 치열한 포격전이 이뤄지게 되었음


다카르의 해안포.

우선 전함 바함은 리슐리외를 도맡아 서로간에 이틀동안 치열한 포격전을 펼쳤고리슐리외는 바함에게바함은 해안포 사격으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음

한편 치열한 포격전이 수면 위에서 펼쳐지던 동안바닷속에서 세번째 변수 잠수함이 나타났음

본디 다카르의 비시 프랑스 잠수함은 Persee, Ajax, Bevezier 세 척으로 앞의 두척은 침몰하고 말았음

하지만 Bevezier는 연합군의 화망을 뚫고 전함 레졸루션에게 접근 어뢰를 명중시켜 치명타를 입히고 말았음

이로서 영국군은 주 화력을 상실하게 되었고더 이상 다카르에 상륙할 길을 잃고 말아 상륙을 포기하고 3일에 걸친 전투 끝에 프리타운으로 돌아가게 되었음.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영국군과 프랑스 군인들이 목숨을 잃고 말았고, 이러한 부담은 드골에게 모두 돌려졌음.

그 이유는 다카르의 방비 상태를 본 영국군 수뇌부가 자유 프랑스 내부에 배신자가 있어, 작전이 모두 새어나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음.

이로 인해 드골은 한동안 불신의 눈초리를 계속해서 받으면서 활동해야 했었음.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에서 자유 프랑스의 세력권은 가봉의 비시 프랑스 파벌들을 완전히 진압함으로서 자리잡은 상태였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골은 다시금 신뢰와 능력을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머지않아 동아프리카 전역으로 아프리카 전역의 중심이 옮겨지면서 돌아오게 되었음.


이거 3탄 만들어야 하는데 귀찮다...